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指鹿爲馬(지록위마)
도농의 끝자락은 갈매와 이어지는 숲길이었다. 그 길목에서 운선 일행은 하루를 꼬박 보냈다. 목치수를 기다리기 위함이라고 해도 성질 급한 아란은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숙은 언제쯤 온답니까?”
“글쎄다. 무슨 일이라도 난 모양이구나.”
형권 역시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무려 공주가 인질이 되었음에도 딱히 반응이 없는 목치수의 태도는 의아하기만 했다. 이곳에서 만나자는 답신만 달랑 남기고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오라버니는 그럴 만한 인간이지.’
대의를 위해서는 그깟 누이의 희생쯤, 쉬이 감수할 자홍이었다. 누구보다 그의 성품을 잘 아는 아란은 이해가 되면서도 참담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유일한 피붙이이거늘, 고작 정쟁의 상대로만 여기는 게 여간 서운하지 않았다.
“아마 아닐 겁니다.”
“네?”
“당신의 오라비가 당신을 버린 건 아닐 겁니다.”
여태 수레에 누워 낮잠을 자던 운선이 중얼거렸다. 심드렁한 표정을 보아 위로할 의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그리 생각합니까?”
“그게 별 이득이 없으니까요. 차라리 당신을 가운데 두고 나랑 협상하는 게 훨씬 합리적이라 생각할 테지요.”
차분한 말투였으나 어쩐지 들을수록 약이 올랐다. 위로는커녕, 가족에 대한 비난이 심기를 건드렸다. 감추고픈 속사정을 들킨 것 같아 치욕스럽기도 했다.
“흥!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요. 어차피 물건은 오라비 손에 있습니다. 당신이 그 청년 둘을 되찾으려고 저를 인질로 삼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가진 열쇠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하여, 오라비는 저를 구할 이유가 없어요. 저도 싫습니다. 천서국의 대의를 위해서라면 그깟 목숨이 대숩니까?”
“음, 그게 진심이라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운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여전히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으나 입가에는 살짝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안타깝게도 그곳의 위치는 저밖에 모릅니다. 그 누구를 겁박한다 해도 답을 얻지 못할 겁니다. 이번에도 제가 알려드리지 않았다면 여기까지도 오지 못했겠지요. 또한, 저희 형제들이 가진 그것이 열쇠가 맞긴 하나,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지요. 아마 당신의 똑똑한 오라비라면 이미 눈치챘을 겁니다.”
“뭐라고요?”
어쩐지 아란은 자신의 능력을 폄하 받은 것 같아 기분이 몹시 상했다. 평생을 오라비의 그늘 밑에서 살았던 그녀이기에 마음속에는 언제나 열등감이 가득했다. 상대에 대한 불쾌한 감정 때문에 저절로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하여 나를 만나 협상하는 게 훨씬 이득이지요. 오히려 당신이 인질이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서로 인질을 데리고 있으니 등가교환 하기도 쉽고요. 일종의 믿음이 되는 셈이지요. 인질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면 기습 따위는 없을 테니까요. 아, 물론 누이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겠지요. 다만 경중을 따지자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 이, 나쁜…….”
아란의 얼굴이 홍옥처럼 새빨개졌다. 자신을 이용하려는 두 사람 모두 구역질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더 역겨운 이는, 이들 사이에서 무기력하게 끌려다니는 자신이었다.
“아주 영특하네, 영특해.”
요란한 박수 소리와 함께 나타난 무리는 그토록 기다리던 목치수 일행이었다. 세상 느긋하게 말 등에 오른 목치수의 뒤로 작은 수레를 끄는 무사 둘이 보였다. 그리고 수레 안에는 손발이 묶인 찬영과 서용이 축 늘어진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공주님, 별고 없으신지요? 너무 늦어 죄송합니다.”
목치수의 첫인상은 곡해고와 사뭇 달랐다. 젓가락처럼 삐쩍 마르고 키가 커서 움직일 때마다 갈대처럼 몸이 좌우로 휘청거렸다. 비녀를 꽂아 백발을 가지런하게 정리한 모습은 깐깐하고 침착한 그의 성정을 잘 보여주었다. 말투가 차분하고 억양에 변화가 없었는데, 아란을 대하는 태도도 다른 사형제들과 달리 깍듯하였다.
