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激而行之(격이행지)
아무리 봉천이라고 해도 독성이 다른 두 가지의 독을 당했으니 쉬이 회복하기 어려웠다. 고개를 넘어가는 길목에 앉아 운기조식을 하는 그의 얼굴에 땀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독한 놈, 길을 비켜라!”
그를 향해 천천검을 겨누고 있는 소소정도 상황이 나쁘기는 마찬가지였다. 암기를 수차례 쓰고도 실력 면에서 도저히 봉천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크고 작은 부상으로 온몸은 피투성이였고 심지어 일 장을 비껴 맞아 기혈이 뒤틀린 상태였다. 여기서 무리하면 큰 부상이 될 것 같아 차마 내력을 끌어올리지도 못했다. 내상을 치료할 시간이라도 벌어야 하건만, 언제 상대가 달려들지 모르니, 검을 거둘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급한 건 내가 아니지. 곡형님이 앞에 있으니 네 제자들은 모두 죽은 목숨이다. 나야 한두 시진이면 회복할 테니 네 목숨 역시 풍전등화나 다름없지. 그때까지 유서라도 한 장 남겨놓는 건 어떠냐?”
한숨 돌린 봉천은 일부러 소정의 속을 박박 긁어보았다. 화가 나서 이쪽으로 달려든다면야 일 장을 날려 죽여버리면 되고, 참는다고 해도 시간을 버는 일이니 손해 볼 게 없었다. 심심하던 차에 붉으락푸르락 낯빛이 변하는 상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꽤 재미있었다.
‘저 망할 놈이 부러 약을 올리는구나. 달려든다고 해서 유리할 리 없고, 이대로 시간을 보내도 필패다.’
소소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정작 목적지에 이르지도 못해서 서이국의 자객 놈들한테 죽다니 수치스러울 따름이었다. 차라리 이럴 바에는 태을신교와 일전을 벌이는 게 더 나을 듯싶었다. 적어도 사문을 위해 장렬하게 희생했다는 명예라도 남을 터, 이대로 끝난다면 결과는 멸문이었다.
휘이익!
그때, 맑은 피리 소리가 대나무숲을 은은하게 울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곡조를 듣고 있자니 들끓던 기혈이 가라앉고 싱숭생숭했던 마음이 편안해졌다.
‘설마…….’
문득, 소정의 머릿속에 음률로 내상을 치료한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정도의 의학적 지식과 재능을 겸비한 인물은 강호에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또 다른 불편한 상대가 나타났음을 깨달았다.
“어라? 이게 누구신가? 그 유명한 사호세주의 지국천왕이 아닙니까? 와, 듣던 대로 충격적인 모습이네요.”
말에서 풀쩍 뛰어 내려온 이는 예상대로 윤설이었다. 그 뒤에는 거대한 창을 든 우락부락한 사내와 커다란 도를 등에 멘 이도 함께였다.
“마진건…….”
소소정은 진심으로 죽고 싶었다. 매정하게 돌아서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렇게 초라한 꼴로 다시 만나니 견딜 수 없이 창피했다. 그렇다고 착잡한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일부러 무표정하게 봉천을 응시할 뿐이었다.
“설마, 독에 당한 거예요? 실망인데요?”
“네년은 누구길래 알짱거리느냐? 썩 꺼져라!”
앙칼지게 쏘아붙였지만, 다시 스멀스멀 독기가 올라와 온몸이 바스러지는 것 같았다. 그나마 이들이 오대산검의 편을 들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어 다행이었다. 일전에 적우와 마진건을 모두 상대한 경험이 있었으므로, 그들의 정체가 태을신교라는 사실을 이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당신네 대단하신 태자 저하가 어디 있는지 말해주면 해독도 해주고 저 얄미운 여자에게도 골탕을 먹여 줄게요.”
‘흐음, 역시 그랬군. 아직 목형님의 행방을 찾지 못한 모양이구나.’
설이의 물음으로 봉천은 한층 의기양양해졌다. 불리한 상황인 것은 변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상대의 의중을 알았으니 거래를 해볼 만했다.
“만약 싫다면?”
“저는 해독에도 뛰어나지만, 중독에는 더 자신이 있지요. 지금보다 몇 곱절 괴로움을 느끼시려거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솔직히 저희는 손해 볼 게 없어요. 태자가 어디 있든, 그들도 종국에는 우리 교주님을 만나야 할 텐데요, 뭘.”
“그건…….”
과연 윤설의 말이 맞았다. 천서국의 입장에서는 강운선이 지도 그 자체이자, 열쇠였다. 붙잡은 인질에게 열쇠가 있다고 한들, 장소를 아는 이는 오직 한 사람이었다. 어차피 한 번은 만나야 싸워보든, 협력하든 결정을 할 수 있었다.
