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共命之鳥(공명지조)
구의를 지나오는 길은 멀고 험했다. 다른 네 곳에 비해 낙후된 지역이기도 했거니와 경국 세족과 려국인들과의 마찰이 심해, 크고 작은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하여, 용문파 일행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고을을 떠나야만 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다른 문파와 달리, 비봉과 금오는 오대산검에 호의적이니까요. 멸악과 포태문만 해도 호시탐탐 빈자리를 노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용가현의 뒤에 바짝 따라붙은 봉명은 그의 제자이자 죽은 송현의 장남이었다. 용문파의 부흥을 누구보다 바라는 그는 이번 원정에 사활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히려 백부인 장문의 의지가 예전만 못한 것 같아 노심초사 중이었다.
“봉명아, 다 무슨 소용이냐? 내 곁에는 든든한 형제들도 없고 존경하는 기숙부님들도 돌아가셨다. 저들이 아니더라도 이제 용문파를 업신여기는 문파가 수두룩한데 뭐가 다행이란 말이냐?”
“하지만 문주님, 우리 용문파가 어떤 문파입니까? 불과 십여 년 전에는 두타공파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는 오대산검의 기둥이 아니었습니까? 다시 영광을 찾아오면 됩니다. 또한, 오대산검의 다른 형제들도 우리를 도울 테니, 감히 다른 변두리 문파 따위에게 기죽지 마십시오.”
용가현은 안광을 빛내는 조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 희망이 있다면 바로 이런 의지일지도 모른다. 다시금 용기가 솟아오르는 듯도 싶었다.
“용문주님, 일행이 지치기는 하였으나 도적 떼 하나 만나지 않고 샛길을 빠져나왔습니다. 저 고개 하나만 넘으면 금호와 마주치는 골짜기입니다.”
비봉문 문주의 장남인 함덕유는 예의 바른 태도로 상황을 보고했다. 이제 약관의 나이를 갓 넘긴 그는 무공 실력은 평이했으나 인품이 훌륭하다 소문이 났다. 나이가 지긋한 장문을 대신하여 왔으니 애초에 용문파와 척을 질 이유가 없었다.
또한, 그 옆에서 묵묵히 명을 따르는 이는 금오문의 문주 추목현이었다. 이제 겨우 삼대째 제자를 배출한 작은 문파이지만 특유의 묵직한 검법으로 소문이 났다. 젊은 장문의 패기와 의리는 보수적인 오대산검의 장로들 사이에서도 칭찬이 자자했다.
“문주님, 저희는 끝까지 용문파를 도와 신교의 간악한 음모를 밝혀낼 것입니다. 뿐입니까? 서이국이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꼴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오대산검 및 명문정파의 위신을 세우는 일이야말로 애국이 아니겠습니까?”
두 사람의 응원은 용가현에게 큰 용기가 되었다. 두 아우는 없지만, 핏줄을 나눈 형제보다 더한 의리와 협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새삼 감동적이었다. 세 문파가 합하여 고작 서른 남짓이었으나 기세만큼은 어느 동맹보다도 뒤지지 않았다. 넉넉하지 않은 음식이지만 나눠 먹으며 전의를 다지는 동안,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았다.
“두 시진만 잠깐 눈을 붙였다가 움직입시다. 다소 춥더라도 되도록 불은 적게 피웁시다. 문파에서 한 명씩 차출하여 세 명이 돌아가며 불침번을 서겠습니다.”
용가현의 명을 받은 봉명이 야무지게 대열을 정비하니 그 누구도 불평하는 이가 없었다. 그야말로 평화롭고 느긋한 휴식이었다.
따뜻한 국을 떠먹으며 쉬고 있을 때였다. 마주 보는 고개 너머에서 언뜻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비틀비틀 이쪽으로 걸어오는 양이 어딘가 불편한 모습이었다. 그가 넘어오는 고개는 곧 황석파의 무리와 만나기로 한 곳이었다. 고작 한 명이었으나 모두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위험한 산길을 혼자서 넘어올 일이 뭐가 있겠는가? 머릿속에서 온갖 불길한 상상들이 펼쳐질 수밖에 없었다.
“누구냐?”
“용문주님, 접니다.”
“아니? 당신은?”
앞으로 나선 용가현은 뜻밖의 인물이 등장하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팔공문의 장문 마윤의. 그 누구도 대동하지 않고 움직일 지위의 인물이 절대 아니었다.
“마장문이 아니십니까? 어째서 이 밤길에 홀로…….”
“용문주님, 이렇게 문주님을 뵙게 되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의 기가 막힌 행색이 눈에 들어왔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는 산발하여 망나니 같았으며, 비단옷은 이리저리 찢겨 넝마와 다를 바 없었다. 바닥을 굴렀는지 온몸에 흙먼지가 잔뜩 묻어,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영락없는 거지꼴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게 어쩐 일입니까? 팔공문의 제자들은 어찌하시고.”