“사숙, 오라버니는 어디 가고 혼자 오셨습니까? 설마 이 무도한 자의 말이 맞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아시다시피 사신단 일정 때문에 황실 밖으로 나오기가 여의치 않으실 뿐입니다. 또한, 누이에 대한 신뢰가 깊으니 전권을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아란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납치 상황을 전달받고도 자객을 보내기는커녕, 달포가 넘도록 모르쇠 한 주제에 뜬금없이 믿음 운운이라니? 게다가 전권을 맡긴다는 말은 더 황당했다. 그들에게 가장 중한 임무는 려국의 보물을 찾는 일이었다.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누이에게 맡기고 뒤로 물러날 리가 없었다.
“교주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래, 이 청년들을 구하려고 공주님까지 납치하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목치수는 아란의 물음에 그저 웃음으로 답한 뒤, 운선을 향해 돌아섰다. 태도는 정중하였으나 어쩐지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말투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태을신교의 교주, 강운선입니다. 일전에 곡어르신과 만나 지난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번에 목어르신까지 만났으니 그저 영광입니다. 오늘 많은 가르침을 주십시오.”
“흥!”
겸손한 듯, 비아냥거리는 운선의 태도에 적잖이 마음이 상한 그는 크게 콧방귀를 뀌었다. 감히 천서국의 공주를 납치했으니 그 죄만 물어도 사형이었다. 자홍의 명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일 장을 날렸을 텐데, 더럭 짜증이 났다.
“두 아우를 돌려주신다면 귀한 공주님 또한 안전하게 보내드리겠습니다. 설마 비겁하게 아우들에게 위해를 가한 건 아닌지요?”
운선은 찬영과 서용의 상태가 내심 걱정되었다.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걸 보니 독이라도 먹인 모양이었다.
“우리 태자 저하께서 고민이 많으셨지요. 공주님의 몸값이 고작 이 정도밖에 되지 않을까? 분명 이들이 가진 가치가 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친구들이 좀처럼 입을 열지 않더이다. 뭐 별수 있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약을 좀 사용했지요.”
“독입니까?”
운선의 얼굴 근육이 점점 경직되었다. 공주를 납치한 이유는 오직 찬영과 서용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함이었다. 그 예상이 빗나갔으니 아란을 곱게 돌려보내겠다는 애초의 계획은 이미 파투가 난 셈이었다.
“아아, 공주님만 보내주신다면야 해약을 바로 드리겠습니다. 뭐, 극독은 아닙니다만 중독이 오래될수록 몸에 무리가 가기는 하겠지요.”
“그럼 아우들을 보내주시지요.”
운선은 한 발자국 성큼 나섰다. 얼핏 보면 아란과 형권을 자유로이 둔 모양새였으나 언제든 낚아챌 수 있도록 사정권 안에 두고 선 위치였다. 만약 목치수가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한다면 대번에 둘 중 하나를 낚아채어 위협을 가할 생각이었다.
“어허, 이 목치수 육십 평생 살아오면서 한 입으로 두말해 본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약속을 지켜야지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레를 퉁 하고 내리쳤다. 그들이 선 쪽이 내리막이었으나 일 장의 위력으로 순식간에 운선의 바로 앞까지 안착했다. 듣던 대로 웅혼한 내력의 소유자임이 틀림없었다.
“찬영아, 괜찮으냐?”
다른 의심을 할 겨를도 없었다. 운선은 새우 자세로 누운 두 청년을 차례로 흔들어 보았다. 맥을 짚어 보니 딱히 생명이 위태로운 것 같지는 않았다.
“이제 공주님을 보내주시면 바로 해약을 드리겠습니다.”
“그러시지요.”
운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에 선 두 사람에게 길을 내주었다. 너무 쉬이 거래에 응하자 아란은 되레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딱히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보이지 않으니 일단은 목치수가 선 쪽으로 걸어 나갔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허나 사숙, 이리 쉽게 인질을 보내주다니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오라비는 진짜 어디 있습니까?”
아란이 웅얼거리자 목치수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의롭고 용맹한 공주이긴 하나, 이 살벌한 강호에서 버티기에는 너무 순진한 여인이었다. 그에 비해 자홍의 예지력은 감탄할 만했다. 결국, 그의 의도대로 되어가니 여간 기쁘지 않았다.
“공주님, 이미 열쇠를 얻었습니다. 저 어린애들을 살려준다 한들 무슨 위협이 되겠습니까? 굳이 강운선을 자극할 필요 없으니 이쯤에서 헤어지면 그뿐입니다.”
“그렇지만.”
그러나 아란은 여전히 불안했다. 어쩐지 여유로운 강운선의 태도가 못내 꺼림칙했다. 같이 지내는 동안 파악한 그는, 음흉한 편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호락호락한 이는 절대로 아니었다.
