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旱天慈雨(한천자우)
가은은 곡해고의 검고 깊은 눈을 보면서 난생처음 무기력함을 느꼈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불투명한 눈. 아무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일가견이 있는 가은이지만, 감정을 느끼지 않는 짐승에게는 전혀 효용이 없었다. 바로 곡해고가 그러했다.
“버틴다고 달라지겠느냐?”
“차라리 저를 빨리 죽여 버려요. 이러다가 우리 자매들을 다 놓치겠어요. 어르신이 원하는 게 저 하나는 아니잖아요?”
바들바들 떨면서도 눈에 바짝 힘을 주었다. 뭐라도 믿는 구석이 있어 보여야 시간을 끌 수 있으리라는 계산속이었다. 그 수가 먹혔는지 곡해고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아주 발칙한 아이로구나. 사형제들을 팔아 목숨을 구해볼 요량이냐?”
“저를 붙잡아 두는 게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는 거지요. 무슨 협박과 회유를 하셔도 전 모릅니다.”
이대로 시간을 좀 끌다 보면 상대의 허점이 보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사람일진대, 하다못해 어리고 불쌍한 아이에게 측은지심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그 작은 희망이 유일하게 남은 동아줄이었다. 그러나,
짝!
무자비한 손찌검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격에 가은은 날개가 찢긴 나비 마냥, 팔랑팔랑 바닥에 쓰러졌다. 하얗고 작은 얼굴에는 붉은 손바닥 자국이 선명했다. 점점 푸르러지는가 싶더니 금세 퉁퉁 부풀어 올랐다.
“다음번엔 네 그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망가뜨려 주겠다.”
“으으.”
입술이 찢기고 피가 배어 나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가은을 지배하는 것은 통증이 아니라 공포였다. 저 늙은이의 말대로 다음번에는 얼굴이 무너질지도 몰랐다. 다음 방도를 찾아야 하는데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두려움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아, 귀찮다.”
곡해고의 손이 다시 한번, 하늘로 솟구쳤다. 이번에는 코를 뭉개줄 작정이었다. 숨이 턱턱 막힐 때까지 맞다 보면 뭐라도 말을 뱉어내겠지. 어린 선자를 때리는 일이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인내심이 크지 않은 편이었다.
휙!
퍽!
손에 맞은 것은 가은의 얼굴이 아니었다. 급한 김에 내던진 은률의 검 자루가 곡해고의 손목을 세게 내리치고 바닥에 떨어졌다.
“네 상대는 나다!”
“아아, 오라버니…….”
드디어 자신의 편이 왔음을 깨달은 가은이 고개를 들었다. 맑은 두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안 그래도 퍼렇게 멍이 든 얼굴이 안쓰러운데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을 보니 은률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은아, 괜찮으냐? 늦어서 미안하구나.”
소소정이 워낙에 경계하는 바람에 온수 초입에서 일행을 놓친 것이 패착이었다. 뒤늦게 대나무 숲길을 달려왔으나 그가 마주한 것은 선유당 제자들의 처참한 시신이었다. 그리고 그 흔적을 만든 이가 봉천이라는 사실을 알아내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소소정과 봉천이 서로에게 집중하는 사이, 은률은 다시 고개를 내려와 에움길을 찾아냈다. 한참을 돌아왔으나, 가은이 크게 다치기 전에 만났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건 또 누군가?”
시큰한 손목을 툭툭 털며, 곡해고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무리 불시에 받은 공격이라고는 하나 실로 오랜만에 입은 타박상이었다. 하여 노여움보다는 궁금함이 앞섰다.
“강지”
은률은 곡해고와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 월등한 실력의 상대를 정당한 대결로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최대한 정신없이 몰아쳐 잠깐의 틈을 만드는 것. 지금으로서는 그가 노려볼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통성명도 없이 다짜고짜 덤비는 은률을 보며 곡해고는 못생긴 입술을 실룩샐룩 움직였다. 하긴, 서로 예의를 갖춰 무슨 소용이 있으랴? 어차피 곧 죽일 상대에게 관심을 둘 이유가 없었다.
