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刮目相對(괄목상대)
인경은 발밑에 널브러진 태문주의 시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비록 신뢰와 존경으로 얽힌 사이는 아니었지만, 형제의 연으로 맺어진 세월이 수십 년이었다. 그들이 얻고자 하는 그것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잔인해졌는가? 그저 통탄할 뿐이었다.
“문주님, 왼쪽부터 상광방주 덕원, 보룡검 주암, 그리고 상성문의 방계 제자 은파입니다.”
그들 외에도 대부분이 눈에 익었다. 아무래도 최근 강호에서 내로라하는 검객들이 다 모인 모양이었다.
“고문주님, 만약 상현, 하현검을 내어놓고 물러가신다면 목숨은 살려드리겠습니다. 어린 장문으로서 그간의 노고를 어찌 모를까요? 이 일을 거울로 삼아 바닥부터 쌓아 올리면 수백 년 뒤에는 옛 명성을 찾을지도 모르지요.”
현송의 비아냥에 자객들 모두 키득거렸다. 고작 고대산파 따위에게 질 리 없다는 자신감이 말투에서부터 진득하게 전해졌다.
“뭐, 우리 쪽은 그렇다 칩시다. 굳이 포태문의 문주를 칠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 분은 오랜 친우가 아니었습니까?”
“우리 고문주님, 이리 세상 물정에 어두워 어찌합니까? 참으로 걱정입니다. 포태문은 애초에 우리와 궤가 달랐습니다. 동맹이 아니라 종속 관계를 원했지요. 어차피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머리가 되고 싶지 꼬리로 남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현송의 장황한 변명의 기저에는 친우에 대한 죄책감도 남아 있었다. 만약 그가 멸악을 무시하지 않았더라면 대안을 찾을 생각도 해보았다. 허나, 이미 벌어진 일을 후회해서 무엇할까? 진흙탕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잠기지 않으려면 끝까지 밀고 나가야 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현문주님. 당신이 고용한 저들은 정말 믿을 만한 자들입니까?”
“흥, 괜한 이간질로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시나 본데, 틀렸습니다. 적어도 의리 따위보다는 강력한 약속으로 맺은 사이니까요.”
더는 잡담을 나눌 이유가 없었다. 현송이 양옆에 선 이들에게 눈짓을 보내자 바로 공격 자세를 취했다. 격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온 것이었다.
“영우”
인경의 신호가 시작이었다. 하현검을 은은하게 감싸는 푸른 기운이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나갔다. 좌우로 좁혀오는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한 사람을 향한 일격이었다. 보법이 현란하지도 않은데 두 장이 넘는 거리를 고작 스무 걸음 만에 좁혀 들어왔다. 현송이 하현검의 반경 안에 갇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인경의 얼굴이 코앞이었다.
“잔재주 따위에 당할 내가 아니다.”
그러나 현송 역시 검법에서는 누구에게 져 본 적이 없었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의 청년에게 밀릴 실력이 아니었다. 날아오는 검기를 막는 동시에 허리를 뒤로 크게 꺾으니 등 뒤에 푸르른 노송이 보였다. 왼쪽 발을 뒤로 뻗어 나무를 박차자 추진력이 되어 몸이 앞으로 곧장 튕겨 나갔다.
캉!
캉!
캉!
캉!
두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어지러웠다. 만만하게 보고 덤볐던 현송은 고작 십여 합 만에 자신의 오만함을 뉘우쳤다. 영우(零雨), 가볍게 툭툭 건드리고 지나가다가 돌아들어 세차게 퍼붓는 검기는 초식의 이름처럼 빗줄기 같았다.
휘익!
팅!
하현이 앞섬을 숭덩 잘라놓았을 때, 현송은 숨이 턱 막혀왔다. 체면이고 뭐고, 오직 살기 위해 소매 속에 숨겨두었던 암기를 다짜고짜 던져보았다. 그러나 고작 목표물에 반도 다가가지 못하고 무참하게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자, 잠시만!”
인경의 세 번째 초식 취우가 시작되자, 이제는 아예 맞설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정신없이 감겨오는 검날이 그의 화려한 도포 자락을 넝마처럼 갈가리 찢어놓았다.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니 방어도 불가능했다. 대신 맞아줄 처마가 없다면 쏟아지는 빗방울을 피할 방도가 없었다.
“은대협! 어디 있나? 나 좀 도와주게.”
현송은 가장 가까이에 섰던 은파를 애타게 불러보았다. 그의 쌍검이라면 잠시나마 틈을 만들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방금까지도 좌측에서 달려들었으니 금세 도와주러 올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현문주님, 망했습니다.”
은파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 뒤에야 현송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는 곱절이 많았건만, 어느 쪽도 우세를 점한 무리가 없었다. 멸악문의 여섯 제자는 물론이고, 큰 값을 치르고 고용한 열두 자객도 마찬가지였다. 둘씩 짝을 이뤄 펼치는 매월검진에 제대로 된 공격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속절없이 밀려날 뿐이었다. 살수 중에는 최고 이름난 보룡검 주암 역시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상처까지 입었는지 한쪽 어깨가 피투성이였다.
