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猫鼠同處(묘서동처)
목치수는 치욕스러움을 참지 못하고 고이 간직하던 구슬을 꺼내 바닥에 내팽개쳤다. 흔한 재료로 만들어진 위조품은 존재를 증명이라도 하듯 산산조각이 되어 깨지고 말았다.
“그럼 굳이 이놈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이유가 무엇이냐?”
거친 목소리로 일갈하자 온 나무가 우수수 이파리를 떨궜다. 그의 수염 한올 한올까지 분노가 서린 듯했다.
“사실 천서국이란 대어가 걸릴 줄은 몰랐습니다. 그저 소문을 내어줄 소리꾼이 필요했는데 그쪽 태자가 나서주는 바람에 일을 더 크게 키울 수 있었지요. 하여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 요망한 놈!”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숙과 달리, 아란은 되레 편안해졌다. 역시 사람 보는 눈이 틀리지 않음을 확인하니 어쩐지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오라버니가 실컷 잘난 척해봤자 자신보다 식견이 넓지 못하다는 사실도 꽤 자랑스러웠다.
“자, 그럼 굳이 지금 밝히는 이유는 무엇인지 들어봅시다. 우리야 감쪽같이 속은 상태니 이대로 헤어져도 한동안 모를 터, 어째서 진실을 말해주었나요? 다른 거래를 원하는 게 아닌가요?”
“역시, 공주님은 공주님이시군요.”
운선은 팔짱을 낀 손을 풀어 아란을 향해 공수했다. 다소 천방지축이긴 했지만, 영리하고 의리를 아는 여인이었다. 비록 적으로 만났으나 존경의 마음은 표현하고 싶었다.
“그전에 목어르신께 뭐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흥! 뭘 말이냐?”
마음 같아서는 상종하고 싶지 않았지만 목치수는 그리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다. 이 일은 개인의 은원이 아니라 국가의 흥망과 관련된 대의였으므로. 솟아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누르며 운선을 향해 돌아섰다.
“천서국의 태자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걸 알아 무엇 하려고?”
순간 가슴이 뜨끔하였으나 애써 내색하지 않고 되물었다.
“혹, 이 주변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마중 나와 계시지는 않은지 싶어서요.”
“뭐?”
목치수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이 건방진 오랑캐 놈은 어디까지 내다보는 것인가?
“신화정에서 당신들이 진을 치고 있던 이유는 경국의 태자 이석과의 약속 때문이었지요. 그는 려국의 보물을 얻어 아우인 금황자를 이기고 싶어 하니까요.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천서국이 아니라 더한 나라도 끌어들일 작자이지요.”
“…….”
목치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저 영악하기 그지없는 상대에게 말려들지 않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기 바빴다.
“운평에 굳이 천서국 태자가 온 일은 사신단 때문이 아니었지요. 바로 이석과의 은밀한 거래를 이행하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그랬다. 굳이 지금처럼 경국과 천서국과의 관계가 최악일 때 태자가 직접 나설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 위험을 무릅쓰고 왔다면 다른 속셈이 있었을 테니까.
“운평에서 우리 아우들을 만난 건 우연이었겠지요. 설요에게 들러붙어 경국 사정이나 캘 요량이었을 텐데 월척을 낚았다 여겼을 겁니다. 이쯤 되니 이석과의 동맹과는 상관없이 다른 꾀가 났을 테고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아란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이 운선의 추측이었으나 자홍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로서는 충분히 수긍이 가는 내용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이석을 도와 금황자의 무리를 진압하고 려국의 보물을 나눠 가지기로 한 약조였다. 허나, 그가 누구인가? 욕심은 자신의 아버지보다도 몇 곱절 큰 자홍이 그 정도 배분에 만족할 리가 없었다.
“지금 오대산검과 열 개의 유명 문파들은 다섯 갈래의 길을 따라 금천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어리석은 태자 이석은 이 기회에 금황자를 지지하는 문파들을 날려버리는 중이겠지요. 자, 그럼 우리 염씨 태자님은 무엇을 하고 계실까요? 혹시 이석의 등 뒤를 따라다니며 동맹국을 철석같이 믿는 그의 뒤통수를 날려버릴 생각이 아닐는지요?”
“아니, 우리 태자 저하는 그럴 분이 아니다. 어딜 너희 오랑캐처럼 그런 의롭지 못한 행동을 할까?”
“아, 이런.”
금형권이 눈치 없이 나서자, 여태 참고 있던 목치수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뱉어냈다. 이제 기라고도, 아니라고도 못 하게 되었으니 더한 낭패가 없었다.
“아이고, 우리 덩치 큰 아재는 순진하기도 하셔라. 참으로 안타깝네요.”
어느새 기운을 차린 찬영이 턱을 괴고 앉아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과정은 자못 힘들었으나 막상 결과를 마주하자 여간 즐겁지 않았다. 모든 게 강숙부의 예측대로 돌아가는 판이었다. 그 와중에 자신이 큰 몫을 해냈다고 생각하니 절로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네, 제가 건방진 말씀을 드렸군요. 금대협께는 참으로 송구합니다. 한낱 망국의 떠돌이가 정치에 대해서 무얼 알겠습니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니 노여움을 푸십시오.”
