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71화 (171/209)

171화. 東奔西走(동분서주)

한 차례 격전을 치른 대나무숲에 서서히 동이 텄다. 천서국의 자객들은 대부분 사살하였으나 그만큼 오대산검의 피해도 막심했다. 선운검파의 제자는 반이 목숨을 잃었으며 고대산파 쪽의 부상자도 만만치 않았다. 그나마 더 큰 피해를 막은 건, 뒤늦게 나타난 약선 윤설 덕분이었다.

“제때 피하지 못했더라면 팔을 잃을 뻔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인경을 치료하는 설이의 얼굴에는 안타까움과 반가움이 공존했다. 그의 상처는 당분간 검을 들기 어려울 정도로 깊었다. 앞으로 어떤 위기를 맞이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장문의 부상은 큰 변수가 될 터였다. 그래도 수년 전, 객잔에서 만났던 어리숙한 청년이 이토록 훌륭하게 성장했다니 감회가 남다르기도 했다.

“강대협은 어디 계십니까?”

“천서국에게서 열쇠를 지키고 있어요.”

“가은 낭자에게 열쇠가 있습니다. 아십니까?”

“네, 교주님께서 부러 남겨두었지요.”

“그러하면, 그 또한 찾으러 가야 하지 않습니까?”

목소리를 한껏 낮춘 인경의 말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만약 그 열쇠가 천서국에 들어간다면 운선의 계획이 모두 어그러질지도 몰랐다. 그들은 오대산검과는 다른 의미로 위험한 자들이었다.

“마사형이 쫓았으니 일단은 맡겨 봐야지요. 게다가 황석파도 나름 대책으로 풍림을 붙인 듯하니까요. 다친 사람들을 추스르는 일이 우선입니다.”

초조한 인경과 달리 설이는 덤덤하고 차분했다. 그 모습에 위화감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꼬치꼬치 캐물을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풍림은 어째서 필사적인 걸까?’

정작 설이가 궁금한 점은 따로 있었다. 아무리 장은의 명이라고 하더라도 몸을 사리지 않고 가은을 구하려 한 것이 의아했다. 풍림 정은률이 누구던가? 비월검의 유일 계승자이자 황석파의 내로라하는 일류 고수가 아닌가? 명성에 걸맞게 천상천하 유아독존, 거만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자였다. 그런 그가 지혈을 끝내자마자 부리나케 곡해고를 쫓아갔으니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튼, 이곳에서 오래 머물 수는 없습니다. 고개 하나 뒤에는 봉천이 있어요. 제가 수를 쓰긴 했지만, 곧 거동이 가능할 겁니다. 날이 완전히 밝기 전에 이동해야 합니다.”

“흥, 우리가 어째서 너희 신교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얼굴에 분칠한 요괴라면 문주님이 상대하시니 걱정 없다. 우리를 교란하여 함정에 빠뜨리려는 의도를 모를 줄 아느냐?”

인경과 설이의 사이를 막아선 이는 선운검파의 기정이었다. 존경하는 사저 보현과, 손가락 두 개를 잃은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모든 일이 태을신교의 교활한 노림수 때문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뜬금없이 약선이라고 나타나서 동료들을 치료해 주는 것도 다 꿍꿍이가 있어 보였다.

“이런 억지를 보았나? 우리 설이가 마음이 고와 도와주는 걸 음모라 여기다니. 네 소갈머리가 그 지경이니 손가락이 잘린 것이다. 곡해고 영감탱이가 사람 보는 눈은 있구나.”

“뭐야?”

“아이고, 좀.”

내내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 있던 적우가 나서자 분위기가 금세 험악해졌다. 설이는 몰라도 그에 대한 오대산검의 적대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당장 인경만 해도 적우와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불편했다. 하물며 영준을 비롯한 고대산파의 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낭자 덕분에 이 많은 사람을 구했으니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허나, 함께하는 것은 여기까지여야 할 듯합니다.”

“아.”

