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81화 (181/209)

181화. 我生然后杀他(아생연후살타)

함덕유가 이끄는 후발대는 주변을 정리하느라 두 시진을 넘게 지체했다. 물론 금오문의 형제들을 묻어주고 싶다는 그의 의견에 고유생은 석연치 않아 했다. 그러나 최소한의 도리는 다하고 싶었다.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추목현의 시신을 묻으며 함덕유는 상념에 잠겼다. 비루한 문파를 위한 선택이었을 뿐, 마음에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무심하게 용가현 쪽을 바라보았다. 공허한 그의 눈에는 온갖 후회와 좌절이 진득하게 들어차 있었다. 왠지 그에게 공감이 되어 가슴 한편이 저릿저릿했다.

“이제 움직이지요.”

완연한 가을 날씨였음에도 모두 땀범벅이었다. 잠시라도 쉬어가면 좋으련만, 더 늦었다가는 일행을 완전히 놓칠 것 같았다. 다행히 태자가 파견한 나교위는 불평 한마디 없었다. 묵묵히 병사들을 이끌고 용가현을 태운 수레를 호위했다.

“용문주님, 불편하시더라도 참으십시오. 금천에서 일행과 합류하면 반드시 해약을 드리겠습니다.”

“…….”

함덕유의 정중한 태도에도 용가현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먼 곳을 바라볼 뿐이었다.

“가자!”

작은 수레를 제외하고는 비봉문과 나교위의 병사들까지 합쳐 삼십여 명의 도보 행렬이었다. 험한 고갯길이기에 금천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열흘은 족히 걸릴 듯했다. 그때까지 무탈하게 피로를 최소화하면서 움직이는 게 최우선 목표였다.

툭, 투둑

“어?”

그때, 머리 위로 빗방울이 톡톡 떨어져 내렸다. 어스름히 해가 지는 중에 비까지 오다니, 설상가상이 따로 없었다. 줄기가 점점 굵어지는 것이, 그냥 지나갈 비는 아닌 듯싶었다. 함덕유는 서둘러 나교위를 불러 비를 피할 곳부터 찾기로 했다.

후두둑

쏴아!

순식간에 폭우로 변한 빗줄기 속에서 미처 움직이지 못한 함덕유의 무리는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잎이 풍성한 나무 아래를 찾은 비봉문은 다행인 축이었다. 나교위와 이십여 명의 병사들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맞는 중이었다.

휘익!

“윽!”

누군가의 비명이 시작이었다. 날아오는 표창을 미처 피하지 못한 병사들이 하나둘 바닥에 엎어졌다. 어디에서 날아오는지도 가늠하기 어려워 전혀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유일하게 버티던 나교위마저 쓰러지자, 드디어 쏟아붓던 비도, 표창도 소강상태가 되었다. 고작 일각도 지나지 않아 전멸이었다.

“누구냐?”

함덕유는 차마 중앙에 나서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만 질러댔다. 자신이 생각해도 어리석고 한심하였으나 지금은 다른 방도가 없었다. 섣불리 덤볐다가는 남은 십여 명의 목숨도 끝이었다.

“아아, 싱겁게 끝나버렸군.”

가느다란 빗줄기를 뚫고 붉은 옷의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분칠이 흘러내려 거무튀튀한 낯빛이 드러난 꼴이 소름 끼쳤다. 그 와중에도 낭창낭창한 걸음걸이가 보는 이로 하여금 불쾌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대체 곡해고 형님은 어딨는 거야? 에라, 모르겠다. 다 죽여버리고 말지.”

“누, 누구냐?”

적이 혼자라는 사실을 확인한 함덕유는 드디어 자신 있게 밖으로 튀어나왔다. 기습이라면 모를까, 아군의 수가 압도적인데 아무리 고수라 한들 이기지 못할까 싶었다.

“오호, 이 듣도 보도 못한 놈은 또 뭐람?”

“네 정체나 밝혀라.”

“흐음, 대 천서국의 사호세주라고 들어봤으려나 몰라?”

그제야 함덕유의 동공이 바르르 떨렸다. 붉은 옷, 별 모양의 표창, 그리고 저 성별을 알 수 없는 기괴한 분장.

‘설마, 지국천왕 봉천?’

상대의 표정 변화를 주시하던 봉천은 예의 그 섬뜩한 웃음을 터뜨렸다. 어둑어둑한 하늘에 빗소리까지 더해지니 귀신 소리와 다를 바 없었다.

“그나저나 얘야, 혹시 비파를 들고 다니는 못생긴 늙은이를 보지 못했니?”