운선은 부러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얼핏 보면 사죄 같았으나 그 속뜻이 조롱임을 아는 목치수는 수치심으로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사숙, 제가 나서겠습니다. 뒤로 물러서세요.”
“하지만,”
“명령입니다.”
이윽고 아란이 앞으로 나섰다. 목치수는 상당히 머쓱했으나 그렇다고 상전인 공주의 명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조용히 반 발자국 뒤로 물러나 형권과 나란히 섰다.
“뭐, 대강 당신 말이 맞는다고 칩시다. 오라버니가 이 주변 어딘가에서 경국 태자와 작당 모의 중이라고 치잔 말입니다. 허면 당신은 무얼 거래하고 싶은 겁니까?”
“그렇게 나오시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운선은 아란을 향해 빙그레 미소 지었다. 무표정하게 있으면 세상 냉정해 보였으나 이렇게 웃어 보이니 이만한 미남자가 없었다. 마주 보던 아란은 괜히 민망하여 눈을 살짝 피하고 말았다.
“신교의 정보망에 따르면 금황자 역시 이 원정에 참여했다 합니다. 그에게는 꽤 수많은 문파의 지지가 있으니까요. 또한, 당신들이 이석의 뒤통수를 칠 걸 뻔히 예상할 겁니다. 이러면 결국 어떤 결과가 될까요?”
“종국에는 천서국과 이금이 붙게 되겠군요.”
“그렇지요.”
아란은 그제야 이 판의 지도가 손금처럼 선명해졌다. 이금은 이석과는 됨됨이부터 다른 인간이었다. 교활하고 치밀하며 탐욕스러웠다. 멍청한 이석이야 오직 황위만이 목적이지만 이금은 그 이상을 내다볼 것이었다.
“지금 오대산검 역시 누구의 편을 드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 두 황자 모두 확신이 없을 겁니다. 하여 이석은 확실한 자기편 외에는 다 쳐내겠지요. 이금은 애매모호한 입장의 적들을 알아내는 한편 이석과 천서국까지 잡을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금을 지지하는 세력을 이석이 다 잡아버린다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이금이 가진 병력은 이석을 당해내지 못합니다. 하물며 천서국을 노린다고요? 우리를 너무 얕잡아 보는 것 아닙니까?”
아란이 발끈하여 대들었다. 그의 계획의 기저에는 애초에 천서국에 대한 무시가 짙게 깔려 있었다. 인원은 적을지 몰라도 사호세주 전부가 가담한 지금, 이석과 이금이 힘을 합쳐도 천서국에 비하면 어림없었다.
“아아, 오해입니다. 감히 천서국을 폄훼할 리가요. 이금, 이석이 데려온 병력은 고작해야 백여 명입니다. 그나마 교위들이 지휘하는 병사들은 무공이 형편없으니 사호세주 어르신들에게 한 줌도 안 되지요. 다만 이금의 뒤에 아무도 없다면 말입니다.”
“네? 그 말인즉슨,”
“네, 이금은 자잘한 문파들을 내어주어도 될 만큼 대단한 뒷배를 두고 있지요. 아마 사호세주와 겨루어도 비등할 이들입니다.”
잠자코 서 있던 목치수의 허연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들과 견줄 만한 문파는 오대산검밖에 없었다. 입장이 모호한 고대산파와 용문파를 제외하면 모두 이석의 편이었다. 헌데 이금의 뒤에 누가 있단 말인가?
“공주님, 허튼소리가 분명합니다. 저자의 농간에 휘말리면 안 됩니다.”
“일단 들어보지요.”
아란 역시 사숙의 의견에 동의하였으나 일단은 다 듣고 판단하기로 하였다. 강운선이 아무리 자신을 우습게 본다 해도 영 말 같지도 않은 허세를 부릴 듯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두타공파는 확실히 이금의 편입니다.”
“네 이놈! 우리를 아주 똥으로 보는구나!”
목치수가 더는 참지 못하고 앞으로 대뜸 나서며 일갈했다. 두타공파라니? 조양과 황제의 유착 관계는 경국의 갓난아이도 다 알았다. 이십여 년 전, 려국을 멸망시킨 그 계획이 누구의 머릿속에서 나왔는지 너무나 잘 아는 목치수였다. 그의 악랄한 속임수에 넘어가 천서국이 크게 낭패를 보았는데, 그 치욕을 어찌 잊을 수 있었을까?
“아무리 조양이 죽었다 하더라도 두타공파는 황실의 것이다. 그토록 큰 문파가 된 것이 오직 이충의 덕일진대, 감히 황제의 뜻을 거스르고 역심을 품겠는가?”
“맞습니다. 이는 우리 천서국을 기만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협상은 결렬입니다.”
