182화. 亢龍有悔(항룡유회)
비봉문의 제자들은 함덕유의 희생으로 겨우 고개를 넘었다. 다행히 장은 일행이 남아 기다린 덕에 후발대의 비극을 전할 수 있었다.
‘이거 야단났구나. 용가현을 미리 데려오지 않은 게 패착이다. 저 멍청한 조카 놈을 남긴다 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지금이라도 되돌아가 구해야 한다.’
아무리 예전만 못한 용문파라지만, 강호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용가현은 오대산검의 장문 중 가장 연륜이 있고 명성이 자자했다. 당연히 승리하리라 장담한 신교 토벌 작전에서 용가현이 비명횡사했다는 소문이 돌면 오대산검의 명성에 흠이 날 것이 자명했다.
장은은 몸이 날랜 황석파 제자 네댓 명을 차출하여 길을 나섰다. 부상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고유생과 봉명을 남겨두고 떠나자니 뒤통수가 당겼지만, 지금은 다른 방도가 없었다.
“사숙, 아직 돌아가실 때가 아니니 목숨 보전하십시오. 여의치 않으면 저 머저리를 희생시켜서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방금 지목한 그 머저리, 봉명에게도 한 마디 단단히 일러두었다.
“자네 백부님은 반드시 구해오겠네. 만약 내가 하루 안에 돌아오지 못한다면 먼저 출발하게. 이 앞 곧은 길로 쭉 가면 금천까지 열흘 안팎이네. 물론 두타공파와 그의 동맹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일단은 허튼짓 말고 형진의 말에 순순히 따라야 하네. 금천에서 태자 저하와 호위 무사들을 만나기로 하였어. 그때까지만 버텨내어, 우리 사숙을 잘 지켜주란 말일세.”
“알겠습니다. 반드시 지켜내겠습니다.”
왼쪽 팔에 부목을 댄 봉명의 꼴은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허나, 애써 내색하지 않고 내내 거짓 표정을 꾸며 내었다. 만약 용가현을 구해내지 못한다면 차기 장문을 맡을 이였다. 당장은 한심해도 관계를 잘 유지해야 했다.
워낙에 서두른 덕에, 고개를 넘는 데는 한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을 맞닥뜨린 장은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교위가 이끄는 태자의 무사들 스물이 마치 봉분처럼 공터 가운데에 봉긋이 쌓여 있었다. 시체에 꽂힌 표창의 모양만 보아도 범인이 누구인지 뻔했다.
“봉천, 이 살인귀가 아주 발광했구나.”
핏물과 빗물이 섞인 웅덩이를 피해 발걸음을 옮기는 장은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그리 복잡하지 않은 계획이었건만, 이제 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 수 없게 된 셈이었다. 심지어 천서국의 사호세주가 모두 뛰어들었으니 큰일이었다.
“용문주님의 시신은 없는 것 같습니다.”
“혹시 다른 흔적이 없는지 찾아보아라.”
불행인지, 다행인지 봉천이 당장 용가현을 죽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비산을 복용한 그는 당분간 제대로 내력을 끌어올리지 못할 터였다. 제멋대로에 미치광이인 봉천의 인질이 되다니,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았을 수도 있었다.
‘굳이 발품을 팔아가며 용가현을 구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의 죽음에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적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도구로 사용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다. 다만,’
장은이 가장 염려되는 상대는 천서국도 아니요, 강운선도 아니었다. 뚜렷하게 드러난 적은 위협이 될지언정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백형진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정말 금황자의 사람이 맞을까?’
그는 두 황자 중 누가 황위를 가지더라도 좋았다. 다만 이긴 쪽의 권력에 기대어 부귀와 명예를 얻으면 그뿐. 하여 아마 백형진도 비슷한 생각이 아닐까 가늠해보았다.
‘그렇다고 해도 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스승의 뜻을 거스른 이유는 무엇인가?’
장은이 막힌 부분이 여기였다. 저울질할 생각이었다면 이리 전면에 나서서 금황자의 편을 드는 건 위험했다. 행동은 태자의 편에서 완전히 돌아선 모습이니, 변명의 여지 없이 역심이었다.
‘일단 우리는 중립을 지킨다. 고유생과 의기투합하여 양쪽의 간을 보다가 마지막에 결정하면 된다. 천서국은 태자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이나, 분명 배신할 것이다. 그럼 그들이 누구 쪽을 먼저 공격하느냐가 관건.’
