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我歌査唱(아가사창)
어스름한 달빛 아래 세 사람의 검객이 지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고대산파와의 격전에서 가까스로 도망친 상광방주 덕원과 보룡검 주암, 그리고 상성문의 은파였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쳤다. 하여, 세 사람이 마주친 것은 완전히 우연이었다.
“형님,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습니다. 가도 가도 금천은커녕, 사람 다니는 길도 나오지 않으니 우리 망한 거 아닙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 식량도 다 떨어졌는데 이러다 굶어 죽겠어요.”
두 후배의 칭얼거림이 계속되자 여태 참고 있던 덕원도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고인경 같은 애송이에게 당한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길을 잃어 아사할 지경이라니. 생각할수록 한심하고 비참했다.
“그래도 요 옆에 골짜기가 보이니 곧 내려가는 길을 찾지 않겠나? 다시 기운을 좀 내 보세.”
그래도 그들보다는 십여 년을 더 오래 산 선배가 아니던가? 덕원은 마음을 추스르고 앞장서서 길을 나섰다.
골짜기를 따라 한 시진쯤 내려왔을 때였다. 그토록 찾던 흙길이 눈 앞에 펼쳐지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어? 형님. 저기 누가 있는데요?”
“뭐?”
그토록 찾던 한길에는 내리쬐는 햇살을 커다란 양산으로 가린 누군가가 한가롭게 거닐고 있었다. 깔끔하게 올려 묶은 머리에는 옥비녀를 꽂았고, 때깔 좋은 비단옷을 입은 모습이 귀한 집 도련님 같았다.
‘어째서 이 험한 곳에 옥골선풍이 있는가?’
덕원은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오랜 강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저런 종류의 인물과 인연을 맺어봤자 좋을 게 없었다.
“좀 더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 보자.”
“네? 바로 이 앞이 우리가 그토록 찾던 한길인데 어찌 돌아간단 말입니까?”
“저자의 용모가 범상치 않아 그러하다.”
“아니, 형님!”
주암이 대뜸 대들고 보았다. 검에 베인 상처 때문에 피를 많이 흘린 그는 당장이라도 바닥에 쓰러질 것 같았다. 조심이고 뭐고, 어떻게든 민가를 찾아 허기진 배부터 채우고 싶었다.
“소문도 못 들었느냐? 온갖 살수와 도적 떼도 려국의 보물을 취하고자 모인다고 하더구나. 이 위험한 곳에서 저리 태평하게 산책이나 하다니, 평범한 자일리가 있겠느냐?”
“그저 형님의 기우일 뿐입니다.”
덕원이 여러 차례 설득하였으나 주암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보다 못한 은파가 끼어들어 두 형님 사이를 중재했다.
“저 또한 보룡 형님 말이 맞는다고 생각해요. 딱 봐도 그저 귀한 집 자제일 뿐, 무공은 하나도 모를 것 같은데요, 뭘. 정 불편하시다면 저희가 먼저 앞장서겠습니다.”
그 역시 주암과 같은 의견이었다. 물론 덕원을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하찮게 보았던 고대산파에게 당한 게 형님의 마음에 남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은파는 이제 걷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주암을 부축하여 숲길을 헤쳐 나왔다. 모처럼 만에 사방이 트인 공터에 나오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눈앞에 알짱거리는 귀공자 따위가 뭔 대수랴?
“여보시오, 공자. 길을 좀 터주시겠소?”
은파는 부러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덕원의 우려처럼 비범한 자가 아니더라도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괜한 시비만 붙지 않으면 순조롭게 지나갈 수 있었으므로.
“흐음, 싫은데.”
“뭐요?”
예상치 못한 상대의 답변에 두 사람은 할 말을 잃었다. 이 상황 파악 못 하는 하룻강아지는 또 누구인가?
“그럼 그냥 거기 계시오. 우리가 비켜 가겠소.”
그때, 뒤에서 점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아우의 뜻을 꺾지 못하고 쫓아온 덕원이었다. 아무래도 피할 수 없다면 최대한 몸을 숙이려는 생각이었다.
“그것도 싫은데?”
“아니, 이자가!”
