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勸上搖木(권상요목)
갈매와 합쳐진 외길이 다시 도농과 만날 때까지는 꼬박 사흘을 더 걸어야 했다. 그나마 길이 좁고 험해져 말도 탈 수 없었다. 하여 고유생은 굳이 무리하는 대신 반나절을 더 쉬고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더웠다가 추웠다가 오락가락하니, 이러다가는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지쳐 나가떨어지겠다.”
고유생은 내내 불평불만을 멈추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태자의 명을 수행하느라 제대로 쉴 틈이 없던 한 해였다. 더구나 여우 같은 장은의 눈을 속이는 일도 여간 힘들지 않았다.
‘아무리 금황자가 영민하다 해도 황제가 살아 있는 한 황위는 무조건 태자의 것이다. 장은, 그 어리숙한 놈이 헛짓거리나 하는 동안 제대로 충심을 보인다면 황석파의 장문 자리는 마땅히 원래 주인에게 돌아갈 터.’
몹시 피곤한 와중에도 연신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얼추 반항적인 문파들을 정리하고 나니, 원정에 참여한 여덟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황석파의 뜻에 따르기로 한 참이었다. 역심을 품었다 의심되는 소 문파들은 선운검파, 두타공파에서 각각 처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즉, 애초에 원정대의 구성은 오대산검과의 대진표와 다름없었다.
“그래도 큰 잡음 없이 일이 마무리되어 다행입니다.”
비봉문의 함덕유가 슬슬 비위를 맞추었다. 그는 내들 고유생 측근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눈살 한번 찌푸리는 법이 없었다.
“다 자네 덕분이지. 장문주가 날랜 제자들을 붙여주지 않는 바람에 전력이 좀 빈약했는데, 자네가 이리 앞장서 주어 한결 편하게 일이 마무리되었네.”
좀처럼 칭찬에 인색한 고유생이었으나, 함덕유에게만은 후했다. 장은이 이처럼 살갑고 예의가 발랐다면 좋았을 걸, 아쉽기도 했다.
“헌데 나중에 장문주가 알면 어찌 되는 걸까요?”
“흐음, 알 게 뭐람? 이미 엎어진 물을 어떻게 담겠나? 애초에 금황자 쪽은 이득이 없거늘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알고 사는 놈일세. 어른 말을 어디 들어야 말이지? 이번 일로 그놈도 깨닫는 바가 있겠지.”
워낙에 수다스러운 편이기도 했지만 장은의 뒤통수를 쳤다는 만족감에 평소보다 더 시끄러운 고유생이었다. 반면,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용가현의 마음은 씁쓸하기만 했다.
“백부님, 이제 결정하셔야 합니다. 태자 저하는 역심을 보이는 장문은 모두 중벌에 처하라고 이르셨습니다. 고장로님과 제가 엎드려 빌어 겨우 기회를 얻은 것이니 어서 마음을 추스르시지요. 이 또한 용문파를 재건할 절호의 기회가 아닙니까?”
“봉명아, 언제부터냐? 언제부터 이 일에 가담하였냔 말이다.”
간곡히 사정하는 조카의 말을 무시한 채, 용가현은 질문을 이어갔다. 가족에 대한 신뢰가 와르르 무너진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하찮은 목숨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저는 지난봄부터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신계문의 멸문에 너도 가담한 게냐?”
“네. 하지만 백부님, 그게 뭐 그리 중합니까? 대의를 위해서는 반드시 자잘한 희생이 따르는 법입니다. 묵안 그 육시랄 려국 놈이 용문파의 위명을 떨어뜨린 이후, 우리가 어떤 치욕을 겪었습니까?”
“네 이놈! 그리 함부로 입에 담을 위인이 아니시다. 감히 묵안 사형을 욕보이지 말아라!”
용가현은 눈을 부라리며 대드는 봉명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조상원이 용문파의 역적인 것은 맞으나 그 이전에 존경하는 사형이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후배에게 욕을 먹을 존재가 아니었다.
“아아, 백부님 어찌 이리 어리숙하십니까? 이러니 신교 놈들에게 매번 당하는 게 아닙니까?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우리 아버지가 누구 손에 죽었는데요. 바로 신교 이서문이 아닙니까? 허나, 그 원수를 갚지도 못했지요.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보다 황실의 힘이 필요합니다. 역적의 누명을 벗고 충신의 면모를 보일 기회를 왜 잡지 않으십니까?”
“봉명아.”
