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75화 (175/209)

175화. 龍虎相搏(용호상박)

이금은 내내 심드렁한 표정으로 형진의 보고를 들었다. 어느 문파가 굴복했고, 어느 장문이 죽었는지에 대한 구구절절한 사연은 별로 관심도 없었다.

“그래서, 오대산검 외 기타 장문들은 얼추 정리되었다? 그럼 형님은?”

“태자께서는 아마도 서이국 태자와 동행 중인 듯싶습니다. 교위 여럿을 대동하셨지만 오대산검의 척살대를 믿는 터라 정작 군사의 수는 적은 편입니다.”

“음, 그러나 서이국의 자객들이 끼어들었으니 만만치 않겠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그 부분도 걱정되지는 않았다. 염자홍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겉으로는 이석을 돕는 척 아부를 떨 테지만 조만간 시커먼 속내를 드러낼 게 뻔했다. 무식한 형님은 발을 쭉 뻗은 채, 도끼가 찍히는 줄도 모르겠지.

“서이국은 이석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미 사호세주 일당이 뒤에서 이석의 편으로 예상되는 이들을 조용히 처리하는 중입니다. 정작 우리 쪽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니 당분간은 방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흐음, 그렇겠지.”

“그럼, 강운선은 어찌 되었느냐?”

“네?”

여태 차분했던 형진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 의중에 자신을 향한 질책과 실망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어차피 목적지는 려국의 그곳이었다. 강운선, 그 미꾸라지 같은 놈을 찾아야 장소를 알 수 있을 테니까.

“서이국의 자객 무리와 동행한다는 소식 외에 아직 이렇다 할 행적은 찾지 못했습니다. 송구합니다. 저하.”

“흐음, 저런 허접한 놈들을 처리할 목적이었다면 내가 직접 나섰겠는가? 그저 편안한 황실에서 군것질이나 씹으며 보고만 들으면 될걸.”

이금은 노랗게 굳어가는 은파의 시신을 발로 툭툭 차며 중얼거렸다. 그저 혼잣말 같았으나 형진을 향한 비난이 분명했다.

“그래도 장은, 그자는 열쇠 몇 개라도 확보하지 않았는가? 좀 더 분발해야 하지 않겠어?”

“명심하겠습니다.”

소매 속에 감춰진 형진의 팔뚝에 힘줄이 굵게 잡혔다. 수치심과 투기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그의 감정이 성난 파도처럼 휘몰아쳤다.

‘그래, 실컷 저울질해라. 나 또한 당신이 목적이 아니다. 쓰임이 다하면 버리는 쪽은 나다.’

고작 황실의 개가 되겠다고 선택한 길이 아니었다. 이금을 황위에 올리는 건,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었다. 스승의 가슴에 칼을 꽂아 넣으며 다짐했던 의지가 다시금 불타올랐다. 그렇다면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이 정도 치욕쯤, 패륜을 저지른 죄책감에 비할 바가 아니니까.

“명심해라. 나는 공정한 주군이야. 가장 먼저 그곳으로 안내하는 쪽에게 모든 공을 치하할 생각이다. 쓸데없는 대장 놀이는 그쯤 하란 말이다. 알아들었으면 그만 가보아라.”

“명심하겠습니다.”

이금은 몇 가지 당부를 덧붙인 후, 형진을 돌려보냈다. 이제 이야기의 결말까지 왔으나 아직도 손에 쥔 실마리가 없었다. 사라지는 심복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망한 나라의 보물찾기거늘.”

양산 밖으로 펼쳐진 하늘은 유달리 맑고 높았다. 문득 이 지겨운 형제 다툼이 한심해졌다. 서이국을 끌어들여서라도 아우를 이겨보겠다는 형님의 어리석음에 헛웃음이 났다. 하긴, 그 정도 발악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을 테니까.

이금은 하얗고 매끈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길게 하품을 했다.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까지 우아하고 기품이 있었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뼛속까지 황실의 핏줄이었다.

“하아, 지루하군.”

“그러게 말입니다. 지루하군요.”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메아리처럼 돌아왔다. 방금까지도 나른하기 그지없던 가을볕이 일시에 얼어붙었다.

“무생!”

이금의 부름에, 검은 복면의 사내가 순식간에 주군의 등 뒤에 나타났다. 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양산보다 더 큰 그늘을 만들어 냈다.