이미 공포심에 사로잡힌 덕유는 순순히 고개를 내저었다. 인상착의로 보아 곡해고를 이르는 것 같았다. 만약 그자까지 나타난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일행 모두의 목숨은 여기서 끝이었다.

“이 망할 계집애, 감히 나를 재워? 만나면 가만두지 않을 테다. 그나저나 어디 가서 신교 놈들을 잡누?”

봉천은 앞에 적을 세워두고도 여유만만이었다. 굳이 겨뤄보지 않아도 상대의 실력쯤은 가늠할 수 있었다. 나무 뒤에 숨은 조무래기까지 한꺼번에 덤빈다고 하더라도 일각이면 충분했다.

‘차라리 잘 되었다. 지금이라도 흩어져 도망치면 다는 아니어도 절반쯤은 살릴 수 있으리라.’

함덕유는 바로 근처에 숨어 있는 사제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위급 시 신호를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몇 번의 깜빡거림만으로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사형을 향해 수긍의 답을 한 그는 곧이어 같은 신호를 형제들에게 전달했다.

“분명히 이 길이 맞는데, 거 참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여전히 봉천은 자기 생각에 빠진 중이었다. 윤설이 준 약은 확실히 해독에 탁월했다. 대신 무려 한나절이나 잠을 재워놓았으니, 정신을 차렸을 때는 거의 하루가 지나 있었다. 그 탓에 소소정을 비롯한 선운검파 제자들을 모두 놓치고 말았다. 그 이후가 더 가관이었다. 혼비백산하여 샛길을 찾아 이동하는 바람에 완전히 방향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영감탱이, 또 오지게 잔소리 해달 텐데 큰일이구나.”

휘익!

얼마나 지났을까? 가느다란 빗방울조차 잦아들던 그때, 청량한 휘파람 소리가 고요한 숲속에 울려 퍼졌다. 드디어 기회를 포착한 덕유의 신호였다. 봉천이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여태 숨어 있던 비봉문의 제자들이 각자 정한 방향으로 흩어져 뛰었다. 자신이 살기 위한 뜀박질임과 동시에 사형제들을 위한 희생이었다. 그리고,

“어디 서쪽 오랑캐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자!”

발검하기도 전에 덕유는 알고 있었다. 절대로 이 악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그래도 상관없었다. 단 한 합이라도 견뎌 시간을 벌 수 있다면, 누군가의 목숨을 살릴지도 모른다. 오직 그 바람만이 검에 투지를 불어넣었다.

“우훗, 가소로운 놈. 감히 이깟 재주로 덤벼?”

검날이 닿기 직전에서야 붉은 인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직 보법만 사용했을 뿐인데 덕유의 검은 적의 옷자락에 스치지도 않았다. 무려 세 개의 초식을 연달아 펼쳤으나 허공만 가를 뿐이었다.

쉬익!

그 사이 봉천은 작은 원을 그리며 상대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흐린 눈으로 보아도 약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명문정파라고 으스대는 놈들은 대부분 이와 같았다. 그저 역사와 전통 운운하며 허세나 떠는 것들. 옛 명성에 취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니 늘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한때는 형권의 철퇴를 수십 합이나 받아냈던 비봉문이건만.”

혀를 끌끌 차는 봉천의 모습은 덕유의 투지를 끌어올렸다. 그러나 의지만으로 극복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법. 다시 세 개의 초식을 펼쳤으나 이미 검날은 봉천의 손가락 사이에 있었다.

“아가야, 참으로 보잘것없어 죽이는 게 망설여질 정도구나. 오랑캐니, 마두니 씨부렁거리기 전에 주제 파악이나 더 하렴.”

“아아.”

이미 덕유의 목에는 적의 기다란 손톱이 박혀 있었다. 그는 지금이 그의 마지막 순간임을 직감했다. 어차피 죽음을 각오하고 덤빈 일이라지만 상대와 제대로 싸워볼 실력도 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기만 했다.

“죄송합니다.”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 덕유는 용가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담긴 수많은 감정 중에서 자신에 대한 원망도 있을까? 하지만 읽어낸 것은 연민과 미안함이었다.

“기본기조차 안된 놈이 어찌 무리를 이끌었누?”

죽은 덕유의 시신을 아무렇게나 내던진 봉천은 피 묻은 손을 옷자락에 닦아내며 연신 중얼거렸다. 그의 모습은 거대한 붉은 삵과 같았다. 날카로운 손톱을 움찔거리며 도망간 이들의 경로를 쓱 훑었다. 일부는 건너편 고개로 넘어갔으나 대부분은 아직 숲을 빠져나가지도 못했다.

“아아, 귀찮아 죽겠다.”

