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70화 (170/209)

170화. 凌雨(능우)

못난 얼굴과 달리 섬섬옥수로 비파를 다시 연주하니 대나무숲이 일시에 긴 울음을 뱉어냈다. 필경 스산한 가을바람 탓이었겠지만 바라보는 이들은 괜히 으슬으슬 추워지는 것이었다.

“취우”

인경은 하얀 도복을 휘날리며 적을 향해 돌진했다. 매월은 비월과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 묵직하게 공간을 잘라내는 비월과 달리, 여러 방향의 공간을 만들어내어 그 중심에 힘을 집중시키는 편이었다. 하여,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곡해고는 졸지에 전혀 성격이 다른 두 가지의 검법을 동시에 대응하게 되었다.

“능우”

“강지”

두 젊은 고수의 공격은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했다. 세찬 비처럼 쏟아지는 인경의 공격을 막으려 하면 쭉쭉 뻗쳐 들어오는 은률의 검이 코앞에 있었다. 근접전에 불리한 비파의 특성을 고려하여 적들과의 거리를 벌리려 하면 어느새 시퍼런 검기가 옷자락을 숭덩 잘라내었다.

“흐음, 이러다 크게 망신을 당하겠구먼.”

그런데도 곡해고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히죽거렸다. 움직일수록 체력이 소진될 만도 한데, 어쩐지 음률은 강해지고 박자도 빨라졌다. 그 사이사이 암기처럼 비파 줄이 치고 들어오니 간담이 서늘해지는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태사백님, 과연 문주님께 승산이 있을까요?”

넘어진 가은을 일으켜 앉히면서도 영준의 눈은 세 사람의 싸움판에 고정되어 있었다.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일취월장했지만, 장문은 저렇게 강한 고수와 대결해 본 경험이 없었다. 하물며 저자는 검귀 성곤마저 이긴 적이 있다는 전설의 자객 곡해고가 아닌가? 그의 비파 줄이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온몸에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쉽지 않겠구나. 풍림은 너무 지쳤고, 인경은 아직 미숙해.”

“하아, 그럼 어찌합니까? 우리가 수적으로 우세하니 일시에 공격해 볼까요?”

그러나 백천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오히려 방해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방어선을 구축하여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준은 불안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숲의 어둠은 더 빠르고 짙어, 어느덧 주변이 어두컴컴했다. 하나둘 횃불을 들어 군데군데 밝혀보았으나 검은 하늘에는 허옇고 푸른 검기만 실처럼 얽혀 있을 뿐, 싸움의 추이도 지켜보기 어려웠다. 당장 도와주려 해도 누가 누구인지 구별이 힘들었다.

챙!

그때, 굵은 검날이 반 토막이 되어 바닥에 박혔다. 은률의 검이 결국 내력을 견뎌내지 못하고 부러진 것이었다.

“이런, 전세가 기울었다.”

백천의 거무튀튀한 얼굴이 순간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애써 균형을 이루던 무게중심이 무너졌으니 곡해고가 그 틈을 노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디링!

휙!

“으악!”

아니나 다를까,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인경의 인영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도포 자락 왼쪽은 온통 핏물이었다.

“문주님!”

영준을 비롯한 고대산파의 제자들이 순식간에 인경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에게는 장문이기 이전에 생사를 함께하는 동지요, 문파를 다시 일으킬 기둥과도 같은 존재였다. 여차하면 인간 방패가 될 생각으로 둘러서니 완벽한 방어막이 되었다.

챙!

다시 한번 귀를 찢는 소리가 온 숲에 울려 퍼졌다. 명치를 향해 날아오는 현을 간신히 막아낸 은률의 앞섬은 가슴에 입은 자상으로 붉게 물든 채였다. 더 싸워봤자 소용없었다. 누가 봐도 곡해고의 완승이었다.

“자, 그럼 이제 누가 나와 싸워볼 텐가?”

“으음.”

모두 병장기를 들고 있었으나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가장 뛰어난 실력의 두 고수가 나가떨어진 상황에서 누군들 저 괴물을 상대할 수 있겠냐는 생각이었다. 그저 촘촘하게 방어벽을 만들어 서로서로 방패가 되어주는 것, 그것이 유일한 비책이었다.

“너무 지체되었군.”

