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80화 (180/209)

180화. 蠶絲牛毛(잠사우모)

가까스로 몸을 비틀기는 했으나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천추혈에 명중한 일 장은 수곡도(창자)를 파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커헉!”

고유생은 뒤로 나자빠지며 배를 움켜잡았다. 장이 끊어지는 통증에 혼절할 지경이었으나 차마 비명조차 내지를 수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의 배신으로 인한 감정은 분노보다 허탈감에 가까웠다.

“후안무치한 놈!”

백형진을 향해 검을 들이민 이는 용봉명이었다. 연배가 비슷하여 자주 교류했기에 배신감이 더 컸다. 상대의 실력이 월등하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으나 지금은 그런 걸 따질 겨를도 없었다.

“후안무치라니? 각자의 가치관과 욕망에 따른 선택이거늘, 어느 쪽이 정의라 할 수 있단 말인가?”

“뭐라?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터는구나. 감히 황제 폐하의 뜻을 거역했으니 역심이 아니고 무엇이더냐?”

더는 말을 섞을 이유가 없었다. 봉명은 손목을 회전하여 검의 공격 반경을 넓히는 동시에 보법으로 형진의 오른쪽으로 돌아들었다. 부지불식간에 그의 옆구리를 베어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너무 늦어.”

“어엇!”

그저 오른손을 뻗었을 뿐이었다. 봉명의 내력을 가득 담은 검은 마치 검집을 만난 듯, 형진의 손으로 스르륵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핑!

봉명은 당황하여 손목부터 당기고 보았다. 다행히 검이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그러나 이 또한 형진이 마련해놓은 덫이었다. 그는 움직임을 지켜보다가 몸에서 떨어질 때쯤 엄지와 중지를 사용하여 검 끝을 튕겨냈다.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한 봉명이 검과 함께 나자빠진 건, 당연한 결과였다.

“이, 이!”

“함부로 움직이지 마. 찌를 수도 있어.”

어느새 형진의 길고 날카로운 손톱이 봉명의 목덜미를 노리고 있었다. 자비 없이 박아넣는다면 그대로 끝이었다.

“난 자네를 죽일 생각이 없어. 그러니 허튼짓하지 말게.”

형진의 말은 일종의 신호였다. 나름 눈치가 빠른 봉명은 곧장 오른손을 들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황석파 일행을 뒤로 밀어냈다. 대의고 자시고, 일단은 살고 봐야 했다.

“내가 방심하여 하릴없이 잡혔으나 네놈 또한 이 포위망을 쉬이 뚫지는 못할 것이다.”

“뭐, 네놈을 인질로 삼으면 되지 않겠나? 아, 그러기에는 네가 너무 별 볼 일 없는 놈이라 아니 되려나?”

“이, 이 후레자식이!”

“큭큭.”

형진은 한참 동안 어깨를 들썩이며 웃어댔다. 예전에 알던 그와 사뭇 달라진 모습에 놀라 온몸에 소름이 쪽 끼쳤다.

“내 조건은 하나입니다.”

시선은 여전히 사로잡은 상대를 향했으나, 일행 모두에게 들리도록 큰 소리였다. 심지어 정신이 혼미한 고유생의 귀에도 낭랑하게 꽂혔다.

“이대로 쭉 하던 일을 하십시오. 단, 적은 금황자가 아니라 서이국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슨 개수작이냐? 여기서 서이국이 왜 나와?”

고통을 참아 가며 고유생이 일갈했다. 결국, 금황자에게 이쪽의 계획을 모두 들킨 게 틀림없었다. 최대한 시치미를 떼 보려는 발악이었으나, 정작 본인도 이미 틀린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의 목적은 신교를 멸하는 것, 그리고 보물을 찾아내는 것. 이 두 가지를 먼저 이루어야 합니다. 그때까지 두 황자님의 싸움은 잠시 멈추는 게 어떻겠습니까?”

“흥!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본질을 속이려 드는구나. 지금도 이리 협박부터 하면서 무슨 협상이냐? 서이국이 개입했다손 치자. 그들을 내치고 난 다음은?”