인경의 시선이 적우를 향하자 설이는 대번에 그의 의중을 눈치챘다. 아무리 운선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다 해도, 가족을 죽인 원수와 함께할 수는 없었다. 당장 검을 겨누지 않는 게 대단할 따름이었다.

“네, 저희는 이만 떠나겠습니다. 부디 무탈 하십시오.”

설이는 서둘러 인경에게 인사를 건넸다. 팔짱을 끼고 서서 눈썹을 꿈틀거리는 적우를 끌어당겨 얼른 떠날 준비를 마쳤다. 그 과정을 모두 한마음으로 노려보니 뒤통수가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후에 다시 만날 때는 적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미리 사죄드립니다.”

“고문주님, 오라버니의 은인이면 저에게도 같습니다. 비록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지만, 마음에 늘 새기고 있겠습니다.”

인경의 작별 인사에서 진심을 느낀 설이는 무언가 도움이 될 게 없을까 고민했다. 품속을 뒤져 물건을 꺼내놓으니 작은 약병과 호각이었다.

“내상을 치료하는 환약이 들었습니다. 급할 때 요긴하게 쓰일 겁니다. 그리고 호각은 언젠가 필요한 순간이 올 테니 잘 간직하십시오.”

극구 거절하는 인경의 소매 속에 선물을 쓱 넣고 나니,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태어난 곳도 다르고, 나아갈 방향이 달라도 마음을 나누고픈 사람이 있는 법이었다.

태을신교의 두 사람이 떠나고 나서야, 분위기가 한결 풀어졌다. 인경의 태도에 대해 불만인 이들도 있었으나 대체로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그만큼 힘들고 괴로운 여정이었다.

“그들의 말이 맞는다면 천서국의 자객이 뒤따라올 겁니다. 빨리 다음 거점으로 가야 힘을 모을 수 있습니다.”

여전히 투덜대는 기정을 설득하여 길을 나서는 데는 그로부터 한 시진이 더 걸렸다. 되돌아가 장문을 구하겠다 하다가, 또 신교의 뒤를 쫓아야 한다고 떼를 쓰는 모습이 제정신이 아닌 듯싶었다. 선운검파는 아군이라기보다는 짐에 가까웠다. 금호와 구의가 합쳐지는 다음 거점에서 용문파와 만나기로 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가은 낭자는 괜찮겠지요?”

“글쎄, 그래도 고수 둘이 따라붙었으니 쉬이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영준의 얼굴에 깊은 주름을 보며 인경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곡해고와의 싸움으로 얼마나 자신의 실력이 부족한지 여실히 깨닫게 되었다. 운선을 통해 내, 외공 모두 성과를 보았으나 어디까지나 이전의 실력과 비교해서였다. 앞으로 남은 수많은 고비에서 과연 문파와 동료들을 지킬 수 있을는지 불안하기만 했다.

“혼자서 짊어지려 하지 말아라. 사문을 지키는 책임은 우리 모두의 몫이란다. 혹여 무너진다 해도 끝이 아니다. 의지와 결의만 있다면 주춧돌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도 있는 것이다.”

“태사백님.”

어느새 장문의 마음을 읽은 백천이 다가와 살포시 어깨를 짚어 주었다. 그의 말이 옳았다. 그리고 강운선이 그 말을 증명하고자 고군분투하는 현장을 목격하는 중이었다. 허허벌판 위에 뒹구는 주춧돌 몇 개가 어떤 과정을 통해 기둥이 되는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했다.

‘이 결과가 또한 나의 의지가 될 테니까.’

다시금 결의를 다지는 인경은 힘껏 주먹을 쥐어 보았다. 복수에 잠식된 개인을 넘어 한 문파의 장문인으로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고개를 다시 하나 더 넘으니 길고 좁은 외길이었다. 변변한 나무가 없는 대신 길 아래쪽은 절벽과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가은을 옆구리에 끼고 달리는 곡해고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오히려 뒤따르는 진건과의 거리가 점점 더 벌어지니, 초조한 이는 쫓기는 쪽이 아니라 쫓는 쪽이었다.

