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76화 (176/209)

176화. 亡羊得牛(망양득우)

연달아 십여 개의 초식을 몰아 쓴 무생과 달리 운선의 호흡은 편안하기만 했다. 승패는 이미 한참 전에 결정되었다.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 어서 죽여라!”

어차피 주군에게 돌아가봤자 죽은 목숨이었다. 그것은 치욕 이전에 불충이었다.

“참으로 못난 자로군요. 끝까지 주군을 지키지는 못할망정, 적에게 이리 쉬이 목숨을 내맡기다니 실망입니다.”

운선은 망연자실한 무생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뒤편, 낭패감 가득한 이금의 얼굴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거래는 여기서 끝인가 보군요? 그렇다면 우리가 다시는 마주 볼 일도 없을 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잠깐!”

이금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이렇게 보내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비록 우위를 점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으나 거래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당신의 말이 과연 맞습니다. 그 욕망을 이룰 방법이 있습니까?”

“네, 그게 바로 제가 듣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마침 내려앉은 노을이 두 사람의 인영을 붉게 물들였다. 각자의 결핍을 인정하는 순간, 접점이 없던 이들 사이에 기가 막힌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형님을 몰아내고 얻는 황좌가 아닌, 당신의 자질로서 인정받은 황좌라면 어떻겠습니까?”

“하하하.”

운선의 확신에 찬 발언에, 이금은 헛웃음이 다 나왔다. 그 방법을 알았다면 굳이 이렇게 힘든 길을 걸어왔을까? 그런데도 어쩐지 믿고 싶었다. 정녕 미친놈의 헛소리라 할지라도, 약간의 가능성만 있다면 받아들일 용의가 충분했다.

“이미 빼앗긴 신뢰를 어찌 찾는단 말입니까?”

“천서국!”

“안 될 말!”

이금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들을 끌어들인 건 이석만으로도 충분했다. 경국 땅에 침을 질질 흘리는 그들과 손을 잡으라는 것인가? 신화정을 팔아먹은 것으로도 모자라, 더 큰 매국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들과 협상하지 않습니다. 형님이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과합니다.”

“그들과 거래를 할 사람은 당신이 아닙니다. 바로 접니다.”

“무슨?”

운선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했다. 모든 거래의 시작은 서로 간의 신뢰. 상대에게 믿음을 주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전략이었다.

“천서국은 당신을 해치우는 대가로 이석에게 상당한 권리를 약속받았습니다. 하여 그들은 이미 꽤 큰 규모의 군사를 파견했지요. 아시다시피 오대산검을 상대할 자객들까지도. 아마 벌써 살육을 시작했겠지요. 당신은 아마도 이석이 배신당하리라 생각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당신을 꽤 높게 평가하더군요. 사호세주의 마지막 목표는 당신입니다.”

“이석…….”

불끈 쥔 주먹에서 묽은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생각보다 훨씬 등신 같은 형님이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천서국이 이토록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덤비는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한 터였다.

“예, 아마도 이대로 밀고 나간다면 필패입니다. 아직 정리하지 못한 이석의 세력도 당신의 뒤통수를 노리고 있을 테니까요. 아, 물론 저도 아직 당신을 도울 생각은 없고요.”

“다 맞는다 칩시다. 허면, 빠져나갈 구멍이 있단 말입니까?”

“저는 천서국과 거래하여 이석과의 약조를 무산시킬 생각입니다. 당신과 이석이 싸워 승패를 낼 때까지 기다릴 것. 제가 제안할 내용은 이와 같습니다.”

이금의 한쪽 입술이 삐쭉 올라갔다. 듣기에는 그럴싸하지만, 조삼모사가 따로 없었다. 누구와 먼저 싸움이 붙든 간에 이득을 보는 쪽은 천서국이었다. 애초에 그 결과를 경계하여 여기까지 왔건만, 무슨 개수작인가 싶었다.

“이런 협잡꾼을 보았나? 그저 서이국의 배를 불려주는 일이 아닙니까?”