“찬영아, 어떠냐?”
형권을 통해 해약을 받은 운선은 별 의심도 없이 아우들의 입에 탈탈 털어 넣었다. 그 행동 또한 아란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 약이 또 다른 독이라면? 이제 인질도 없는 마당에 너무 쉽게 적을 믿는 게 아닌가?
‘강운선 저자는 진정 바보인가?’
반면, 형권은 다시금 운선의 호탕한 면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비록 적으로 만났으나 그의 인품과 배포에 존경심까지 느끼고 있었다. 차후 불가피하게 싸우게 된다면 과연 악의를 품고 덤빌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흐음, 약조를 지킬 뿐만 아니라, 노부를 믿어주시니 정말 감복하였습니다. 역시 강교주야 말로 다시 없을 영웅이요, 호걸이군요.”
목치수 또한 공수하여 상대의 의로움을 칭찬하였다. 사실 강운선이 의심부터 하여 싸우자고 달려들었다면 꽤 골치 아파질 상황이었다. 헌데 그는 인질에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은 데다가 이쪽의 의중도 의심하지 않았다. 전혀 손해 볼 게 없는 그로서는 이보다 더한 호의가 없었다.
“뭘요, 저는 철저히 이익을 따져 행했을 뿐, 당신들을 전혀 신뢰하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교주께 무슨 이익이 있었습니까? 지금 드린 해약이 진짜라고 어찌 믿으십니까?”
“하하, 가짜일 리가 없지요.”
목치수의 도발에도 운선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정작 불안한 쪽은 지켜보는 아란이었다. 그녀의 사숙이라면 아무 대가 없이 해약을 내줄 리가 없었다. 허면 저것이 가짜이거나, 아니면 다른 덫을 놓아두었을 터. 강운선이 그것을 눈치챈다면 큰 싸움을 피하기 어려웠다.
“금사숙, 준비하세요.”
아란은 은근슬쩍 형권에게로 다가가 주의를 시켰다. 운선에게 무한 호의를 가진 그가 일을 그르칠까 염려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멍하니 서 있던 형권은 그제야 자세를 바로잡았다.
“으으음.”
드디어 두 청년의 의식이 돌아왔다. 몸이 뻐근한지 연신 기지개를 켜며 일어선 쪽은 윤찬영이었다. 그는 운선을 보자마자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곧 수레 바닥에 고개를 처박더니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숙부의 일을 그르친 게 영 미안한 모양이었다.
“당신들이 아우들을 온전히 돌려보낸 이유가 뭐겠습니까? 아마도 목적을 다했기 때문이지요. 혹, 이걸 찾으신 게 아닙니까?”
운선의 중지에는 어느새 동그란 구슬이 달랑거리고 있었다. 그 영롱한 사이로 露(로) 자가 선명하게 빛을 발했다.
“설마…….”
여태 자신만만하던 목치수의 낯빛이 점점 붉어졌다. 본능적으로 소매 속에 감추어 두고 있던 구슬을 꺼내 보았다. 오랜 설득과 고문으로 얻어낸 성과라고 생각했던 그것이었다. 모양과 빛깔은 완전히 같았으나 아무리 뒤집어보고 살펴보아도 글자는 없었다. 완전히 상대의 농간에 놀아났다는 걸 깨닫는 순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온몸을 휘감았다.
“네, 당신들이 뺏은 열쇠는 가짜입니다. 애초에 그쪽 태자를 만났을 때는, 나에게 진짜를 건네준 다음이었지요. 다만, 혹시라도 무도하게 목숨을 앗을까 싶어 공주님을 인질로 삼은 것이었어요. 이로써 서로 이득을 나눈 셈이지 않습니까? 어차피 남의 것이었거늘, 취하지 못했다고 해서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이, 이, 이 후레자식이!”
목치수는 차마 뛰쳐나가지는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고작 려국 떨거지들에게 당했다는 생각에 수치스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킥, 멍청한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연기력이 꽝인 나한테도 속다니 한심하구나.”
여태 어깨를 들썩이던 찬영이 고개를 들었다. 너무 많이 웃어서 얼굴은 눈물 콧물 범벅이었다. 그제야 서용도 정신을 차렸는지 꿈틀거렸다. 아무리 어지러워도 경박한 친우를 향한 구박은 잊지 않았다.
“정말 내 발가락이 연기해도 너보다는 나았을 거다. 참, 속는 게 신기하더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