'언제 고대산파가 이렇게 컸단 말인가? 매월 신양선이 있던 그때보다 더 견고하지 않은가?'
개개인의 실력만 본다면, 오히려 현송의 무리가 압도적이었다. 다만 수년 동안 동기들과 함께 익혀 온 검진은 실력 그 이상의 압도적인 위력이 있었다.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극대화하는 두 개의 초식을 한 몸처럼 사용하여 웬만한 고수보다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뿐인가? 한쪽이 다치면 다른 쪽이 대신 몸을 내던지니, 그 기세에 오히려 움찔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수십 개의 은자를 풀어 고용한 자객들은 모래알과 같았다. 동료가 당하면 함께 싸우는 게 아니라 밟고 도망쳤다. 목적도, 욕망도 제각각인 그들이 애초에 필사적으로 싸울 리가 없었다. 되레 어떤 이들은 서로를 밀치며 활로를 찾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다.
현송은 그제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포태문과 함께였다면 이리 무참히 깨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성과를 독식하려는 욕심에, 친우를 믿지 못한 불신으로 비롯된 부끄러운 결과였다.
휘익!
망연자실한 그의 앞에 하얀 옷자락이 펄럭였다. 명치 끝에는 달빛처럼 새하얀 하현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제 결정의 순간이 온 모양이었다. 현송은 검 끝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온화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품고 내려다보는 인경의 얼굴에는 악의라고는 없었다.
“현문주님, 그만할까요?”
“뭐요?”
현송은 꽉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상대의 자비심에 고마움보다 수치심이 먼저 들었다. 당장 승리를 목전에 둔 적이 이런 어리석은 제안을 할 이유가 무엇인가? 조롱이고, 기만이었다.
“이유는 다르지만, 저 또한 욕심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하여, 문주님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합니다.”
“하하하,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인가?”
현송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허탈하게 웃었다. 그의 비아냥에도 여전히 인경의 얼굴은 평온했다. 마치 혼자만 열반의 세계에 다다른 생불 같았다.
“허나, 친우를 배신하고 형제의 의리를 버린 일을 묵과할 순 없겠지요. 제자들을 보십시오. 당신은 저들의 마음속에 평생 잊히지 않을 죄책감과 후회를 심어 주었습니다. 응당 그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여기서 포기하십시오. 감당하지 못할 탐욕을 버리세요. 그리고 돌아가서 포태문에 사죄하고 용서를 받으십시오.”
“아주 기고만장했구나. 나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큰소리를 떵떵 쳐보았지만, 그저 허세였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단단한 흙바닥을 파고 들어가서 영영 땅속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다른 활로는 없었다. 이미 아군의 대다수가 전의를 상실했으며, 그렇게 믿었던 상당방주와, 은파, 심지어 주암까지도 이미 도망을 친 뒤였다. 혼자 날뛰어봤자 추할 뿐이었다.
“고용한 그 어느 분도 당신을 구하러 오지 않는군요. 이렇게 보물을, 비급을 얻었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피와 살로 쌓아 올린 탑은 한낱 이끼에도 무너집니다. 아닙니까?”
이번에는 촉촉이 젖은 눈으로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욕심이 그득했던 그들의 눈에는 후회와 원망만 남았다. 이 모든 게 주제도 모르고 건방을 떤 장문의 죄업이었다.
푹!
“욱!”
인경이 말릴 새도 없었다. 검을 사이에 두고 섰던 두 사람이 순식간에 한 치 앞으로 가까워졌다. 현송은 되도록 확실하게 이 수치스러운 삶을 끝내고 싶었다. 자비 없이 돌진하여 검의 절반이나 그의 심장을 관통하였다. 그 탓에 하현의 하얀 검날이 현송의 붉은 피를 뒤집어썼다.
“네 탓이 아니다.”
검을 차마 놓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인경의 어깨 위로 백천의 늙은 손이 올라왔다. 어린 장문이 견디고 있는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목숨을 노린 적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이 오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을, 오롯이 혼자서 깨달아야 하는 순간이었다.
“제가 좀 더 겸손했으면 달랐을까요?”
“그저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는 자였을 뿐이다.”
강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견뎌야 하는 순간이었지만, 아직도 인경에게는 힘겨운 일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문파의 장문이기에 버티고 강해져야 했다.
“투항한 멸악문의 제자들은 일단 함께 움직인다. 살수들은 위험하니, 혈을 찍어두고 결박하여 이곳에 두고 간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고대산파는 서둘러 대열을 정비했다. 한차례 격전이 오고 간 후였으나, 백천의 지휘 아래 상황이 빠르게 정리되었다. 고대산파의 제자 스무 명 중에 다친 이가 반이었지만, 다행히 중상은 없었다. 그들을 돌려보내고 포태문과 멸악문에서 살아남은 제자로 인원을 채우니 다시 스물이었다.