곤란하기는 곡해고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이기기는 하였으나 체력 소모가 너무 심했다. 또한, 예상외로 두 젊은이의 검법 실력이 출중하여 작지 않은 상처를 입은 터였다. 당장은 남모르게 숨길 수 있을지 몰라도 또 다른 고수가 나타난다면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곧 도우려고 올 줄 알았던 봉천도 감감무소식이니 슬슬 걱정도 되었다.

“저 아이를 넘겨주면 너희들 목숨은 살려주지.”

“뭐야?”

“정대협, 기다리시게.”

흥분하여 달려드는 은률을 막아선 이는 백천이었다. 가은을 흘끗 내려다보니 그저 평범한 선운검파의 제자일 뿐, 특이점이 없었다. 그런데 왜 곡해고가 저리 집착하는 것일까?

“소저,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겁니까?”

“네?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제발 살려주세요.”

가은은 겁에 질린 얼굴로 백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아무렴, 고인경과 같은 인물이 자신을 버리겠냐 싶으면서도 고대산파 제자들의 원망 어린 눈을 바라보는 게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게다가 은률마저 부상 때문에 옴짝달싹 못 하니 불안한 마음은 더욱 커졌다.

“태사백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사람을 지켜야 합니다. 천서국에 넘겨주면 안 됩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인경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그는 가은과 강운선과의 거래를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여, 그녀가 가진 것이 그곳을 여는 열쇠이며 천서국 또한 그것을 노리고 있음을 눈치챘다.

“허나, 곡해고의 손아귀를 벗어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구나.”

“아무리 그래도 저 늙은이 혼자 이 많은 인원을 감당하겠습니까?”

영준이 끼어들어 낙천적인 전망을 해보았다. 백천의 노파심일 뿐, 인원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하니 아무리 천서국 최고의 고수라 해도 충분히 막으리라 짐작했다.

“그래, 어디 해보자. 매월 검진을 만든다.”

젊은 제자들의 얼굴을 확인한 백천은 다시금 용기가 솟아올랐다. 선자를 내어주고 목숨을 구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제 한 목숨 구하겠다고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것만큼 졸렬한 행위는 없었다. 적어도 고대산파의 제자라면 의와 협을, 사람으로 해야 할 도리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일종의 다짐이기도 했다.

“정대협, 가은 낭자를 데리고 먼저 떠나십시오. 이곳은 고대산파가 최선을 다해 막아보겠습니다.”

“고문주…….”

첫인상이 좋지 못했던 두 사람이었다. 그를 죽이겠다고 달려들었던 과거가 부끄러워진 은률은 차마 고맙다는 말도 전하지 못하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재회할지 모르는 인간사거늘, 제 지위만 믿고 함부로 까불었으니 수치스러울 뿐이었다.

“흐음, 그래봤자 내 손바닥 안이지.”

고작 손짓 한 번이었다. 깜깜한 숲에서 푸른 도깨비불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을 하얗게 분칠한 십수 명의 흑의인은 누가 보아도 천서국의 자객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어깨에는 저마다 하나씩 선운검파의 여제자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랬다. 애초에 곡해고는 이 숲에서 누구도 살아나가게 할 마음이 없었다.

“설마 나 혼자 왔을까?”

비월과 매월을 한자리에서 겨뤄 볼 기회를 누리고 싶었을 뿐, 진작에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고대산파와 멸악문의 연합 조 스물이 힘을 합해야 곡해고 하나를 막을까, 말까였다. 여기에 또 다른 지원군까지 나타났으니 그나마 가졌던 용기조차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다시 기회를 주겠다. 저 아이를 내어주면 너희들은 그냥 보내주지. 어떠냐?”

“곡해고, 네 이놈!”

일갈하는 은률과 달리, 고대산파 제자들의 분위기는 아까와 사뭇 달랐다. 게다가 그들의 반은 멸악문의 제자였다. 더는 죽음의 문턱을 들락거리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난생처음 만난 선자 하나 때문에.

“참으로 졸렬하구나!”

어둠 속에서 우렁찬 고함이 들리더니, 거대한 인영 두 개가 저 멀리서부터 성큼성큼 다가왔다. 앞선 이는 키가 칠 척이 넘어 보였는데 긴 머리를 풀어 헤치고 키보다 큰 창을 한 손에 쥔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바로 뒤에 선 이는 머리를 질끈 묶은 부리부리한 이목구비의 사내였다. 반 토막으로 잘린 도를 마치 아이를 업듯 등에 메고 있었는데, 그 독특한 특징 때문에 자리에 있는 모두는 단번에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마진건, 그리고 적우…….”