얼마나 분노가 차올랐는지, 고유생은 갑자기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의 지저분하게 엉긴 수염이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사정없이 부들거렸다.

“끝까지 오랑캐들 따위와 손을 잡겠다? 참으로 답답한 늙은이로군.”

“뭐? 이 버르장머리 없는!”

고유생의 욕설이 마저 끝나기도 전이었다. 형진은 오른손에 잡고 있던 봉명의 목덜미를 쭉 당겨 일으켰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어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봉명은 공포심에 비명을 질렀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요. 협상이 결렬되는 즉시, 이 철없는 난봉꾼의 목숨은 끝입니다.”

“으으…….”

긴장감이 감도는 그곳에는 오직 봉명의 신음만이 울려 퍼졌다. 당장이라도 숨을 끊어 놓을 것처럼 형진의 손톱이 점점 더 깊이 파고들었다.

‘차라리 잘 되었어. 저놈을 희생하여 놈을 잡자. 어차피 혼자가 아닌가? 어디서 뭘 배웠길래 저리 날뛰는지 모르겠으나, 제 재주만 믿다가 큰코다치는 법이지.’

고유생의 마음에는 이미 결심이 섰다. 그는 득과 실을 계산하는 능력에 있어서만큼은 강호의 그 누구보다 뛰어났다. 서둘러 주변에 둘러선 심복들에게 눈짓을 보내니, 단번에 그 뜻을 알아듣는 눈치였다.

“흐음, 그렇게 나오시겠다?”

그러나 이번에도 형진의 눈치가 좀 더 빨랐다. 아니, 애초에 그는 봉명을 인질로 삼아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다만 이 멍청한 친구에게 추악한 강호의 인심에 대해 한 수 가르쳐주고 싶을 뿐이었다.

“고유생은 널 죽여서라도 나를 잡을 생각이야.”

“뭐?”

“저 늙은이 눈을 좀 보렴. 되레 잘 됐다 신난 게 보이지 않니? 내 너와 오랜 인연이 있어 일러주는 것인데, 제발 사람을 함부로 믿지 마라. 세상에 영원한 아군은 없다.”

친절은 여기까지였다. 형진은 다음 순간, 가차 없이 인질을 집어 던졌다. 웬만한 성인의 키의 곱절만큼 공중에 떠오른 봉명은 본능적으로 팔을 휘저었다. 그러나 낙하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왼쪽 팔이 완전히 분질러졌다.

“으악!”

끔찍한 비명 속에서도 고유생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이제 저 배신자는 독 안의 든 쥐와 다름없었다. 인질을 버리고 화를 자초하니, 그저 한심할 뿐이었다.

“잡아라!”

이미 수장의 의도를 눈치챈 황석파의 장로 둘이 거침없이 형진에게로 달려들었다. 좌우로 뻗쳐 들어오는 검날은 빠르고 예리하여 일류 고수도 피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물며 상대는 봉명을 막 던진 터라 자세를 가다듬을 겨를이 없었다. 사로잡히는 건 당연지사였다.

쉬익, 쉭!

“윽!”

그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호기롭게 달려든 황석파의 두 장로의 몸은 흡사 고슴도치와 같았다. 고개 주변을 둘러싼 수풀에서 쏟아져 나온 화살 수십 개가 온몸에 빼곡히 박힌 탓이었다.

“아! 제가 이 말을 깜빡했군요. 제 뜻대로 행하지 않으신다면, 그다음은 저도 장담 못 한다는 것을요. 알다시피 우리 황자님께서는 참을성이 없는 성정이시라,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 여기신답니다.”

“이, 이놈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구나.”

고유생은 그제야 자신이 상대를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겨우 혈도를 찍어 가라앉혀 놓았던 통증이 다시 시작되었다.

“용문파 장문 용가현은 어디 있습니까? 모두 이 앞에 데려다 놓고 남은 이야기를 마저 하시죠.”

선발대로 나선 서른여 명의 인원이 형진을 마주 본 채로 둥글게 몰려섰다. 언제 어디에서 화살이 날아올지 모르니 그 누구도 함부로 나설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심지어 형진의 발밑에 널브러진 봉명을 구하려는 이도 전혀 없었다.