장은의 비상한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모든 경우를 다 고려하여 철저한 대비책을 마련해야 했다. 백형진의 지시에 군말 없이 따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일단 천서국을 이 싸움에서 빠지도록 하는 게 우선, 후에 어느 쪽이든 유리한 황자의 편을 든다면 끝날 일이었다. 그에 비하면 신교 따위야, 언제든 밟아줄 수 있는 조무래기들에 불과했다.
‘일단 은률이 약속대로 가은을 데리고 돌아와야 강운선과 거랠 해볼 터. 또한, 백형진의 의도를 알아내기 전까지는 고유생과 역할을 나눠 저울의 무게를 잘 분배해야 한다.’
제자들 역시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하고 그의 주위로 돌아왔다. 장은은 이쯤에서 수색을 포기하기로 했다. 성과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금천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열흘이 걸렸다. 음모가 뒤얽힌 포식자들의 숲에서 하루빨리 빠져나가는 게 모두를 위해 좋았다.
부스럭
“누구냐?”
잠시 잡념에 빠진 탓이었다. 노송 사이에서 하얀 인영이 언뜻 보이자, 장은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혹여 적을 만났나 싶어 대번에 검을 바로잡았을 때였다.
“장문주님?”
“아니, 고문주?”
어쩌면 당연한 만남이었다. 인경은 미리 약속한 일차 거점에서 꼬박 이틀을 기다렸다. 용문파는 물론이거니와 그 어떤 동맹의 소식도 들을 수 없자 서둘러 다음 거점으로 넘어온 터였다. 다행히 장은과 만났으니 헛걸음은 아니게 되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뒤따라 나타난 무리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코를 감아쥐었다. 하루가 꼬박 지난 시체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오는 내내 곳곳에서 시체 무덤을 마주했지만, 끔찍한 광경에 익숙해질 리 없었다.
“용문파가 기습을 받은 듯싶습니다. 용문주님은 생사를 모르고 그의 조카인 용형제는 큰 부상을 입었지요. 도움을 요청하여 뒤늦게 달려왔더니 이 사달이 나 있지 뭡니까? 아무리 보아도 죽은 이들의 정체를 알 수 없고 이 끔찍한 살육을 벌인 자도 모르겠으니 퍽 난감하던 찹니다.”
무덤덤하게 시신을 살펴보는 인경의 뒤에서 장은은 서투른 거짓말을 둘러댔다. 아직 의중을 파악할 수 없는 상대에게 태자니, 금황자니 미주알고주알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고인경은 강운선과 남다른 인연이 있지 않은가? 신뢰가 쌓일 때까지는 죽으로 지켜볼 작정이었다.
“이들의 착장은 아무리 보아도 무림의 협객이 아니군요. 또한, 무기가 모두 동일하고 검날의 모양이 독특한 것으로 보아 정식으로 훈련받은 군사가 틀림없습니다.”
“과연 그렇구나.”
어느새 옆으로 바짝 다가온 영준이 몰래 귀엣말을 했다. 인경도 마침 나교위의 품속에서 황실의 문양이 찍힌 단검을 찾은 터였다. 적어도 정체 모를 소 문파의 잔당은 아니었다.
‘장은, 또다시 나를 속이고 기만하려는 게로군. 그래, 어디 마음껏 속여 보아라.’
탐색을 마친 인경은 영준에게 일러 큰 구덩이를 파도록 명했다. 한편 장은을 향해 공손히 읍하고는 여기까지 오는 중에 일어난 일을 조곤조곤 설명했다.
“하면, 소문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사호세주의 두 악귀가 길을 막고 차례로 덤벼드니, 문주님이 희생을 자처하셨습니다. 안타깝게도 여태 소식이 없어 생사도 모른답니다. 뿐입니까? 보현 사저가 비명횡사하였고, 은이도 곡 뭐라는 사람에게 납치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어쩐단 말입니까?”
기정이 나서 울음을 터뜨리니, 곧 주변이 전부 눈물바다가 되었다. 속마음을 감추는 데 탁월한 장은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쉽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가은이 하필 곡해고의 손에 들어가다니, 이런 낭패가 있나? 그놈들은 필시 열쇠의 존재를 눈치챘을 터,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탈취하려 들 것이다.’
