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面張牛皮(면장우피)
어렴풋이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날이 밝은 뒤였다. 쏟아지는 가을볕에 뭉근하게 몸을 데우자 마치 벌에 쏘인 것처럼 목덜미가 따끔거렸다.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보니 눈앞에 익숙한 얼굴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한잠 잘 주무셨습니까? 용문주.”
“너, 너…….”
“너라니, 그래도 내가 족히 열댓 살은 더 먹었는데 말이 지나치지 않은가?”
그 말마따나 고유생이 이마를 잔뜩 찡그리니 평소보다 한층 늙어 보였다. 그에게도 이번 여정은 꽤 고되고 힘들었던 탓이었다.
“오대산검의 이름을 더럽힌 자에게 무슨 존대를 한단 말인가? 비록 용문파가 기울어져 이 수치를 당한다만, 오직 장문이 모자라서이지 본 파의 기상을 꺾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나 원 참, 내 언제 용문파를 배신했다 했나? 그저 오해가 생길까 봐 잠시 재워두었을 뿐, 제자 중 누구 하나 다치게 하지 않았거늘. 믿지 못 해겠거든 직접 확인해보든지.”
그제야 용가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널브러져 있는 열네댓 명은 모두 본파의 도사들이었다. 훑어보기로는 누구 하나 다친 이는 없었다. 하지만,
“금오문은 어찌 되었나?”
고유생을 바라보던 시선이 그 뒤를 향했다. 자못 거만한 표정의 함덕유가 순간 그의 눈길을 피했다. 적어도 그 정도의 양심은 남은 모양이었다.
“그치는 쓸데없이 강직하고 고집이 세더군.”
추목현을 이르는 말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미 결과는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성정이라면 어떤 제안을 했든 받아들이지 않았으리라. 용가현은 불길한 예감에 입안이 바싹 말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를 지켜낼 방도가 없었다. 친아우도 지키지 못했던 주제에 누군들 구할 수 있을까? 가슴 한편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무력감, 죄책감 그리고 수치심이 겹겹이 쌓여 숨조차 쉬어지지 않았다.
“원래 계획대로 되어가는 중이야. 그동안 우후죽순 너무 많은 문파가 생겼어. 몇몇은 오대산검을 위협할 정도로 거대해졌지.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하여, 기조가 거만하고 충성심이 덜한 문파를 정리하려는 것이네. 하아, 그래도 추목현 그자는 나름 마음에 들었는데 안타깝게 되었어.”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법이다. 누가 누구를 평가하고 판단한단 말이냐?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이리 무도한가?”
“흐음.”
고유생은 대화를 이어가다 말고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곧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한 무리의 검객들이 나타났다. 그들 사이로 축 늘어진 추목현의 모습이 보였다.
“아아, 세상에.”
용가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에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정신을 잃은 추목현은 살아 있다고 보기 어려울 만큼 참혹한 지경이었다. 모진 고문을 당했는지 얼굴이 뭉개지고 손발이 너덜너덜했다.
“하늘이 두렵지 않은가?”
“그럴 리가! 이 모든 게 하늘의 명이거늘.”
“뭐? 하늘?”
고유생은 팔짱을 낀 채로 천천히 일어났다. 입술을 실룩거리는 양이, 세상 신나는 일이라도 생긴 사람 같았다. 원래도 좋지 않은 인상이 한층 비열해졌다.
“하늘의 명을 받아 행한 일이니 두렵지도, 부끄럽지도 않단 말이야. 우리의 하늘이 누구인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존재 말고, 나와 우리 문파를 지켜줄 하늘! 세상 사람들은 자네를 현명하고 의롭다고 칭송하지. 나 또한 어느 정도는 인정하는 바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게. 의리도 좋고 도리도 좋지만, 그 이전에 내 편을 지켜야 할 게 아닌가? 장문으로서 이 꼴이 되어 제자들을 지키지 못하는 자네야말로 부끄럽지 않은가? 무능한 병신, 그게 바로 자네가 추구하는 협객의 민낯이란 말일세.”