“이제 곧 온수와 합쳐지는 외길입니다. 운이 좋으면 다른 오대산검의 문파와 만날지도 모르지요. 물론 예상치 못한 적일 수도 있고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겁니다.”
마음을 가다듬은 인경은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두 시진을 지체했으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또한, 살수 몇이 도망친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그들이 추악한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면, 또 어느 길목에서 나타나 분란을 일으킬지도 몰랐다. 빨리 오대산검에 합류하여 최소한의 피해로 막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벌써 해가 지고 있습니다. 지금 바로 움직이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요?”
장문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영준은 걱정이 앞섰다. 다행히 분란을 잘 해결하기는 했으나, 크고 작은 부상과 마음고생에 모두 지친 상태였다. 때마침 밤이 찾아왔으니 무리하게 강행했다가 탈이 날까 봐 염려되었다.
“고문주, 가을밤은 생각보다 꽤 춥네. 이 작은 고개만 넘으면 외길이지 않나? 그 전에 쉬었다 가는 것도 좋겠지. 무엇보다 두 문파의 어린 제자들 간에 앙금이 남았으니 다시 신뢰를 회복할 여유가 필요하지 않겠나?”
백천 역시 영준의 의견에 동의했다. 급할수록 쉬어가는 법. 그 완급을 조절하는 일 또한 백천이 이 먼 길을 함께 온 이유였다. 인경은 그제야 따라오는 일행을 둘러보았다. 누구 하나 희망에 찬 이가 없었다. 처음 길을 나설 때와는 사뭇 다른 표정이었다. 지치고 피곤한 것은 물론이고 서로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분위기에 인경 역시 절로 기운이 빠졌다.
“네, 그럼 일단 한 시진만 쉬었다가 움직이지요.”
영준이 나서서 명을 전달하니 이곳저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작은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젊은이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았다. 충분히 불을 쬐고 나면 마음이 안정되리라. 그 작은 희망으로 다시금 기운을 차려보는 것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인경은 삿갓을 눌러 쓴 사내의 옆에 앉아 주먹밥을 건넸다. 어쩌면 가장 불편하고 불안해할 그에게 위로라도 건네고 싶은 마음이었다. 때가 되면 누구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해낼 사람이었다. 의지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키고 다독여야 했다.
“현장문의 눈을 보셨습니까?”
“네?”
사내의 뜬금없는 질문에 인경이 몸을 움찔하였다. 동행한 이래로 이렇다 할 대화도 하지 않던 그였다.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것일까?
“형님이 돌아가시는 장면을 눈앞에서 보았을 때, 솔직히 혼란스러웠습니다. 후회? 죄책감? 아니요, 그저 분노였습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나보다 더한 놈들도 잘만 사는데, 왜? 그런데 오늘 현장문의 눈을 보았습니다.”
“…….”
인경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그를 구한 이유는 측은지심 따위가 아니었다. 진실을 밝히고 싶은 욕심, 이 강호가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를 증언해줄 증인이 되어줄 사람이었다. 그의 뉘우침이나 깨달음을 바란 적도 없었다. 하여, 예상치 못한 고백에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억울함, 저와 똑같은 눈이었습니다. 네, 저 같은 종자는 딱 거기까지입니다. 내 가족이 죽어 나가도 반성이 없지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저와 똑같은 인간을 마주하고 보니, 다른 감정이 들더군요. 수치스러웠습니다. 제가 후회를 모르는 인간이라는 게, 내 탓을 할 줄 모르는 비겁한 인간이라는 게,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습니다.”
삿갓 아래로, 사내의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후회도 반성도 아닌 고백이었으나, 듣고 있는 인경의 마음에도 작은 울림이 되었다. 한때는 미움을 넘어 증오하던 사람이었다. 자신보다 약한 자를 조롱하고 위협하던 그를 소인배라며 혐오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진심을 들은 지금은 그저 자신과 같은 한낱 나약한 사람일 뿐임을 깨닫는 것이었다.
“강요하지 않는다고 하셨지요? 제가 모두의 앞에서 진실을 밝히는 일 말입니다. 네, 그리하겠습니다. 제 의지로 내린 결정입니다.”
사내의 붉어진 눈에는 선한 의지가 가득했다. 그를 만난 이래로 가장 맑은 눈이었다. 인경은 왠지 모르게 콧날이 시큰해졌다. 상대에 대한 묵은 감정이 단번에 허물어지는 느낌이었다.
“원용당은 이제 강호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나마 살아남은 당신의 수하들도 고향으로 모두 돌아갔고요. 원하신다면, 이 모든 일이 끝나고 저와 함께 고대산파로 가시겠습니까? 물론 이 또한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문주님. 감사합니다.”
사내는 당장 무릎을 꿇고 절을 두 번 올렸다. 인경이 극구 사양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자신보다 열 살이나 어린 장문에게 절이라니, 불과 한두 달 전의 그였다면 결코, 상상도 하지 못할 행동이었다. 이제 삿갓도 복면도 필요 없었다. 민낯을 내놓은 허윤의 얼굴이 달빛을 받아 맑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