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66화 (166/209)

166화. 陽鳳陰違(양봉음위)

구의를 벗어나자 한적한 들길이 끝없이 펼쳐졌다. 조만간 고개를 넘어가면 험준한 산길이 계속일 테지만 잠시나마 그림 같은 풍광을 감상할 수 있었다.

크게 세 개의 무리로 나눠진 행렬에서도 마지막 순서에 자리한 고대산파는 유달리 화기애애했다. 긴장감이 가득한 앞선 무리와는 완전히 상반된 분위기였다.

“상전벽해가 된 구의는 불편하였으나 이곳은 마음이 편안하구나. 옛 추억이 절로 떠오르니 내가 늙긴 늙었나 보다.”

수레에 앉은 백천은 감회에 젖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여행길이 하필 옛 려국의 땅이라서 좋았다. 이십여 년 전, 황실의 명으로 끔찍한 일을 자행했던 그때를 참회하며 살아왔던 그였다. 막상 다시 그곳을 밟으니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태사백님, 이제 곧 수레도 말도 탈 수 없는 산길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래 봬도 아직 근력이 남아 있단다.”

걱정스레 돌아보는 장문을 향해 부러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이 고된 길을 따라나서겠다고 했을 때, 가장 반대한 이가 바로 인경이었다.

“네 걱정의 이유를 잘 안다. 허나, 그러므로 더 가야 한다.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구나.”

한 나라를 짓밟고, 그 땅의 백성을 도륙할 만한 일이었을까? 진실을 확인하고픈 마음이 굳은 의지가 되었다.

“언제든 불편하시면 말씀하십시오.”

어쩔 수 없는 승낙이었으나 아직도 인경의 마음은 불편했다. 백천이 누구인가? 멸문 직전의 고대산파를 일으킨 기둥이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 태사부와는 다른 의미로, 그는 사문을 지켜내었다.

물론 항간에는, 어린 항렬 제자들의 목숨을 살린 그 지혜를 비겁함이라 비난하는 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인경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물러서는 일이 맞서기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을. 참고, 기다리고,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더 큰 용기임을.

“헌데, 문주님. 저 복면을 한 사내는 누구길래 애지중지 아끼는 겁니까?”

영준은 입술을 삐쭉 내밀며 웅얼거렸다. 두어 달 전 인경이 데려온 정체불명의 사내. 굳이 본파 제자를 두고 그를 끼워 원정대를 꾸린 일이 영 못마땅하였다. 정체라도 알려주면 이해하겠건만, 형제보다 더한 자신에게조차 함구하니 속이 상했다.

“때가 되면 알게 된다. 그는 꼭 필요한 사람이니, 혹여 위험에 처하게 된다면 모른 체하지 말고 도와주어라.”

“네에.”

인경은 일부러 길게 대답하는 영준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몰라 조마조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과연 그곳의 진실은 무엇일까?’

‘해심밀경소 때문에 지난 수십 년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는가? 이제 그 안에 숨겨진 진실의 실체를 확인한다니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태사백님, 저는 강운선을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변죽 좋은 영준은 이번엔 백천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이 기나긴 여정에 수다라도 떨어야 지루함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곳이 진짜 존재한다는 것도, 해심밀경소에 적힌 암호가 그곳을 가리킨다는 것도, 또 그곳이 어디인지도 오직 강운선만이 알지 않습니까? 그럼 혼자 차지하면 될 일이지 어째서 이 대단한 사람들을 모았단 말입니까? 심지어 천서국까지요.”

“흐음.”

백천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허연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 또한 완전히 운선의 마음을 알지는 못했으나 가히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려국이 멸망한 지 삼십여 년이 다 되어가는구나. 이름처럼 참으로 아름답고 기품있는 나라였단다.”

“아니, 무슨 동문서답을…….”

영준이 툭 끼어들어 불만을 토로하자, 인경이 그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부터 풀어낼 백천의 이야기에 정답이 있을 테니 잘 음미하여 새겨들으라는 의도였다.

“아직도 내 눈앞에는 그때의 추억이 보이지만, 고장문을 비롯하여 너희 제자들에게는 한낱 옛날이야기가 되었구나. 인생이 곧 그러하다. 당장은 내 손에 쥔 것이 전부요, 실체 같으나 그저 거품에 불과하다. 화려한 집도, 부유한 삶도 영원할 것 같으나 영원히 내 것은 아니다.”

백천은 팔을 들어 지나온 한 곳을 가리켰다. 성곽이 둘러싼 밖, 허허벌판이었다.

“저곳에 아주 크고 아름다운 장원이 있었단다. 사시사철 화려한 꽃이 피는 뜰에는 유명한 소리꾼도 놀이꾼도 다 모여 재주를 겨뤘지. 구십구 개의 방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아 하루하루가 잔칫날이었다.”

“아무것도 없는걸요?”

“그래, 이제는 주춧돌 몇 개만 남았구나.”