“…….”
이후에도 고유생의 연설은 계속되었다.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취지였으나 그저 궤변이고 변명이었다. 그 어떤 이유로도 수많은 형제를 죽인 죄를 용서받지는 못했다.
“그럼 이 모든 일의 배후가 하늘이란 말이냐?”
드디어 용가현이 고개를 들었다. 도대체 누구의 뒷배를 믿고 저리 안하무인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암, 그렇고말고. 감히 하늘을 거스른 죄로 마땅히 벌을 받는 것이지.”
슥!
말릴 새도 없었다. 고유생이 휘두른 날카로운 검은 그대로 추목현의 목덜미에 내리꽂혔다. 끝까지 같은 편에 서겠다던 든든한 동료의 머리가 바닥에 데굴데굴 굴러내리는 순간, 용가현은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이 짐승만도 못한 놈아!”
울먹이는 그의 외침에는 온갖 회한이 가득했다. 기실, 그 말을 뱉는 자신도 다를 바 없었다. 추목현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병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무기력한 존재일 뿐. 심지어 지금 마음에는 더 추악한 욕망도 자리 잡았다.
‘내 문파가, 내가 아니라 다행이다.’
짐승만도 못한 놈은 고유생만이 아니었다. 문파를 핑계로 목숨 구걸을 고민하는 자신이야말로 짐승이었다.
“자학하지 말게나. 그래도 자네는 용문파의 장문이니 살길이 열린 것이지. 강자를 따르는 것, 생존을 추구하는 게 어찌 부끄러운 일인가? 자고로 인간의 본성이 그러한 게지. 오히려 인정하는 쪽이 인간적인 법이야. 아닌 척, 정의로운 척, 끝까지 허세를 떠는 치들이야말로 위선자가 아닌가?”
그랬다. 용가현은 이 치욕 속에서도 죽고 싶지 않았다. 허망하게 죽은 아우들을 위해서라도 살아야 했다. 그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누가 죽였는지, 진정 신교 놈들의 소행이라면 복수해야 했다.
“당신 말이 맞는다 치자. 그 개똥철학에 편승한다 치자. 그럼 알려다오. 너희들의 하늘이 무엇이길래 이리 기고만장한 것이냐? 그 하늘을 나도 좀 올려다보자꾸나.”
“흐음, 이제 좀 말이 통하는군.”
이쯤 되니 수다스러운 고유생도 슬슬 지치던 참이었다. 다행히 용가현의 기세가 수그러드니 본론을 말해야겠다 싶었다. 헛기침을 두어 번 한 그는 이내 품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소중했는지 속옷 깊숙하게 감쳐두어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윽고 꺼냈을 때는 입가에 거만한 미소가 지어졌다. 다시 보아도 여전히 자랑스럽고 감동적이었다.
“설마, 그것은?”
“그래, 식견이 넓은 자네라면 알겠지. 대 경국 황제의 영패다.”
황금빛 영패는 이른 새벽빛을 받아 반짝반짝 윤이 났다. 고유생이 기고만장할 수 있었던 이유. 비로소 장은을 재치고 황석파의 수장으로서 권위를 되찾을 자격. 고작 이 작은 영패 하나면 만사형통이었다.
“이 모든 일이 황제 폐하의 명이니라. 태자 저하를 보좌하여 나날이 황권을 위협하는 금황자의 세를 제거하는 것. 하여, 우리는 벌써 오랫동안 척살대를 꾸려왔다. 역심을 품은 문파를 찾아내어 다스리는 데 이번 원정만큼 적당한 때가 또 오겠는가?”
“척살대?”
문득 어떤 위화감이 용가현의 가슴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모양이 맞지 않았던 칠교 조각이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설마 지난 한 해 동안 벌어진 적우의 살인 행각 또한 당신들 짓인가?”
“흐음.”