디링!
챙!
묵직한 검기가 뻗어오자 곡해고는 본능적으로 비파 줄을 튕겼다. 마치 거미줄처럼 진득하게 늘어난 줄이 반원을 그리며 상대의 검에 명중했다. 큰 힘을 들이지 않은 일격이었으나 은률은 뒤로 한 장이나 물러서고 말았다.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
고작 서너 합을 부딪쳤을 뿐인데 온몸에 땀이 범벅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이번에는 팔을 위로 쭉 뻗어 손목을 가볍게 돌렸다. 단전에 모인 기운을 사지로 보내니, 곧 검 주변으로 푸른 검광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왔다.
“천균”
왼발을 구르며 바닥을 치고 오르자 단숨에 몸이 상대의 코앞까지 튕겨 나갔다. 위에서부터 수직으로 내리꽂는 힘에는 5할 이상의 내력이 담겨 적중한다면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으리라. 힘찬 기합 소리와 함께 팔을 크게 휘둘렀다.
“흐음, 이제 알았다.”
회심의 일격이었던 천균의 초식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그 찰나의 순간에도 곡해고는 여유 있게 몸을 빼내 다음 바위로 내려앉았다. 비파 줄을 어루만지며 발을 까딱거리는 양이 영락없는 떠돌이 악사의 모습이었다.
“네놈이구나. 비월의 진짜 주인. 어쩐지 그놈은 촐싹거리고 허세가 가득한 게 영 미덥지 않았지. 부능파가 아무리 얼간이라도 그리 허투루 내전 무공을 전수할 리가 없지.”
팔짱을 끼고 앉은 곡해고는 말을 거는 건지, 혼잣말인지 모르게 한참을 웅얼거렸다. 누가 보면 싸움의 당사자가 아니라 관전자와 같은 태도였다. 반면, 은률의 얼굴에는 낭패감이 가득했다. 예상했다고는 하나, 회심의 일격이 수포가 되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정말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덤벼야 할 것 같았다.
“양행”
은률은 제대로 쉬지도 않고 다음 초식을 준비했다. 왼손에는 진헌신장을 오른손에는 검기를 모아 단번에 몰아붙일 작정이었다. 체력도 내력도 상대에게 못 미치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속전속결이 묘수가 될 수 있었다.
“오호, 재밌는 초식이구나.”
곡해고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오랫동안 적수를 만나지 못했던 차에, 비월검의 정통 전수자가 나타났으니 이보다 더 즐거울 수가 없었다. 되레 은률과 싸우느라 본래의 목적인 가은을 잊은 듯싶었다.
챙
챙
챙
좌우를 가르는 검기가 수십 개의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어느덧 어둑해진 숲 사이로 푸른 물결이 요동치는 모습은 가히 절경이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검날을 다 막아내면서도 곡해고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아, 이 초식을 비월검으로 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고 보니, 신교의 그 앙큼한 사내 녀석이 여간 괘씸하지 않았다. 무학을 사랑하고 아끼는 그로서는 완벽한 비월검법을 보고픈 열망이 있었으므로.
“얘야, 아쉽지만 그깟 평범한 검으로는 비월의 아름다움을 담아낼 수가 없구나. 이제 슬슬 지루해지니 장난질은 그만둘까?”
십여 합이 더 지나자 곡해고가 크게 하품을 했다. 내들 왼손으로 한 줄씩 툭툭 튕기며 검기를 막더니만 모처럼 양손을 모두 소매 밖으로 내밀었다. 앉은 자리도 불편했는지 엉덩이를 들썩거리더니만 이내 공중에서 크게 몸을 한 바퀴 돌렸다. 단번에 큰 나무 위로 올라앉았는데, 상대와 충분한 거리를 벌리기 위함이었다.
디리링!
‘아뿔싸!’
은률의 검이 미처 따라가기도 전에 곡해고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처량 맞은 음률이었으나 점차 빠르고 화려하게 변주되었다. 신기한 것은 아까까지도 그저 뚱땅거림에 불과했던 비파의 선율이 점점 귀를 파고들어 마음을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욱!