“흑, 흐윽.”
마윤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분노와 절망감에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어찌어찌 용문파에게 도움을 구하러 왔으나 정작 만나고 보니 수치스럽기도 했다. 아무리 방법이 없었다고 해도, 제자들을 버리고 혼자 살아남았기 때문이었다.
“용문주님, 우리는 완전히 속았습니다. 이곳에 온 것도, 문파들을 끌어들인 것도 다 계획적이었어요.”
“무슨 말씀입니까? 제대로 설명해 주셔야 우리도 대책을 세울 게 아닙니까? 누가 계획을 했단 말입니까?”
결국,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추목현이 끼어들었다. 이대로 마윤의가 진정되기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벌써 무리에서 정체 모를 두려움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차라리 적나라하게 밝히는 것이 더 나았다.
“저, 저만 남았습니다. 제자들을 버려두고, 각화문의 형제들을 모른 체하고, 저만 살아나왔습니다.”
“설마…….”
용가현은 거친 숨을 내뱉었다. 또 함정에 빠졌단 말인가? 아우들을 잃었던 그때의 감정이 다시 분노가 되어 울컥 터져 나왔다.
“갈매를 통한 경로는 황석파와 팔공문, 그리고 각화문이 함께였지요. 혹여 태을신교나 천서국의 자객들이 나타났다 하더라도 쉬이 당하지 않을 문파들이 아닙니까?”
반면 추목현은 침착하게 하나씩 짚어 보았다. 다른 문파도 아니고 저 세 곳이라면 다섯 무리 중 가장 막강하였다. 외부의 적이라면 절대로 업신여길 상대들이 아니었다. 차라리 선운검파의 온수나, 고대산파의 금호 쪽이 훨씬 만만했다.
“그들은 우리를 독 안에 든 쥐처럼 골짜기에 가뒀습니다. 화살을 쏘고 바위를 굴렸지요. 제대로 맞붙어 싸워볼 새도 없이 전멸이었습니다. 흐윽, 각화문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저 또한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겁니다.”
“아니, 어찌 그런…….”
아연실색하여 말을 잇지 못하는 이들 앞에서 마윤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비록 규모가 크지는 않았으나 백여 년을 지켜온 사문이었다. 내로라하는 고수들을 급파하여 여기까지 왔건만 하루아침에 모두를 잃었으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태을신교입니까? 강운선 그놈이 우리를 죽이려고 파둔 함정이 맞습니까?”
울분에 찬 추목현이 부들부들 주먹을 떨었다. 당장이라도 고개를 뛰어넘어가 마두의 모가지를 꺾어 버릴 기세였다. 잘나 봤자 고작 약관이 넘은 검객일 뿐이었다. 죽기 살기로 싸우면 뭐든 못할까 싶으니,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아닙니다. 강운선이 아닙니다.”
“아니, 그럼 기어코 서이국 놈들이 경국 땅으로 기어들어 온 겁니까?”
“아닙니다.”
“네?”
연거푸 고개를 젓기만 하던 마윤의는 드디어 용기를 내기로 했다. 주춤주춤 앞으로 나아가더니 용가현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용문주님, 각화문과 팔공문의 제자 스물을 살해한 이들은 바로 황석파입니다.”
“뭐라?”
용가현은 너무 놀라 중심을 잃고 말았다. 버티고 있던 왼쪽 다리가 힘없이 꺾이니, 옆에 선 조카 봉명이 서둘러 부축하였다. 다른 이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황당한 발언을 과연 믿어야 할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네, 믿기 힘드시겠지요. 저 또한 고유생 그 늙은이가 주절거릴 때까지도 믿지 않았습니다. 각화문의 문주가 무참하게 베어지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애초에 이 원정 자체가 황석파의 함정이구나.”
“허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에 빠졌던 추목현이 차분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먼저 황석파의 인원이 두 문파와 비교하여 너무 적습니다. 하물며 풍림도 없는 데다, 구성원의 실력조차 평이한데 어찌 그리 쉽게 당하셨습니까? 또한, 골짜기에 몰아넣고 활을 쏘았다 했습니다. 병장기를 숨기기 쉽지 않았을 텐데, 그럼 미리 매복이라도 했단 말입니까?”
“하아, 맞습니다. 과연 추문주님의 식견이 대단하십니다.”
용가현은 그의 의견에 동의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사실 그 충격적인 배신의 현장에서 혼자만 살아남은 것도 퍽 이상했다. 각화문의 문주가 희생했다고는 하나, 아무리 그래도 마윤의의 몸이 너무 깨끗했다. 여기까지 달려오면서 긁히고 찢긴 흔적은 있었지만 정작 찔리고 베인 상처는 없었다.