“그럴 리가요. 저하께서는 우리를 간과하고 계시는군요.”

“뭐?”

운선은 나뭇가지를 들어 바닥에 찍찍 선들을 그어댔다. 이금의 발아래에서 시작된 입구가 운선의 발밑에서 출구가 되는 거대한 지도였다.

“금천에서 목적지 구정으로 통하는 아홉 갈래의 길입니다. 소의 뿔과 같은 모양이라 하는 각암 마을은 길이 좁고 안개가 자욱하여 한 번 들어가면 쉬이 출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저희는 이곳에서 천서국의 자객 넷을 모두 잡을 것입니다. 수장이 없는 군대는 오합지졸이지요. 저하는 바로 이곳에서 매복하여 이석과 염자홍을 한 번에 해결하십시오.”

“지도는 나만 압니까?”

운선은 대답 대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흐음.”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설사 거짓이라 해도 속아볼 만한 계획이다 싶었다.

“그럼, 조건은?”

“당신들끼리 싸우는 동안 신교는 내버려 둘 것!”

“.......?”

선뜻 대답하지 못한 이유는 하나였다. 저 능구렁이의 계획 속에 어떤 꼼수가 숨어 있을까? 여기까지는 저들이 얻어낸 이득이 없었다. 그곳의 위치까지 알려주니, 되레 손해가 아닌가? 게다가,

“이 약조만 지켜준다면, 그곳에서 경국의 몫을 나눠주겠습니다. 천서국과 이석의 계약 파기, 그리고 려국의 보물 일부! 이 정도라면 황좌를 얻을 정당성이 되지 않겠습니까?”

“려국의 보물까지 넘겨주겠다?”

운선은 그의 의심을 예상했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역시 아란에게 보여줬던 것처럼 열쇠 세 개를 목에서 꺼내 들었다.

“아시다시피 나머지 열쇠 네 개는 장은의 손에 있습니다. 어차피 저하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저 또한 그곳의 문을 열 수가 없단 말이지요.”

“흐음.”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함정이더라도 발을 디딜 수밖에 없는 매혹적인 제안이었으므로.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면서도 이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지요.”

“그러시지요.”

“굳이 나에게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형님에게 갔다면 훨씬 쉬웠을 일을, 어째서 에움길로 돌아들고자 하냔 말입니다.”

“이석은 어리석게도 천서국을 끌어들였지요. 그들이 호시탐탐 이 나라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오직 배다른 아우를 이기겠다는 치기 어린 투기 때문에요. 그러나, 누구보다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외부의 힘은 결국, 자기 자신을 찌르는 칼이라는 사실을.”

운선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의 아버지가, 스승이 저질렀던 죄업이 거대한 바윗돌이 되어 가슴을 짓눌렀다.

“려국을 재건하겠다는 망상은 버린 지 오랩니다. 고작 수백의 교도들로 강대국인 두 나라를 무너뜨릴 가능성은 없으니까요. 저는 그저 좀 더 현명한 황제가 다스리는 경국에서 려국인이 차별받지 않는 삶을 보장받길 바랍니다. 그것이 망국의 죄인이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속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석은 아닙니다. 경국을 이끌어갈 자질이 없어요. 천서국에 맞서 대등한 입장에서 싸워줄 경국의 황제가 필요합니다. 두 나라가 서로를 경계하는 그 지붕 아래에, 려국인의 안식처를 찾을 겁니다.”

“굳이 거기까지 털어놓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려국인 따위에게 관심이나 있겠습니까?”

문득 자존심이 상한 이금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마치 한 나라의 왕이라도 된 양, 백성을 운운하는 꼴이라니. 진작에 망한 나라 주제에 대등한 입장에서 협상하는 태도조차 같잖았다.