아란은 잔뜩 흥분한 목치수를 돌려세웠다. 여태 강운선을 높이 평가한 자신이 한심할 지경이었다. 얼마나 우리를 우습게 보았으면 저리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댈까 싶으니 가슴에 불길이 치솟았다.
“조양은!”
돌아서는 아란의 등 뒤에서 운선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리였으나 묵직한 울림이 있었다.
“그의 제자이자 차기 두타공파의 장문이 될 백형진이 죽였으니까요.”
“뭐라고요?”
아란을 비롯하여 천서국 일행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조양을 살해한 이는 바로 강운선이 아니던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리 허언을 뱉어내는지 알 수 없었다.
“백형진은 사부를 배신하고 금황자의 배에 올랐습니다. 두타공파는 황제에게 역심을 품은 지 오래입니다. 그날, 백형진은 저를 죽일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저와 해심밀경소를 덫으로 놓아 무림을 청소할 명분을 얻기 위해서였지요. 저 또한 어리석게도 그 의중을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그 말을 어찌 믿습니까? 백형진은 스승에 대한 정이 무척 깊었다 들었습니다. 또한, 조양 역시 그리 녹록한 성정이 아니거늘 제자에게 참변을 당했을까요?”
운선의 말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는 조양을 죽일 이유가 충분했지만, 굳이 그때 죽일 필요는 없었다. 반면 백형진에게는 동기가 없었으나 대신 얻게 될 이득이 많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진술이니 믿어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지요. 다만 이 거래를 내치신다면 천서국도 결단코 위험해진다는 점을 간과하지 마십시오.”
“흥! 그 또한 네놈의 주장이 아니더냐? 어차피 이석을 제거하면 남은 것들은 쭉정이일 뿐. 혹여 두타공파가 이금을 지지하여 나선다 해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목치수는 잔뜩 고무되어 운선을 쏘아붙였다. 기껏해야 두타공파 따위 우습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틈을 노려 신교가 기습을 감행한다면 훨씬 위험하리라. 저 악랄한 마두는 그걸 노리는 게 틀림없었다.
“뭐, 두타공파만이라면 얼추 비등한 싸움이 될지도 모르지요. 허나 황석파까지 돌아선다면요? 지금 머저리 같은 고유생이 이석의 칼이 되어 고군분투하고 있으나 모두 헛짓거리입니다. 그가 베어낸 문파 대부분이 황실에 충성하는 그저 강호인일 뿐이니까요. 정작 실세인 장은은 고유생을 이용하여 이석이 망나니가 되도록 방관하는 중입니다. 이 또한 이금의 큰 그림이지요. 애초에 그는 멍청한 이석에게 망상을 심어둘 생각이었던 겁니다. 모두를 의심하도록 말이죠. 설마 천서국까지도 그의 잔악한 계획에 속아 넘어갈 생각은 아니겠지요?”
“하아, 황석파마저 이금의 편을 들 것이다? 좋아요, 당신이 다 맞는다 칩시다. 그렇다면 당신과 거래해서 얻을 게 무엇인가요? 종국에는 경국과 맞붙어 싸우게 된다는 말인데 그 승리는 오직 우리의 능력이지 당신의 도움이 아니지 않나요? 신교가 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이냔 말입니다.”
계산을 다 끝낸 아란은 이미 결단을 내렸다. 큰 나라 싸움에 진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대산검이 누구 편이든, 그들에게는 경국을 배신할 명분만 있으면 되었다. 이석을 배신하든, 이금이 등장하길 기다리든, 아군에게 딱히 손해는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거래의 조건뿐이었다.
“우리 쪽 조건은 단 하나입니다. 당신들이 싸우는 동안 신교는 내버려 둘 것. 물론 우리도 두 나라의 일에는 절대로 참견하지 않겠습니다. 또한,”
운선은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목 주변을 손으로 쓱 훑었다. 그의 손가락에 걸린 목걸이에는 같은 크기와 모양의 세 개의 구슬이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그곳은 오직 저만이 알고, 저만이 열 수 있지요. 천서국이 이상의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그곳에 있는 물건 일부를 내어주겠습니다. 이 정도 조건이면 꽤 구미가 당기지 않습니까?”
아란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것이로구나. 문을 열기 위한 열쇠는 하나가 아니었구나. 그렇다면 좀 더 조건을 깐깐하게 살펴야 했다.
“그러나 당신을 믿을 자신이 없습니다. 우리가 모른 체하는 동안 또 다른 함정을 마련해 둘지 어찌 압니까? 먼저 그곳에 가서 보물을 옮겨 놓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하여, 확실한 담보가 필요합니다.”
“역시, 공주님이라 다르십니다. 사실, 이 열쇠는 모두 합쳐 일곱, 저에게는 오직 세 개밖에 없습니다. 나머지 넷은 그때 보셨던 선운검파의 어린 선자가 가지고 있지요. 다시 말해, 저 역시 열쇠가 모두 모일 때까지 보물을 구경조차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선자를 찾아 데려오신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아란의 어여쁜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거래는 이미 성립되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