“으으…….”

봉명은 연신 신음을 뱉어냈다. 팔이 부러진 통증 때문인지, 분노를 이기지 못했기 때문인지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가슴속에는 저놈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다는 욕망만이 가득했다. 충혈된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던 그때, 날카로운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부러진 화살촉이었다.

‘오냐, 잘난 네놈 발을 조져 주마.’

기습은 망설이는 순간 실패였다. 봉명은 오른손에 화살촉을 그러쥐는 즉시, 청운어시의 수법으로 형진의 발등을 찍어 눌렀다. 청운 검법의 초식인 어시(魚翅)는 검이 부러졌을 때를 대비하여 만든 묵안의 기술이었다. 비록 온 힘을 다하지는 못했으나 충분히 깊은 상처를 낼 만했다.

퍽!

“으악!”

그러나 이번에도 봉명의 묘수는 실패로 끝났다. 전혀 예상치 못한 누군가의 등장 때문이었다.

“이런, 천하의 용문파 도사님께서 이리 꼼수를 쓰시면 되는가?”

봉명의 손을 무참히 뭉갠 발의 주인은 다름 아닌 황석파의 장문 장은이었다. 그를 알아본 고유생의 얼굴은 곧장 흙빛이 되었다. 이 또한, 저놈의 밑그림이었던가? 화가 나기 이전에 수치스러웠다.

“사숙, 이미 황석파 장로 회의에서 결정한 일이 아니었습니까? 헌데, 어찌 저 몰래 이리 큰일을 벌이신 겁니까? 설마 저를 내치려 하신 겁니까?”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던 장은의 눈에 망연자실한 사숙이 들어왔다. 드디어 이 늙은이를 처리해야 할 때가 온 모양이었다. 그는 입만 벙긋거리는 고유생을 향해 더럭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제가 믿을 분은 오직 사숙이셨습니다. 왜 저를 이리 미워하십니까?”

‘아아, 구렁이인 줄 알았더니 정녕 이무기였구나.’

고유생의 원망 가득한 얼굴 앞에서 장은은 눈물까지 주르륵 흘리며 읍소하였다. 언제나처럼 사람들을 선동하여 여론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그의 기술이었다. 고유생은 그 역겨운 모습에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백대협, 본 파의 일은 제가 사과하겠습니다. 마음이 상했더라도 어서 풀고 할 일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에게 제일 중한 일은 열쇠를 구해 그곳을 찾는 것이지요. 또한, 더 큰 잡음이 생기지 않으려면 태자 저하의 심복들을 해결해야 합니다. 용문주의 일은 내게 맡기고 먼저 출발하시지요.”

“그럼 장문주님만 믿겠습니다.”

형진은 별다른 반박 없이 뒤로 물러섰다. 장은의 미심쩍은 태도가 짜증이 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굳이 따지고 들 마음은 없었다. 천서국과 강운선을 처리하고 난 뒤로 미뤄둘 생각이었다.

그가 오른손을 들어 주먹을 불끈 쥐자, 고개를 둘러싼 수풀이 요란한 소음을 내었다. 언뜻언뜻 보이는 검은 머리들만 세어도 수십이 되는 것 같았다.

“사숙, 일어나시지요.”

형진의 무리가 고개를 다 내려가고 나서야 장은은 고유생에게 어깨를 내어주었다. 재차 거부하는 상대를 거의 강압적이다시피 잡아 일으키니 두 얼굴이 바짝 맞닿았다.

“사숙, 잘 들으세요. 우리의 원래 기조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비록 금황자가 우위에 있으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닙니다. 이기는 편이 우리 편입니다. 이해하셨습니까?”

고유생의 눈과 귀가 번쩍 뜨였다. 무작정 사질의 배신이라고 여겼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마른 입술 사이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래, 이놈은 본래 이런 녀석이었지. 다른 새의 둥지에 새끼를 낳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파렴치한 뻐꾸기. 그토록 혐오했던 장은이건만, 오늘만큼은 제법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 잠사우모(蠶絲牛毛):

일의 가닥이 많고 어수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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