“설마, 저 바위 같은 무사와 싸움을 붙일 요량은 아니시겠지요?”

“당신 하기에 달렸지요.”

불청객이 나타난 저쪽 골짜기는 꽤 거리가 멀었으나, 그의 목소리는 마치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굳이 손을 맞대어 보지 않아도 웅혼한 내력의 실력자임을 알 수 있었다.

“저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아직.”

약속 없이 나타났지만,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지루한 싸움의 시작이자 끝. 하여, 그의 등장에 불쾌감보다는 호기심이 들었다. 적의가 아니라면 대화해 볼 가치가 있었다. 대어를 낚을 때는 미끼를 완전히 물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법. 이금은 이 긴장감을 즐겨보기로 마음먹었다.

“드디어 소문으로만 듣던 태을신교의 교주님을 만나는군요. 참으로 반갑습니다.”

“저 역시 대단한 분을 영접하여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말투는 공손하였으나 제법 도전적인 태도였다. 감히 대 경국 이황자의 앞에서 허리를 빳빳하게 세운 것만 봐도 그러했다. 평소 같았다면 저 동그랗게 뜬 눈을 파내 버렸을 테지만, 오늘은 일단 참기로 했다. 오히려 존대도 잊지 않았다.

“그래, 나를 찾아온 데는 이유가 있을 터, 들어나 봅시다.”

“역시 소문대로 화통하십니다.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 사람을 처참하게 도륙할 리가 없지요.”

“흐음.”

여태 평온하던 이금의 미간이 세차게 꿈틀거렸다. 이놈이 시비를 걸러 온 것인가? 그렇다면 굳이 들을 이유가 없었다. 이만큼 견딘 것만으로도 충분히 배려해 준 셈이었다. 그는 쓸데없는 일에 자기 시간을 낭비할 만큼 머저리가 아니었다.

“싸우러 온 게 아니니, 저 바위 같은 호위는 뒤로 물리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까 보니, 저치의 팔뚝에 맞으면 즉시 머리통이 깨지더이다. 어디 무서워서 대화나 하겠습니까?”

“무생이라도 없으면 내 안전은 누가 지켜준답니까? 그저 병풍처럼 생각하시지요.”

“목숨을 노릴 생각이었다면, 저 덩치만 큰 바위가 있다 한들 못했을까?”

“하!”

운선의 도발에 무생의 무표정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상체가 움찔거렸으나, 이금은 좀처럼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병풍이나 바위나, 어차피 존재감이 없는 건 마찬가지란 뜻이니 그냥 둡시다.”

“뭐,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요.”

운선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이금의 인상을 살폈다. 기분이 꽤 상했을 텐데도 표정은 여전히 너그러웠다. 미세한 눈 떨림마저 없었다면 깜빡 속을 정도였다.

‘범상치 않은 인물이구나.’

어느 정도 예측은 했건만, 정작 마주하고 보니 과연 우습게 볼 존재가 아니었다. 순간 잘못된 선택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단 한 번의 실수가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누구보다 잘 아는 운선이었다.

‘그러나, 신념에 가득 찬 등신보다는 사리 분별이라도 할 줄 아는 갈가위(이기주의자)가 훨씬 나은 법이지.’

서로를 탐색하는 동안에도 두 사람의 머릿속은 각자의 셈으로 바삐 돌아갔다. 그 사이, 해는 벌써 서쪽으로 거의 다 기울어졌다. 당사자들만 느끼지 못할 뿐, 꽤 길고 따분한 시간이었다.

“설마 눈싸움이나 하자고 나타난 건 아니실 테고, 이쯤에서 패를 보여주심이 어떤지?”

결국, 기다리지 못한 쪽은 이금이었다. 조바심 또한, 지고 들어가는 쪽이 됨을 모르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는 상대의 깊고 맑은 눈은 기묘한 무기력감을 불러일으켰다. 당혹스러움. 그 누구에게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저하께서 가장 얻고 싶은 게 무엇입니까? 태자에게 약속된 황위를 뺏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경국을 얻고 싶으십니까?”

운선은 애초에 돌려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럴 여유도 없거니와, 그따위 잔꾀가 통할 상대도 아니었다. 이 거래의 끝은 그가 의도한 결말이어야 했다.