그를 알아본 인경의 얼굴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수년 전 그날로부터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었던 두 사람. 고대산파의 장문이자 숙부인 고근동을 단칼에 베어 죽이고, 일곱 장로를 무참히 살해한 이들.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해보았다.

“아주 귀찮게 됐군.”

물론 곡해고 역시 두 사람을 모르지 않았다. 이제 위태로운 쪽은 오히려 자신이 되었으니 슬슬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이라도 봉천이 나타나지 않는 한, 혼자서는 이 많은 고수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흠, 어찌한다?’

곡해고가 주춤하는 사이, 마진건은 딸아이의 상태를 급히 살펴보았다. 온몸이 흙투성이에, 뺨이 심하게 부어올라 있었으나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는 모양이었다. 가은의 안전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쿵쾅거리던 심장이 잠잠해졌다.

“내 오대산검 놈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없다만, 천서국 따위가 설치는 꼴을 보는 건 더 싫단 말이야. 게다가 운평에서의 원한도 있으니 끼어들지 않을 수 없지.”

행덕을 손에 쥔 적우의 온몸에 살기가 가득 올랐다. 운선의 당부와 달리 그는 이제 신교의 일을 방해하는 이들이라면, 보이는 족족 죽일 생각이었다. 상대의 신분도, 실력도 개의치 않았다. 죽이려다가 본인이 죽더라도 상관없었다. 작전이고 나발이고, 더는 관망만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흥! 어디 얼마나 대단한지 겨뤄 보자꾸나!”

“좋다!”

도발을 기다렸다는 듯, 적우가 왼발로 바닥을 세게 굴렀다. 몸이 붕 뜨는가 싶더니 단박에 노송의 가지 위로 올라서자 곡해고가 올라선 나무와는 고작 한 장 거리였다.

딩, 딩, 딩, 딩, 딩

쉭!

적우가 중심을 잡기도 전에 연주가 시작되었다. 아까와 달리 곡조가 없이 손가락을 다섯 번 튕긴 것인데 묘하게 어우러져 하나의 노래처럼 들렸다. 그러나 적우는 그것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줄을 튕긴 수대로 다섯 개의 가느다란 철편이 날아오니, 마치 꼬리가 긴 별과 같았다.

챙, 챙, 챙, 챙, 챙

현란한 손놀림으로 다섯 개의 암기를 모두 쳐내니 허연 비파 줄은 방향을 잃고 바닥으로 모두 고꾸라졌다.

“고작 이 정도로.”

“그럼 이것도 막아보아라!”

다음은 좀 더 느리고 길게 네 번을 튕겨냈다. 양팔의 척택(尺澤), 양다리의 위중혈을 노린 것인데, 서 있는 자세에서는 쉬이 막기 어려운 위치이기도 했다.

“어림없지.”

적우는 도를 직접 휘둘러 막는 대신 밟고 있는 나무의 가지를 거칠게 쳐냈다. 그 탓에 푸른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니 가을바람을 타고 주변을 한껏 어지럽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아내리니 처음 뛰어올랐던 자리로 되돌아온 셈이었다.

“어리석은 놈!”

두 번의 공격을 수월하게 막아낸 적우가 의기양양하게 너털웃음을 터뜨렸을 때였다. 여태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던 천서국의 자객들이 불시에 이쪽으로 몸을 날리는 것이었다. 당황한 고대산파의 제자들이 서둘러 진을 만들었으나 캄캄한 어둠 속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그 틈을 뚫고 소름 끼치는 바람이 훅 불어닥쳤다.

“아악! 사, 살려…….”

미처 비명도 다 지르지 못한 채로 가은의 몸이 공중으로 버쩍 들렸다. 뒤늦게 옆에 섰던 은률이 검을 휘둘렀으나 되레 곡해고의 일 장에 가슴을 맞고 말았다. 부지불식간에 가은을 등에 업은 그가 다시 땅을 박차고 오르니, 어느새 노송의 가지 위였다.

“못 간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곡해고를 쫓아 제일 먼저 몸을 날린 이는 마진건이었다. 옆을 막아선 흑의인 둘을 일격에 두 동강을 내고는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는 오직 축 늘어진 딸아이만이 들어왔다. 자식을 구하고자 하는 부정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이 자리에 그 누구도 없었다.

*** 능우(凌雨):

세차게 쏟아지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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