“설아, 저 분칠한 요괴 따위에 왜 집착하느냐?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자.”
봉천의 고민이 길어지자, 보다 못한 적우가 불쑥 끼어들었다. 앞에 있는 두 사람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 그였다. 어느 쪽이든 도와주고 싶지 않으니 아예 상종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아아, 알았다. 알려주마. 그럼 우선 나를 좀 도와다오.”
“제가 당신을 어찌 믿고요? 여기 흙바닥에 적어주시면 저도 동시에 해약을 드리지요.”
“오냐, 그렇게 하자.”
봉천에게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어차피 이 앞을 쉬이 지나치지는 못할 터였다. 바로 한 고개만 넘으면 곡해고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판단에 따라 이들의 생사가 결정될 테니 자신이 책임질 이유가 없었다.
“멍청하긴, 진짜 거래를 할 요량입니까?”
“뭐?”
봉천이 바닥에 두 글자쯤 적었을 때였다. 초조해진 소소정이 급작스럽게 끼어들자, 적우가 신경질적으로 돌아보았다. 당장이라도 목을 벨 것처럼 행덕을 손에 들고 성난 눈썹을 꿈틀거렸다. 반면 마진건은 여전히 등지고 선 채로 요지부동이었다.
“왜 저만 여기 남아 이 자를 상대했겠습니까? 그건,”
“그야, 훌륭한 장문인 양 위선을 떨기 위해서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적우가 가시 돋친 말을 툭 뱉어냈다. 저 여우가 또 어떤 감언이설로 형님과 설이를 홀릴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소소정은 적우 따위는 우습다는 듯,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 의도가 무슨 상관이겠어요? 저자가 왜 나만 남기고도 이리 여유만만하게 운기조식이나 하겠냐는 뜻입니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설마,”
그제야 눈치를 챈 설이와 진건이 소소정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이 맞는다면 지금 이리 한가롭게 봉천을 설득할 때가 아니었다.
“이 고개를 넘으면 곡해고가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멍청하게 그것도 모르고 제자들을 보냈으니 피를 토할 일이 아닙니까?”
“그럼, 가은이도?”
여태 무심하던 마진건이 부리나케 다가와 소정의 어깨를 붙잡았다. 부릅뜬 두 눈에는 두려움과 걱정이 가득했다.
“당연하죠. 그, 그런데 당신이 왜 그 아이를 걱정하는 거죠?”
“제길.”
마진건은 소정을 거의 내팽개치듯이 던져놓고는 쏜살같이 바위 너머로 사라졌다. 마치 실성한 듯한 그의 모습에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 오직 설이만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봉천을 향해 돌아섰다.
“약속은 약속이니 해독제는 드리겠습니다. 두 개의 독이 충돌하였으니 무리하게 운공 하였다가 내력의 3할 이상을 잃을 수도 있어요. 앞으로 두 시진은 더 운기조식하며 지켜보다가 조금씩 기를 돌려 보십시오. 단전에 어혈이 없을 때 비로소 해독된 것입니다.”
“흥!”
얕은수를 쓰려다 들킨 봉천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래 봬도 비겁한 짓은 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어쩐지 소인배가 된 것 같아 기분이 몹시 상했다. 바닥에 놓아둔 해독제를 본 체, 만 체하고는 아예 등을 돌려 버렸다.
“소문주님, 우리 사이에 도움을 주고받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요. 그러나 과거의 인연이 있으니 굳이 원망을 풀어내지도 않겠습니다. 여기 금창약이 있어요. 마지막 선물이라 생각하시고 받아두세요.”
여기까지 말하고는 소정에게 한 발자국 성큼 다가섰다. 그리고는 봉천이 결코 들을 수 없는 작은 소리로 웅얼거렸다.
“저자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해독약을 먹으면 앞으로 두 시진은 꼼짝 못 합니다. 제가 여로(藜蘆)를 약간 섞었거든요. 몸에 마비 증상을 일으키는 독초이니, 아무리 봉천이라도 쉬이 회복하지 못할 겁니다. 그때 빠져나가십시오.”
“…….”
소정은 너무 수치스러워 차마 감사 인사도 하지 못했다. 태을신교와는 내내 악연이었다. 그리고 그 시작도 끝도 자신의 욕심 때문이었다. 아무리 낯짝이 두꺼워도 그 정도 양심은 아직 남아 있었다.
“설아, 그만 가자. 인간 같지도 않은 자들과는 말을 섞는 게 아니다.”
“예에.”
적우의 재촉에 발을 옮기는 설이의 시선에는 여전히 두 사람이 있었다. 이대로 가는 게 과연 맞는지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한 눈치였다. 하여, 마지막으로 봉천을 향해 한 마디 덧붙였다.