“글쎄, 뭘까요? 막상 질문을 받으니 헷갈리는군요. 강교주는 뭐가 좋겠습니까?”

“어느 쪽 답도 나쁠 게 없지만, 제가 원하는 대답은 후자입니다.”

“하하.”

이금은 갑자기 기분이 유쾌해졌다. 자신이 선택한 바는 반드시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인가? 고작 려국 왕실의 떨거지 주제에 경국의 후계를 고르려 하다니, 건방지기 이를 데 없었다.

“하하하, 이유가 어느 쪽이든 어차피 결과는 같지 않습니까? 당신 따위가 좌지우지할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호탕하게 웃었으나 입가에 작은 떨림은 감출 수 없었다. 드디어 감정이 드러나는 상대의 얼굴을 보며, 운선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의 선택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장은과 백형진을 양손에 들고 주물러 봤자 허튼짓입니다. 무림인들을 끌어들여 강호를 혼란스럽게 한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친왕께서 그리 우습게 여기는 태자 저하 뒤에는 황제 폐하가 버티고 계시지요. 장남을 향한 굳건한 믿음과 사랑은 쉬이 변하지 않을 겁니다.”

“뭐라?”

여태 여유만만하던 이금은 어디에도 없었다. 매끈하고 고운 이마에 주름이 지어지고 주먹을 꽉 쥔 손에는 경련이 일었다. 만약 조금만 인내심이 적었더라면 무생을 시켜 운선의 머리를 떼어냈으리라. 그러나 이금은 보기보다 그릇이 큰 인물이었다.

“여태 참 고생이 많으셨지요. 이석을 부추겨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고요. 다행히 등신 같은 형은 아우를 이기겠다는 마음 하나로 온갖 진상은 다 부리고 다녔더군요. 정작 자신의 편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강호를 피바다로 만들다니, 정녕 태자의 자격에 한참 모자란 자가 맞더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고작 문파 몇 개 사라진다고 해서 아버지의 마음이 움직이기나 할까요? 미욱한 자식의 흠일 뿐, 내칠 이유가 되지는 않을 터. 되레 이리되도록 방관한 아우를 독하고 못됐다 밀어내지는 않을까요?”

이금은 대답 대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저 능구렁이 같은 놈이 부러 도발하려는 의도를 모르지 않았다.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쪽은 자신이 아니라 운선이었다. 그 위치를 바꿔보고자 발악하는 그의 얕은수에 넘어갈 생각은 전연 없었다.

“여태 고생 많으셨으나, 다 헛짓거리였다 이 말입니다.”

“설마, 고작 이따위 평가질이나 하려고 날 붙잡아 둔 겁니까? 그렇다면 실망인데?”

이금의 심드렁한 반응에도 운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상대의 가장 깊숙한 속마음을 건드려 보기로 했다.

“아, 이제 알았습니다. 당신이 진정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형님에게 이기는 것도, 황위에 오르는 것도 맞을 테지만 둘 다 본질은 아닐 겁니다. 이 모든 욕망의 시발점은 오직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어리광이 아닙니까?”

“네 이놈!”

인내심은 여기까지였다. 아버지의 애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상처야말로 그의 역린이었다. 굳이 이 복잡하고 귀찮은 일을 벌인 이유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 마음 깊이 숨겨 놓았던 욕망의 실체가 발가벗겨지자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이 밀려왔다.

“죽고 싶어 환장한 놈에게 자비를 베풀어주마. 무생, 저 쥐새끼 같은 놈의 목을 당장 가져오너라.”

“존명!”

드디어 명이 떨어지자,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운선을 향해 질주했다. 폭우처럼 쏟아붓는 무생의 초식에는 빈틈이라고는 없었다. 일촉즉발. 당장 피하지 않으면 가슴에 큰 구멍이 날 정도로 거센 검풍이 한길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운선은 피하기는커녕, 슴슴한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쉭, 쉬익!

자신의 이름처럼, 죽음을 각오한 공격에는 후진이 없었다. 제 몸도 방어하지 않는 무식한 한 초. 그러나 그의 검은 단 한 차례도 목표물에 닿지 못했다. 마치 다음 방향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듯, 귀신같이 사라지는 운선의 인영을 지나쳐 허공을 베어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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