“관심이 없어도 좋습니다. 그저 거친 땅에 뿌린 씨앗이려니 생각하고 잊어 주셔도 좋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싹이 트고 나무가 되어 열매까지 맺게 되겠지요. 그 나무의 뿌리를 기억하지 못하셔도 좋습니다. 그저 거친 땅에라도 마음 붙이려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면 됩니다. 땅을 갈아엎고 씨앗을 볶아, 생명을 이어갈 희망조차 짓밟는 무뢰한만 아니면 됩니다. 그것만으로도 려국인은 충분합니다.”

이금은 더욱더 심술이 났다. 도대체 려국이 무엇이길래, 수십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꿈틀거리는 걸까? 습기 하나 없는 맨바닥에 쨍쨍한 볕을 받으면서도 굳이 살겠다고 발악하는 지렁이와 같았다.

“다 죽은 씨앗이 무슨 힘이 있을까? 거친 땅에서는 양질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렇게라도 핏줄을 이어가는 게 의미가 있겠습니까?”

“흐르는 물을 가둬둘 수는 있어도 영원히 말리지는 못합니다. 무릇 려국인의 피가 그러하지요. 아무리 물을 들이부어 씻어내려 해도, 그 붉은 마음은 묽어지지 않을 겁니다.”

“예언컨대, 기어코 붉은색을 덜어내지 못한다면 새로운 골짜기를 파낼 것입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주변이 어둑어둑해져 상대의 표정도 읽어내기 어려워졌다. 거래는 성사되었고 앞으로 다시는 마주 볼 사이도 아니었다. 미련 없이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운선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훗날, 당신은 이 거래를 후회하게 되겠지요.’

운선은 공허한 눈으로 주변을 쭉 훑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분명 이금의 뒤를 지키는 호위들일 터였다. 그리고, 기척 없는 살기가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언제까지 엿들을 셈인가?”

울창한 나무숲에서 검은 인영이 움찔거렸다. 양지로 나오지 못하고 숨어 보는 모습은, 차기 두타공파의 장문이 될 인물이라고 하기에 너무나 보잘것없었다.

“네 뜻대로 되리라 생각지 말아라. 친왕은 속여도 나를 속이지는 못한다.”

“그리 당당하거든 나서서 막지 그랬나?”

형진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언제부터였을까? 부끄러울 것 하나 없는 저 당당한 눈을 볼 때마다 미치도록 치욕스러웠다. 죄책감이 만들어 낸 자격지심.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였다. 수치심의 근원을 제거하는 것. 그날까지는 절대로 들키지 말아야 하는 감정이었다.

“시간을 벌고자 하는 것이냐?”

“그렇다면?”

“어떻게든 너를 막을 것이다.”

운선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무엇을 위해 황실의 개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스스로 채운 족쇄의 의미조차 깨닫지 못하는 그가 새삼 가엾어졌다.

“막아 보아라. 그러나 너의 주인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터, 단신으로는 그 무엇도 못 하는 너 따위가 두려울 성싶으냐?”

“강운선!”

형진의 손바닥 주변으로 서늘한 기운이 모였다. 흥분하여 새어 나온 내력이었건만, 허투루 받아넘길 위력이 아니었다. 운선 역시 공기의 흐름이 바뀐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지금 여기에서 끝내고 싶다면 그리하자. 나 또한 네놈을 용서할 생각이 없으니.”

운선의 호흡법이 일시에 바뀌었다. 들숨이 깊어지고 날숨이 짧아지는 듯싶더니, 점점 숨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동작도 취하지 않았으나 온몸에서 은은한 기운이 아물거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아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형진은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운선과의 대결에서 패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다만, 아직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명심해라. 네놈 목숨은 반드시 내가 거둬갈 것이다. 그때까지 죽지 말아라.”

대답도 듣지 않고, 형진의 검은 인영이 다시금 숲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제 공터에는 오롯이 운선만이 남았다.

“질기고 독한 악연이구나.”

스산한 바람이 겨드랑이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곧 벌어질 참혹한 싸움을 예감이라도 한 듯, 그 흔한 산새조차 울지 않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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