약의 부작용이 몸에 남은 탓인지, 평소보다 몹시 피곤했다. 얼른 나머지를 처리하자 싶어 이번엔 표창 대신 천으로 만든 채찍을 꺼내 들었다. 저쪽 수풀 쪽으로 한 번만 휘둘러도 머리통 네댓 개는 수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보시오, 지국천왕!”

“으응? 이게 누구야?”

막 출수하려던 봉천을 막아선 이는 다름 아닌 용가현이었다. 일이 벌어지는 내내 어두운 구석에 버려져 있던 터였다. 혈도를 찍히고 마비산까지 먹어 손가락조차 움직이기 어려웠으나 비봉문의 형제들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에 나선 참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그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아니, 우리 무왕 용문주님께서 어쩌다 이리 우스운 꼴이 되셨을까?”

봉천 역시 단박에 가현을 알아보았다. 고작 몇 번 마주쳤을 뿐이지만 나름 좋은 인상으로 남았기에 상대에 대한 악의는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천서국은 누구의 편입니까? 태자 저하입니까? 금황자입니까?”

“음…….”

뜻밖의 질문에 당황한 봉천은 본래의 목적은 홀라당 잊어버린 채 고민에 빠졌다. 금형권과 마찬가지로 봉천도 생각이 깊지 않았다. 그저 대사형이 시키니까 행할 뿐, 딱히 편도 없었다.

“글쎄, 천서국이 천서국이지 뭐람?”

“그럼, 당신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경국입니까? 려국의 보물입니까?”

“음…….”

이번에도 바로 답을 할 수 없었다. 나라와 나라 간의 일은 어차피 그의 소관이 아니었다. 대사형이라면 모르겠지만.

“글쎄, 나는 보물이 더 끌리긴 해.”

고민 끝에 한 대답이었으나 용가현은 이미 예상한 답이었다. 강호에서 떠도는 사호세주의 소문은 무시무시한 짐승들이었으나 적어도 그가 아는 봉천은 철없는 살인귀였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나 또한 정치질에는 관심이 없으니 함께 협력하여 보물을 찾는 건 어떻습니까? 지금 제 목숨 하나 거두는 것보다는 뭐라도 얻는 게 있어야 좋지 않습니까?”

“으응? 왜? 굳이?”

그의 모자란 식견으로는 상대의 의도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대사형 말만 잘 따르면 자연히 얻게 될 보물인데 굳이 경국 놈과 협력할 이유가 뭔가? 그러거나 말거나, 용가현은 유려한 말솜씨로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이십여 년 전, 려국은 멸망했으나 어쩐지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더란 말입니다. 우리 묵안 형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말씀하시길, 그곳이 남은 한 려국은 끝나지 않았다, 하시더군요. 하여 죽기 전에 꼭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곳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절세 무공의 비급은 물론이고 진귀한 요법서도 있다고 합니다.”

“요법서?”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봉천의 귀가 번쩍 뜨였다. 설마 그가 그토록 원하던 술법이 존재하는가?

“예를 들자면, 모든 병을 고친다든가, 혹은 성별을 바꿔준다든가…….”

“설마……?”

용가현은 미세하게 변하는 봉천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혹시나 가능할까 싶어 던진 미끼를 덥석 문 게 틀림없었다.

“물론 곡대협의 능력이라면 천서국이 보물을 차지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그러나 그분의 성정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안에 진정 우리가 원하는 무언가가 있다 한들, 만져볼 수나 있겠습니까? 만약 비루한 비봉문의 조무래기들을 살려준다면 내 목숨을 바쳐 봉대협에게 협조하겠습니다.”

“혹 약조를 어긴다면?”

마음이 다 넘어왔으면서도 봉천은 선뜻 거래를 수락하기 어려웠다. 그만큼 곡해고는 그에게 절대적인 존재였다.

“제가 약조를 어기고 파렴치한 행동을 한다면, 그 자리에서 머리통을 박살 내도 두말없이 받아들이겠습니다.”

활짝 미소 짓는 용가현의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이대로 주저앉아 무기력하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봉명이 더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도록 막고, 사문을 끝까지 지키는 것. 그것만으로도 살아야 하는 이유는 충분했다.

“좋아. 대신 혈도는 풀어주겠지만 마비산의 해약은 주지 않을 테야. 또한, 조금이라도 배신의 기미가 보인다면 당신뿐만 아니라 용문파 도사들의 목을 다 베어낸다.”

“물론입니다.”

어느덧 비가 그치고 어스름한 달빛이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비극적인 앞날을 예견하는 것처럼.

*** 아생연후살타(我生然后杀他):

자신의 말이 산 다음에 상대의 돌을 잡으러 가야 한다는 뜻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