참다못한 주암이 버럭 고함을 쳤다. 덕원은 서둘러 그의 입을 막으며 정중하게 되물었다.
“왜 못 간다는 거요?”
“너희가 내 얼굴을 봤으니까?”
“뭐?”
그 말의 뜻을 제대로 알아듣기도 전이었다. 조용했던 주변에서 음산한 기운이 쏟아지더니 검은 복면을 쓴 장신의 사내가 튀어나왔다.
“너희는 누구냐? 왜 우리를 공격하는가?”
은파의 첫 의심은 태을신교였다. 그는 신교의 교주에 대한 소문만 들었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이십 대의 남자, 낯선 땅에서도 당당한 태도라면 강운선일 가능성이 충분했다.
“혹 네놈이 강운선이냐?”
“뭐라?”
사내의 곱디고운 미간이 순식간에 찌그러졌다. 감히 자신을 그따위 마두와 착각하다니, 참을 수 없이 자존심이 상했다.
“살(殺)!”
“존명!”
복면의 사내는 자신의 몸집만큼이나 큰 검을 머리 위로 휘돌렸다. 동시에 한 장 거리를 단숨에 뛰어들더니 세 사람의 중앙으로 위치를 바꿨다.
“피해라.”
덕원의 외침으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세 사람의 검은 모두 출신이 달라 성질도 제각각이었다. 덕원의 묵직한 검이 베는 데 특화되어 있다면 주암은 날렵하고 빠른 출수로 혈을 찔러 내었다. 은파는 두 선배보다 경공이 뛰어났는데, 그 특기를 살려 얇게 휘어지는 검을 사방으로 휘둘렀다. 적의 반경을 좁히는 데 이만큼 용이한 무기가 없었다.
휘익!
슥!
그러나 상대는 전혀 예상치 못한 동작으로 그들을 당황케 했다. 복면인은 아예 초식이라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살기가 가득한 검을 대각선으로 휘두르는 단순한 동작이었는데 웬만한 무공 초식보다 위협적이었다.
‘이놈은 망나니다.’
검기가 어지럽게 얽히며 수십 합을 부딪쳤으나, 복면의 사내는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되레 열세에 몰린 쪽은 주암이었다. 다친 팔이 중심을 잡아주지 못하고 팔랑거리니 검을 든 팔에 좀처럼 내력을 싣지 못했다.
‘보룡은 글렀다. 차라리 미끼로 던져주니만 못하다.’
덕원의 가느다란 눈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보아하니 은파의 입장도 썩 다르지 않았다. 유일한 특기인 빠른 발은 체력이 받쳐주지 않아 영 시원찮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셋 다 전멸이었다.
휘익!
마음의 결정을 내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두 아우와 달리 덕원은 어엿한 상광방주였다. 얼마 전에 태어난 셋째를 두고 비명횡사할 수는 없었다. 복면인이 주암 쪽으로 몸을 돌린 사이에 뒤로 멀찍이 물러났다. 어차피 앞쪽은 저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 막고 있으니 골짜기를 타고 내려갈 생각이었다.
“어라? 형님?”
눈치 빠른 은파는 덕원의 발동작만 보고도 의중을 읽었다. 배신감? 아니, 지금 그가 느낀 감정은 후회였다.
‘아, 내가 먼저 도망칠걸.’
쓱
“으악!”
복면인의 휘검은 정확하게 주암의 오른팔을 썰어냈다. 검을 쥔 쪽이 떨어져 나갔으니 이제 있으나 마나 한 왼쪽 팔만 휘젓고 있을 뿐이었다.
“도와줘, 제발…….”
그는 강호에 나와 처음으로 극렬한 공포를 느꼈다. 오직 살인이 목적인 괴물의 검은 냉정하고 잔인했다. 감정 없는 맹수에게 찢기는 마음이 이러할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살인귀에 맞서고 있는 이는 오직 자신밖에 없었다. 믿었던 선후배는 이미 등을 돌리고 한참을 도망간 다음이었다.
“제기랄.”
진득한 욕설이 그의 유언이었다. 몸에서 떨어져 나온 머리는 데굴데굴 굴러, 이제 막 공자의 한 치 앞까지 뛰쳐나간 은파의 발밑에 도달했다.