가현은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쓰린 속에서 위액이 역류하여 바싹 마른 입안에서는 시큼한 냄새가 났다. 그런데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우리는 강호의 무인이란다. 절대로 정치에 끼어들어서는 아니 된다. 정치란 무릇 의가 아닌 일에도 앞장서야 하며, 협을 외면하기도 한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측은지심도, 윤리와 도리도, 하등 가치 없는 관념이 되어버리지. 네가 대의랍시고 무고한 형제들을 살육한 일처럼 말이다.”
용가현의 붉어진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부디 가파른 절벽 길을 오르지 않기를 바라는 아비와 같은 마음이었다.
“의와 협? 아직도 그런 고리타분한 말씀을 하신단 말입니까? 정말 답답합니다.”
그러나 봉명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하물며 문파를 위하는 마음도 대의라 하였다. 지금 그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가? 무려 나라를 위한 대의가 아닌가? 경국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일이거늘 의협을 운운하는 백부가 그저 한심할 뿐이었다.
“나도 그러했다. 려국을 짓밟는 일이 나라를 위함이거늘 한 치의 부끄럼도 없었다. 허나, 봉명아. 나는 보았다. 내가 정의롭다고 휘두른 칼에 베인 이들은 그저 나와 같은 사람이었다. 아니, 나보다 훨씬 연약하고 힘이 없어 스스로 삶을 선택할 자격조차 없는 이들. 바로 이곳, 갈매에 내가 저지른 수많은 죄업이 묻혀있단 말이다.”
가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흙과 눈물이 뒤섞여 몰골이 처참했지만 상관없었다. 모든 업보는 돌고 돌아 자신에게 닿는다. 그 때문에 사랑하는 아우들의 죽음은 슬픔 그 이상의 후회요, 좌절이었다.
“제발 같은 실수를 하지 말아라. 남은 삶은 이미 저지른 죄업을 뉘우치며 살자꾸나. 지금이라도 제발.”
“싫습니다. 일말의 죄책감도 없습니다.”
간절한 백부의 청을 거절한 채, 봉명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용문파의 장문은 허수아비와 다를 바 없었다. 어차피 백부는 아버지와 숙부가 돌아가신 뒤로 제정신도 아닌 상태였으니 내부의 반발도 없을 터였다. 그는 새로운 장문이 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시 오대산검 최고의 문파로 도약하리라.
“그래, 용장문은 설득이 되었는가?”
“아직은.”
고유생의 물음에 봉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백부를 처형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워낙에 융통성 없는 건 알고 있었으나 이리 똥고집일 줄이야. 쯧쯧. 그럼 일단 마비산을 먹여 허튼짓 못 하도록 잡아두도록 하지. 차후에 태자 저하와 상의하여 결정해야겠네. 그동안은 자네가 동요 없도록 도사들을 잘 이끌어주게.”
“네.”
봉명은 신이 나서 얼굴이 상기되었다. 이제 혁혁한 공을 세운다면 그의 방대한 계획에 큰 기둥을 박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밤을 충분히 쉰 일행은 드디어 다시 떠날 채비를 시작하였다. 고유생은 봉명과 함덕유를 비롯한 수장 네댓을 모아 상기 일정과 임무를 전달했다.
“다음 고개를 넘으면 두타공파와 합류하게 될 것이네. 선운검파는 그다음 거점인 금천 초입에서 만나기로 하였고. 용형제와 함소협은 앞장서서 도농으로 흘러나오는 길을 미리 살피게. 나교위께서는 맨 뒤에서 뒤따르는 세가 없는지 살피는 한편 용문주를 지켜주시오. 금천에서 태자 저하가 합류하실 테니 그때까지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네.”
“헌데, 고대산파는 어떡합니까? 세는 미약하나 장문의 고집이 워낙 세서 말이지요.”
망설이던 함덕유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이미 선운검파와 만났을 텐데 그쪽에서 감감무소식이니 걱정이 될 만도 했다. 그러나 고유생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뭘 그런 하찮은 생각에 빠져있냐는, 일종의 핀잔이었다.
“선운검파가 약해 보이나 무려 소소정이 나선 일이야. 선유당은 말할 것도 없고 고대산파 역시 문제가 없네. 제아무리 고인경이 깝쳐도 소문주 앞에서는 하룻강아지란 말이야. 더구나 불도를 공부하는 선자들이 선유당의 급습을 받았다 증언하면 고문주, 그 철부지는 간이 작아서 금세 대세에 따를 걸세. 이 아수라장에서 누가 정의인지 판단할 수 있겠는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별 탈 없이 금천으로 향하는 중일 거야.”