유일한 희망은 정은률이었다. 가은의 일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그가 곡해고를 따라갔음이 분명했다. 실력이야 한참 모자를 테지만, 어쩌면 그의 투지와 광기로 기적을 만들어 낼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단 다른 오대산검 일행과 합류하는 게 우선입니다.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 세를 불려 함께 대처해야 하니까요. 또한, 흩어진 이들도 결국 목적지인 금천에 이를 것입니다. 분명 소문주님께서 그리로 오실 테니 미리부터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은의 그렁그렁한 눈망울에는 형제들에 대한 믿음과 애정이 가득했다. 대번에 모두가 수긍하고 받아들이니, 곧 어수선한 상황이 정리되었다.
장은이 이끄는 대로 고개를 하나 더 넘었을 때, 사방은 이미 깜깜한 어둠이었다. 이제 두타공파를 제외한 오대산검 모두가 드디어 한곳에 모인 셈이었다. 오랜 여정으로 지친 이들은 같은 편을 만났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한밤중의 가을 산속은 겨울만큼이나 추웠다. 열악한 환경에서 부상자들의 상태가 좋을 리 없었다. 특히 고유생의 상처가 심각했는데 곧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제가 좀 살펴도 되겠습니까?”
장은이 사숙의 상태를 건성으로 보아 넘기자, 인경이 나섰다. 맥을 짚어 보니 외상보다도 내상이 심각했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다면 사흘도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어, 어떤가?”
오락가락하는 의식을 애써 붙잡고 고유생이 입을 달싹거렸다. 비쩍 마른 입술 사이로 비릿한 피 냄새가 올라왔다. 그 역시 자신의 상황이 퍽 심각함을 짐작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틀린 것 같다. 약선이 옆에 있다면 모를까, 살릴 도리가 없다. 아아, 인제 와서 그녀를 어찌 찾는단 말인가? 어? 잠깐!’
인경은 문득 떠오른 기억이 있어, 품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뒤지고 나서야 가슴 안쪽 깊숙이 주머니 하나가 만져졌다. 바로 윤설이 선물로 준 환약과 금창약이었다.
“장로님, 인명은 재천이니, 포기하지 마십시오. 마침 제게 효험이 뛰어난 약이 있습니다. 분명 차도가 있을 겁니다.”
“문주님? 그 귀한걸.”
영준이 말리려고 했을 때는 이미 환약을 고유생의 목구멍에 다 털어 넣은 뒤였다. 황석파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 고대산파 제자들은 내심 못마땅했으나, 그렇다고 나서서 불만을 표하는 이는 없었다. 그의 과한 오지랖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선한 인품을 존경하기 때문이었다.
“자네…….”
인경의 진심 어린 태도에 감명받은 이는 비단 고대산파 제자들뿐만이 아니었다. 고유생은 평소 그를 업신여기고 무시했던 자신이 부끄러워 눈을 마주치기도 어려웠다. 인연이 어찌 엮일지 모를진대, 지위만 믿고 경거망동했으니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저 망할 사질은 나를 이용하려고 안달이건만, 이 아이는 다르구나. 참으로 부끄럽다. 부끄러워.’
평생 자신이 늘 옳고 제일 잘난 줄 알았던 그였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난생처음 후회의 감정을 느껴본 셈이었다.
“미안하네.”
“네?”
“내 자네 백부의 부탁을 모른 척한 그때의 일만큼은 평생 후회하였네.”
뜻밖의 사과에 인경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날, 무릎을 꿇고 읍소하던 백부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누구 하나 나서주지 않던 대청 안의 형제들, 그중에는 고유생도 있었다.
“되었습니다. 다 지난 일인걸요.”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솟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여전히 미움도 분노도 사그라지지 않았으나, 목숨의 경중을 따질 생각은 없었다.
“내 그 보답으로 중한 사실을 하나 알려주겠네.”
“네?”
고유생은 자신의 이 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인경이라면, 적어도 개인의 욕심을 위해 이용하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는 혹시 장은이 들을까 싶어 인경의 귀를 바짝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개미 기어가는 소리만큼 작게 웅얼거렸다.
“강운선은 조양을 죽이지 않았네.”
“……!”
“조양을 죽인 자는 그의 제자 백형진이니까.”
*** 항룡유회(亢龍有悔):
하늘 끝까지 올라간 용이 내려갈 길밖에 없음을 후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