“매복인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골짜기로 들어서자마자 돌변한 고유생이 신호하자 수백 개의 화살이 날아왔단 말입니다. 갑자기 어마어마한 수의 자객들까지 튀어나온 마당에 이유까지 파악할 겨를이 있었겠습니까? 아니 용문주님, 설마 저를 믿지 못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정황을 파악하기 위한 질문일 뿐. 모쪼록 마음 푸십시오.”
용가현은 봉명으로 하여금 불 옆에 자리를 마련하도록 지시했다. 방금까지 푹 끓여놓았던 국을 마시게 하니, 마윤의도 점차 안정되는 듯했다.
“용문주님, 왼쪽 고개를 넘으면 선운검파와 고대산파를 만나기로 한 거점입니다. 마문주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대로 나아가는 건 위험합니다. 일단 두 문파와 합류한 후에 이동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추목현의 의견은 신중하고 합리적이었다. 반면 분기충천한 함덕유의 의견은 달랐다.
“마문주의 행색이 어쩐지 수상합니다. 이 자가 오히려 함정일지 모르니, 본 파가 나서 정찰하고 오겠습니다.”
비봉문이 먼저 나서주니, 용가현은 그저 고맙기만 했다. 허나, 마윤의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아무 대책 없이 고개를 넘을 상황은 아니었다. 추목현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아무래도 더 나은 선택이었다.
“두 분의 용기에 감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중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마문주가 진실을 말했다면 흉수는 황석파와 고유생 장로입니다. 오대산검의 의를 깨고 독단적으로 일을 벌였다는 말이지요. 일단 거점으로 가 오대산검과 합류하도록 합시다.”
“그럼 저희 금오문이 맨 뒤에 서서 호위하겠습니다. 비봉문을 필두로 하여 왼쪽 고개를 넘으시지요.”
추목현이 비장하게 고하자 용가현은 감동하여 그의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이리 전심으로 돕는 형제들이 있으니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으리라.
“어라?”
순간 눈앞이 핑 돌며 머리가 어지러웠다. 제대로 쉬지 못하여 탈이 났나 싶었을 때, 손을 잡은 상대의 상태 역시 심각해졌다. 추목현은 다리가 후들거리는지 검 자루에 지탱하여 겨우 섰는데 나중에는 아예 한쪽 무릎이 꺾여 버렸다.
“보, 봉명아.”
조카를 찾아 뒤를 돌아보니 더 가관이었다. 수십의 무인들이 대부분 혼절하거나 그 직전이었다. 방금까지 뒤에 섰던 봉명은 보이지도 않았다. 눈앞에 선 추목현만이 악착같이 정신을 부여잡고 있었는데 연신 구역질을 하는 모습을 보니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았다.
‘독인가?’
용가현은 단도를 꺼내 허벅지에 작은 상처를 내었다. 통증으로라도 정신을 차려보기 위함이었다. 그의 시선은 이미 한 사람을 향해 있었다. 이 아수라장 속에서도 유일하게 멀쩡한 사람. 그제야 모두가 나눠 먹은 국을 배가 부르다며 거부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네 도대체 정체가 뭔가?”
“아시지 않습니까? 비봉문의 제자 함덕유입니다.”
“약을 탔는가?”
“보시다시피 그런 셈이지요. 하마터면 일이 어그러질 뻔하였으나 약효가 제때 나타나 다행입니다.”
“무슨 약이냐?”
“뭐, 죽거나 병신을 만드는 그런 건 아닙니다. 보시다시피 모두 같이 마시지 않았습니까? 한숨 푹 주무시면 얼추 회복될 양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함덕유는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반쯤 비운 국그릇을 들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마윤의에게 다가갔다. 충격과 공포로 지각 능력을 상실한 그는 도망치지도 못하고 그저 눈만 끔뻑거릴 뿐이었다.
“제자들을 버리고 혼자만 도망치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라.”
함덕유의 손에는 어느새 그의 보검이 들려 있었다. 덜덜 떠느라 맞설 생각도 하지 못한 마윤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목이 잘렸다.
“용문주님, 그 큰일을 겪고도 어찌 그리 사람을 잘 믿으십니까? 후배 된 도리로 안타깝고 딱하지 뭡니까?”
상대의 피를 잔뜩 뒤집어쓴 함덕유의 모습은 한 마리 사나운 늑대와 같았다. 어째서 그리 쉽게 믿었던가? 용가현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고 원망했다. 수차례 허벅지를 찌르며 버텨보았지만, 눈꺼풀은 점점 내려앉았다. 아득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마음속에는 깊은 절망감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