덕유는 여전히 미심쩍었으나 내색하지 않고 머리만 긁적였다. 함께 할수록 이 안하무인에 고집불통 늙은이가 못마땅하기만 했다. 그래도 어쩌랴? 권력도, 명예도 없는 일개 무너져가는 문파의 후계라면 응당 이 정도 굴욕은 견뎌야 하는 것을.
“서이국은 경계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이미 황제 폐하와 이야기가 다 끝났으니 걱정하지 말게. 고작 서쪽 오랑캐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당장 곡해고 늙은이가 쳐들어와도 우리 오대산검 연합을 파하진 못하지.”
“저, 그렇다면 형제들을 묻어주고 감이 어떨는지요.”
고유생은 덕유가 자꾸 초 치는 질문만 던지자 슬슬 짜증이 났다. 능력이 없으면 눈치라도 있어야 할진대 이리 아둔하니 수하로 두기에 부족함이 많아 보였다.
“그리 걱정이 된다면 자네는 교위와 함께 용문주를 지키는 한편, 무리의 뒤를 따르면서 뒷정리를 하게. 또한, 혹시 모를 고대산파와 금황자의 동태를 살피는 것도 좋겠지. 우리는 수일 내에 금천에서 다시 만나세.”
“네? 아니, 그런 뜻이 아니오라.”
덕유가 당황하여 반박하였으나 이미 고유생은 등을 돌린 후였다. 의기양양한 봉명과 고개를 넘어가 버리니 그와 황실의 호위대만이 덩그러니 남고 말았다.
“장로님, 굳이 비봉문을 거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리 식견이 좁고 아둔해서야 큰일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흐음, 저치의 아비가 려국 토벌에 공을 세운 자가 아닌가? 황제 폐하께서는 공과를 잊지 않으시는 분일세. 무명 소졸일지라도 이름을 기억하시어 상응하는 보답을 하시니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성은이 망극하군요.”
봉명은 벌써 백부의 간절한 부탁을 잊은 지 오래였다. 고유생의 말처럼 이번 일에 성과를 얻는다면 남부럽지 않을 성은을 입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 여기가 두타공파와 만나기로 한 거점이군.”
한눈에 바라보아도 사방이 뻥 뚫린 고개에 올라서자 시원한 가을바람이 살랑거렸다. 그리고 앞은 꽤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는데 금천으로 가는 골짜기로 이어져 있었다.
‘와, 적이라도 만난다면 완전히 독 안에 갇힌 꼴이겠구나.’
봉명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전혀 긴장할 만한 상황이 아닌데도 어쩐지 불길한 예감을 떨치기 어려웠다. 그때,
“두타공파의 제자 백형진이 고장로님을 뵙습니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이는 그 유명한 백형진이 분명했다. 여인만큼 고운 이목구비의 미남자는 그간의 수련 성과를 말해주듯이 전보다 훨씬 골격이 커진 모습이었다. 언제나처럼 예의 바른 태도로 모두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니 일시에 긴장된 분위기가 풀어졌다. 다만, 일행이 없고 혼자 나타난 점이 의아할 뿐이었다.
“그래, 오는 길에 별고 없었고?”
“다행히 동행한 비학과 천령의 제자들은 우리와 뜻을 같이하기로 했습니다. 덕분에 평화롭게 여기까지 왔지요. 물론 겁도 없이 비급을 노리고 끼어든 방랑객들도 적지 않았으나 다 해결하였습니다.”
“허나 첩보에 따르면 두 문파 모두 금황자의 사람이라 들었단 말일세.”
고유생은 형진의 뜻밖의 말에 버럭 화부터 냈다. 백형진을 믿고 가장 까다로운 두 문파를 배정했건만, 동맹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러나 형진의 온화한 표정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바짝 다가와 유생에게만 들리도록 웅얼거렸다.
“네, 그들은 철저히 금황자의 사람이더군요. 하여 아주 즐거운 동행이었습니다.”
“뭐라?”
지금, 이 천둥벌거숭이가 뭐라고 지껄이는 것인가? 고유생의 송충이 같은 눈썹이 마치 살아 있는 그것처럼 꿈틀거렸다.
“아직 모르시겠습니까? 저 역시 금황자의 사람이란 말씀입니다.”
퍽!
말을 마치자마자, 형진의 손바닥이 앞으로 쭉 뻗어 나왔다. 어마어마한 기세의 장력이 그대로 고유생의 천추혈을 강타했다.
*** 권상요목(勸上搖木):
남을 부추겨 놓고 낭패를 보도록 방해함을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