한 곡조가 끝나는 순간, 가은은 구역감을 참지 못하고 바닥에 울컥 뱉어냈다. 붉은 선혈이었다.
“은아, 귀를 막아라!”
그러나 은률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평소라면 몰라도 내상을 치료한 지 고작 반년도 넘지 않은 터였다. 곡해고의 웅혼한 내력이 가득 담긴 곡조를 감당할 몸 상태가 아니었다.
‘적어도 은이는 살려야 한다.’
이 와중에도 그의 바람은 단 하나였다. 언제부턴가 그녀를 지키는 일이 사명이 되었다. 애정인지 집착인지 모를 감정이었으나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강지”
파훼법이 따로 없는 적의 공격에 무작정 일격을 내지르고 보았다. 남은 내력을 끌어모아 검에 실으니 감당할 여력이 없는 그것이 바르르 몸을 떨었다. 아마도 십여 합을 버티기 어려울 듯싶었다.
“기본기도 좋고 내력도 나쁘지 않구나. 무엇보다 투지가 좋아.”
곡해고는 여전히 흐뭇한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은률의 화려한 검무를 감상했다. 그러면서도 연주 중간중간에 줄을 튕겨내어 상대의 접근을 차단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기실 싸움이 아니라 시험이었다. 적당히 대응할 수 있을 정도의 공격을 가하면서 연신 감탄사를 뱉어내는 중이었다.
‘도망가야 해.’
곡조가 잔잔해지는 틈을 타, 가은은 슬슬 도망칠 준비를 했다. 바닥에 배를 납작 엎드리니 작은 몸이 얼추 가려졌다.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여전히 속이 울렁거리고 관절이 뻐근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여기서 살아남아야 훗날이 있고 복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죽음을 맞이하기에 자신은 너무나 고귀하고 대단한 존재니까.
“허허, 배은망덕한 아이로구먼. 어디 빠져나갈 수 있을지 보자.”
그러나 곡해고 역시 가은을 잊지 않고 있었다. 왼손 소지로 줄 하나를 튕기니, 얇은 현이 둥글게 휘어지며 쏜살같이 날아갔다. 바로 가은의 팔을 향한 일격이었다.
“은아!”
“아악!”
은률이 눈치챘을 때는 이미 어깨에 다다른 뒤였다. 이제 와 가은이 몸을 비틀어 피한다고 해도 팔목 아래는 잘릴 터였다. 아니, 차라리 팔 하나를 내어주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목숨을 구할 것도 같았다.
챙!
“어허, 너는 또 누구냐?”
아슬아슬하게 가은의 앞을 막아선 검은 누가 보아도 그 유명한 하현이었다. 채찍처럼 얇은 검날은 곡해고의 비파 현을 가뿐하게 잘라내었다. 그리고 그 주인은 이제 막 약관의 나이에 이를까 말까 한 어린 도사였다.
“고문주님?”
“괜찮으십니까? 다친 데는 없고요?”
인경을 바라보는 가은의 눈에는 신뢰와 고마움이 가득했다. 황석산에서 만난 이후, 이리 가까이 보는 건 처음이었으나 마치 오랜 친우처럼 반갑고 든든했다.
“고대산파의 장문 고인경이 곡대협을 뵙습니다.”
인경은 가은의 상태가 이상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적을 향해 돌아섰다. 정중하게 읍하는 그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호감이었다. 게다가 과거 매월 신양선과 겨뤄본 적이 있던 곡해고였다. 고작 한 초식이었으나 매월 검법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경국에는 젊은 고수들이 참으로 많구나. 내 오늘은 오랜만에 최선을 다해야겠다.”
어느덧 그는 수십의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애초에 일을 빠르게 수습하려던 계획은 틀어지고 만 셈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 위축될 곡해고가 아니었다.
“자, 인사는 이쯤하고 다시 시작해볼까?”
디리링!
*** 한천자우(旱天慈雨):
가문 하늘에 자애로운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