“너도 당해봐라!”
공포에 질린 은파는 다짜고짜 공자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마치 넝쿨처럼 원을 그리며 돌아드는 검은 정확히 공자의 목덜미를 노렸다. 그를 지키는 복면인과의 거리가 한참이므로 스스로 막아내지 못한다면 절명이었다.
휘익
탁!
“어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자신의 검날에 목이 꿰뚫린 은파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이번에도 절명이었다.
“명절날 굴비처럼 꿰였구나.”
얼굴을 가리는 공자의 손동작은 우아하고 기품이 있었다. 마치 재밌는 희구라도 구경하듯 깔깔거리는 모습은 순진한 어린아이 같았다.
휘익!
두 아우의 죽음을 똑똑히 목격한 덕원은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다음에 떨어져 나갈 모가지는 자신의 것이었다. 살아야 한다. 넘어져 무릎이 멍들고, 입술이 찢겼는데도 아프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 또 미친 듯이 달렸다.
퍽!
“허억!”
그러나, 간절한 바람과 달리 고작 두 장도 멀어지지 못해서 뒷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복면인은 그 거대한 힘으로 덕원의 목을 잡아 올렸다. 무자비한 손에 눌려 숨도 쉴 수 없었다. 여기가 내 끝이구나. 몽글몽글 눈물이 솟아올랐다.
“너, 너…, 너는 대…체…, 누, 누…구냐?”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서 뱉어낸 말이었다. 공자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적어도 자신이 누구에게 죽는지는 알고 싶은, 일차원적인 욕망이었다.
“너 따위가 알아서 뭐 하게?”
“흐윽!”
여기까지가 상광방주 덕원의 마지막이었다. 그토록 원했던 그곳에 한 발자국도 다가가지 못하고, 왜 죽는지도 모른 채 영혼 없는 살덩이가 되고 말았다.
“쯧쯧, 운이 나빴지 뭐야? 그렇지 않나?”
핏덩이가 된 은파의 주검을 발로 툭툭 밀며 공자가 히죽거렸다. 비단옷에 더러운 피가 묻을까, 퍽 조심스러운 몸짓이었다.
“감히 저하께 길을 비켜 달라고 했으니, 죽음을 자초한 꼴이지요.”
공자의 질문에 대답한 이는 복면인이 아니었다. 그의 뒤편에서 기척도 없이 나타나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또 다른 방객, 백형진이었다.
“그래, 하루살이들은 잘 해결했는가?”
“네, 허나 장은이 계속 뒤를 쫓아 운신이 어려웠습니다.”
“흐음.”
이금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부채를 펄럭거렸다. 사실 두 젊은 고수의 자중지란은 자신의 소관이 아니었다. 되레 누가 더 뛰어난지 궁금하기도 했다.
“장은을 이대로 두어도 되겠습니까?”
형진은 내내 가슴 속에 묵혀두었던 질문을 던졌다. 장은은 여전히 편을 정하지 않고 애매하게 구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능글맞은 구렁이 한 마리를 냉큼 내치지 않는 금황자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왜? 의심이 드는가? 내가 너희 둘을 저울질할까 봐서?”
“아니, 감히 제가 어찌 그런 망령된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저 간악한 자이니, 염려될 뿐입니다.”
“허!”
이금은 대답 대신 크게 코웃음을 쳤다. 간악한 자라 했는가? 그렇다면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이자보다 더한 놈이 있을까 싶었다. 고작 부귀공명에 눈이 멀어 평생을 키워준 스승을 해친 짐승 주제에.
“걱정하지 말아라. 내 현명하게 처리할 터. 너는 원래 계획대로 오대산검 장문들의 손발을 묶어두면 된다. 되도록 살려 두되, 영 말을 듣지 않는다면 몇몇은 죽여도 좋고.”
“네, 명심하겠습니다.”
이금은 자애로운 표정으로 충신 백형진의 조아린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언제든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는 배신자에 대한 신뢰는 조금도 없었다.
*** 아가사창(我歌査唱):
내가 부를 노래를 사돈이 부른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