‘이 아이가 대단하긴 한가 보다. 한 번 떠볼까?’

곡해고는 큰 입이 쭉 찢어지게 미소를 지었다. 고작 어린 선자일 뿐인데 신교에서 이토록 기를 쓰고 구하려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답을 듣지 않더라도 뻔히 알 만했다.

경사진 오르막길에 들어섰을 때, 곡해고는 우뚝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어차피 따라오는 이는 마진건 한 명이었다. 수적으로 몰아붙이면 모를까,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는 상대였다.

“마대협, 우리 사이에 싸워서 무엇하겠나? 오랜만에 만났으니 안부나 전하세.”

“선자를 돌려주시오.”

융통성 없는 마진건은 곡해고와 한담을 나눌 생각이 전혀 없었다. 숨이 가빠 폐부가 찢어질 것 같으면서도 시선은 오직 딸아이를 향해 있었다. 정신을 잃고 축 처진 가은의 모습에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흐음, 이 아이가 대체 뭐길래 자네가 이리 간절한 건가? 분명 신화정 당나루에서 에서 건져 올린 물건은 그 두 놈이 가진 게 아니던가? 지킬 물건이 더 있는 모양이지?”

“…….”

진건의 눈썹이 애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아무리 우직한 그라도 상대의 속셈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오히려 이 물음 때문에 곡해고가 가은을 납치한 상황이 이해되었다.

‘차라리 잘 되었다. 은이가 중요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면 함부로 죽이지 못할 터. 여기서 시간을 끌어 오대산검 고수들을 불러들여 보자.’

진건은 대답 없이 그의 창 미타를 앞으로 쭉 내밀었다. 말로는 싸울 생각이 전연 없다는 무언의 항의였다.

‘흐음, 어찌 저렇게 사람이 한결같누?’

곡해고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몇 차례 만난 적은 없으나, 마진건은 언제나 마진건이었다. 그 우직함이 독이 될 수도 흠이 될 수도 있건만, 그의 눈에는 매번 호감이었다.

“내 사람이었으면 좋았을걸. 이대로 보내기에 아쉽구나.”

혀를 끌끌 차며 읊조리는 말은 곡해고는 진심이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더 질질 끌다가는 귀찮은 놈들이 따라붙을지도 몰랐다. 아무리 천서국 제일의 자객이라 해도 수많은 고수를 한꺼번에 상대할 능력은 없었다. 바닥에 인질을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다음, 비파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디리링.

휘익!

비파 연주 소리에 맞춰 진건도 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모르는 이가 보면 음률에 맞춰 춤을 추는 것처럼 유려한 몸짓이었다. 대각선으로 휘두르는 미타의 움직임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화려한 변화도 없고 허투루 속이는 동작도 없는 정직한 일격이었다. 그러나 곡해고의 눈에는 그 어떤 이름난 초식보다도 위력적이었다.

“다들 이서문을 일컬어 강호에 다시 없을 천재요, 무공의 귀재라 했지만 나는 늘 자네가 제일이라 생각했지. 아무리 화려한 수식어를 붙여봤자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싸움판 아닌가? 그 목적을 충실히 수행하는 자네의 창법이야말로 무공의 진수가 아니고 뭔가?”

곡해고는 쉴 새 없이 줄을 튕기면서도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오랜만에 려국 땅을 밟은 탓인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어쩌면 이 여정이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양행”

그때, 또 다른 인영이 쏜살같이 날아와 그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온몸이 찔리고 베인 상처로 가득한 정은률은 그 먼 길을 달려왔는데도 숨조차 헐떡이지 않았다. 분명 아까와 같은 상대인데 기세와 살기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핏발이 선 눈에는 물기가 촉촉하여 마치 피눈물이 맺힌 것 같았다.

“허허, 세상은 넓고 인재는 많구나!”

감탄인지 한탄인지 모를 곡해고의 허탈한 웃음이 메아리가 되어 온산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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