고유생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만으로도 충분한 답이 되었다. 용가현은 기가 막힌 현실에 헛웃음이 났다. 아무리 그간 두문불출하였다고 해도 웬만큼 돌아가는 사정은 모르지 않았다. 적우의 소행이다, 강운선을 교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신교의 분열이다. 등등의 낭설이 돌았으나 어쩐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다. 이제야 의문이 다 풀린 셈이었다.
“역시 용문파의 장문답군. 항간에는 정신이 완전히 나갔다는 말도 많았다만 영민하고 분별력이 뛰어나기로는 무왕을 따라갈 자가 없지.”
어디까지 밝혀야 할지 고민에 잠겼던 고유생은 드디어 결심이 섰다. 지금은 다소 세가 약해졌다고는 하나, 그래도 용문파였다. 그들의 명망을 무시했다가 정작 중요할 때 낭패를 볼지도 모를 일이었다. 용가현을 완전히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솔직하게 다 말해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래, 자네 생각이 맞아. 그리고 생각 외로 금황자의 세가 심상치 않았네. 황제 폐하가 염려되실 만도 하더군. 하여 적우의 이름을 빌려 가장 문제가 될 만한 문파는 쓸어버릴 수밖에 없었네. 뭐, 강운선 덕분에 명분을 얻은 셈이지.”
스물여덟 개의 소주에는 수많은 문파가 존재했다. 그중에는 용호문이나 신계문처럼 오대산검의 규모와 명성을 위협하는 곳도 많았다. 황제의 눈 밖에 난 이금에게는 이들만큼 든든한 지원군이 없었다. 하여, 그들을 통해 암암리에 거대한 병력 체계를 구축한 것이었다.
“황위 다툼은 어디까지나 정치일 뿐, 강호의 법을 지키는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무인으로서 부귀공명을 탐하다니 부끄럽지 않은가?”
듣다 못 한 용가현이 일갈하자, 고유생의 주름진 얼굴이 한층 쭈글쭈글해졌다. 강호의 법도? 의협? 허울 좋은 헛소리에 대꾸해주기도 귀찮았다.
“애초에 오대산검은 황제 폐하의 충신들이었지.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 려국을 훔칠 때 이미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것과 다름없네. 이제 와 의협 타령을 한다면 후안무치한 태도가 아닌가?”
“그래, 려국. 우리가 어그러진 건, 오대산검이 망가진 건 그때부터였지. 난 지금도 끔찍했던 그 날의 악몽을 꾼다. 타국을 함부로 짓밟고 양민을 학살한 죄를 다 지우지도 못했건만, 어째서 다시 더러운 정치판에 뛰어들고자 하는가?”
용가현이 말을 다 끝맺기도 전이었다. 고유생의 매서운 손이 울부짖는 그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 불쾌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내력을 담은 터라 용가현의 입안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
“이거 원, 헛똑똑이가 따로 없구나. 정의니 협의니 그걸로 엿이나 바꿔 먹을 수 있다니? 하다 못 해 자네의 그 개똥철학을 누가 따라주겠는가? 저기 독이 든 줄도 모르고 국이나 퍼먹던 도사들? 동맹이랍시고 믿어달라더니만 바닥에 굴러다니는 추목현이? 흥! 꼴값 떨지 마라. 꼭 자네 같은 미련퉁이를 내가 아주 잘 알지. 의협이나 운운하던 내 사형 팔마 마세풍 말이야. 그 멍청한 돼지는 결국 한 줌 가루가 되어 황석산 구석에 처박혀 있지 않은가? 재밌는 게 또 뭔 줄 아나?”
고유생은 심술궂은 표정으로 다시 오른손을 들었다. 까딱거리는 손짓에 맞춰 낯익은 누군가가 복면인들 사이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아까 말한 척살대에 누가 있는 줄 아는가? 선운검파, 두타공파, 그리고 용문파의 제자도 포함되어 있지. 그리고 누구보다 혁혁한 공을 세운 이가 바로 이 청년이란 말이야.”
“너, 너……? 네가 어째서?”
용가현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 버젓이 서서 내려다보는 이는, 그의 조카이자 아우 용송현의 외아들 용봉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