“해독약을 먹지 않으면 앞으로 반나절은 더 고통에 시달릴 겁니다. 지금쯤 열결(列缺)이 불에 덴 듯이 아프지 않나요? 통증이 팔목을 타고 올라가지 않도록 정신 똑바로 차리십시오. 아휴, 끔찍해.”
“흥! 이게 독인지 약인지 어찌 알고?”
두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봉천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실제로 설이의 말처럼 손목의 바깥쪽부터 따끔따끔 통증이 시작되었는데, 조금씩 강도가 심해지면서 화상을 입은 것처럼 뜨거워졌다.
‘이를 어찌한다?’
사실 세상에 다시 없을 무공 귀재인 봉천에게도 단 하나, 심각한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통각의 역치가 매우 낮은 점이었다. 몸을 금강불괴로 만드는 일이 평생의 꿈일 정도였다. 하여, 설이의 끔찍한 통증의 예고는 봉천에게 엄청난 공포심을 심어준 셈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화기가 팔꿈치까지 이르렀을 때, 더는 참지 못하고 해약을 입속에 털어 넣었다. 쓰고 진득한 액체가 목구멍으로 꿀꺽꿀꺽 넘어가자 신기하게도 마음이 평온해지고 긴장이 완화되었다. 일각이 지나자 가슴 속이 시원해지면서 불에 덴 것처럼 따끔거리던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으니 그야말로 명약이 따로 없었다.
‘태을신교의 일곱째를 약선, 약선하더니만, 허명이 아니었구나.’
약효를 톡톡히 본 봉천은 생전 처음 본 윤설에게 고마움을 넘어 존경심마저 느끼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만은 꼭 한 번 살려줘야겠다, 뜬금없는 다짐도 해보았다. 그리고,
“어라?”
금창약을 바르면서도 봉천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소소정은 드디어 기회를 맞이했다. 약을 털어 넣은 봉천이 고작 한 식경도 되지 않아 바닥에 대(大) 자로 뻗어버린 것이었다. 방금까지도 자신을 죽이겠다고 살기를 내뿜던 적이 세상 평온하게 곯아떨어졌으니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기가 막혀 헛웃음이 다 나왔다.
‘지금이 기회다.’
소정은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그쪽으로 다가섰다. 허연 분칠이 반쯤 벗겨진 봉천의 얼굴은 마치 갓난아이처럼 평온하기만 했다. 귀를 기울여보니 그르렁그르렁 코까지 골고 있었다. 목덜미에 칼을 꽂아 넣는다고 해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리라.
‘이놈을 살려두었다가는 후환이 될 터, 이참에 죽여버리자.’
소정은 들고 있는 검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물론 한 문파의 장문으로서 잠든 사람에게 수를 쓰는 게 얼마나 비겁한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이 약육강식의 바닥에서 허튼 정의감과 양심 때문에, 망설이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있을까?
슥!
“히익!”
그때, 산등성이로 넘어가는 햇빛에 소정의 검 천천이 반짝 빛을 발했다. 그 덕에 잘 닦아 반질반질한 검날에 소정의 얼굴이 적나라하게 반사되었다. 탐욕에 일그러진 짐승의 얼굴. 그것은 아침마다 보아오던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나, 너무나도 익숙한 그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그토록 증오했던 그녀의 언니 소금정. 이내 증오와 원망이 가득 담긴 눈이 되어 자신을 쏘아보는 것이었다.
“네 이년! 고결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만, 나와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아아악!”
어디선가 들려오는 금정의 목소리가 귓속을 뚫고 들어와 가슴에 꽂혔다. 귀를 막아도, 몸을 웅크려도 그 소름 끼치는 목소리는 끊어지지 않았다.
“미안, 미안해요.”
주저앉아 바들바들 떨던 소정은 한참 만에 몸을 일으켰다. 보이지 않는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오직 도망만이 답이었다. 널브러져 있는 봉천을 뛰어넘고 바위 위로 버쩍 뛰어올랐다. 손톱이 갈라져 피가 맺히는 줄도 모르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이 마치 날개에 불이 붙은 나방 같았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바르다가 만 금창약이 떨어져 있었다. 그것이 맛있는 먹이인 줄 알고 금세 개미 수백 마리가 주변으로 달려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달큼한 냄새에 정신없이 핥던 그들은 점점 움직임이 둔해지고 방향을 잃었다. 몇몇은 그 자리에 쓰러졌고 몇몇은 서로의 몸에 올라탔다. 순식간에 약통 주변은 서로를 물고 뜯는 참혹한 전장이 되었다. 그래도 남의 것에 욕심을 낸 대가치고는 꽤 관대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 격이행지(激而行之):
물을 막아 거꾸로 흐르게 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