백천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 받아들였다고 생각했으나, 그 깨우침을 확인하는 과정은 늘 괴로웠다. 인생의 무상함은 변하지 않는 진리지만, 깨우쳤다고 해서 무상해지지는 않았다.

“그는 보여주려는 것이다. 우리가 모두 모여 찾는 대단한 그것이, 려국의 것이라는 걸. 잃어버렸고, 잊히고 있으나 사실은 존재한다는 걸.”

들을수록 아리송해지는 태사백의 이야기에, 영준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배움이 모자란 건지, 그의 가르침이 어려운 건지 헷갈렸으나, 인경의 표정을 보니 전자인 듯싶었다.

’그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만약 나였다면 자긍심이 아니라 복수심이었다.‘

인경은 광활한 공터에 널브러진 주춧돌을 세어 보았다. 그것들이 받치고 있었을 전각이, 그 전각이 모여 만들어진 고을이, 그리고 나라가 사라졌다. 그 허망함과 절망감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하물며 운선에게는 죄책감도 있었다. 자신이 지은 죄가 아니었으나 자신밖에 책임질 수 없는 업보.

“복수심 때문이어도 이해합니다. 그게 더 인간적이니까요.”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인경의 중얼거림에 백천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기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의도가 어찌 되었든, 수많은 이들이 그의 계획대로 한곳에 모이는 중이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결과는 모인 사람들의 몫이었다. 운선이 깔아놓은 판에 올라서길 자처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저들도 계획이 있겠지요. 서로를 경계할 수도 있지만, 그 대상이 우리일지도 모릅니다.”

“아무렴, 그렇겠지.”

백천이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감이 감도는 두 무리는 각각 포태문과 멸악문이었다. 두 문파는 최근에 비록 쇠퇴하였으나 오랜 전통을 기반으로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번 여정에 선뜻 참여한 이유가 뻔히 보일 정도였다. 아마도 이 길이 끝나면 속내를 드러내리라.

“두 장문은 오랜 지기이지만 언제나 서로를 경계하고 두려워한단다. 과연 우리에게까지 차례가 올지 모르겠구나.”

“그럴까요?”

인경은 날을 잔뜩 세워 두 무리를 관찰하였다. 백천의 이야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정말로 서로를 경계하는 눈치였다.

“이제 십 리만 더 가면 산길입니다. 어느 쪽이 먼저 시작할까요?”

영준이 슬그머니 다가와 인경에게 물었다. 미리 장문의 계획을 듣기도 했거니와, 제법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아까부터 멸악문의 문주 어깨가 들썩이는 양이, 꽤 대단한 음모를 꾸민 듯 보였다.

“우리를 업신여긴다면 좁은 곳을 선점하여 기습하겠지.”

인경의 추측대로 그들과의 거리가 점점 벌어졌다. 두 문파가 힘을 합한다면, 수적으로는 저들이 우세였다. 그러면, 우선으로 지켜야 할 이들을 챙겨야 했다.

“정용과 무진, 너희는 태사백님을 보좌해라. 그리고 영준아, 무슨 일이 있어도 복면을 한 저 이를 지켜야 한다.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놓치다니요? 도망이라도 간답니까?”

영준은 목소리를 한껏 낮춰 물었다. 그러나 인경은 대답 대신 손가락을 들어 입조심 하라는 신호를 보낼 뿐이었다.

“고문주, 여기는 대선배님이 있으니 우리 두 문파가 먼저 길을 터 안전을 확인하겠네.”

“그러시지요.”

포태문의 장문이 거들먹거리며 보고를 했다. 말이 보고지, 하대와 다름없는 태도에 영준은 화가 버럭 났다.

“나이 많은 게 대순가? 우리 고대산파를 뭐로 보고.”

“되었다.”

그러나 인경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태사부님이 돌아가시고 고대산파를 업신여기지 않는 문파가 없었다. 하물며 장문이 어리고 업적조차 없으니 더 우스울 만했다.

“저들이 건방진 게 아니라, 우리가 약해 보이는 것이다. 쓸데없는 일에 힘 빼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라.”

“네, 문주님.”

인경은 두 문파가 한참을 멀어진 후에 제자들을 다시금 다독였다. 그깟 자존심 좀 상한다고 투덜거릴 여유가 없었다. 적을 만나기도 전에 동맹에 뒤통수를 맞게 되었으니 제대로 반전을 보여주어야 했다.

“산길이라고는 하나, 바위가 많고 가팔라 곳곳이 절벽이다. 하여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어 지주망을 만들어야 한다.”

수레에서 내려온 백천이 바닥에 슥슥 지도를 그렸다. 꽤 오래전이지만 정확한 기억이었다.

“간다.”

인경이 선두가 되어 바위 하나를 뛰어넘었다. 백천의 그림처럼 산길은 고불고불한 외길이었으며 발밑은 온통 바위였다. 섣불리 화려한 초식을 썼다가는 발을 헛디딜 수 있었다.

“남동 2보, 남서 3보”

백천의 나지막한 외침에 둘씩 짝지은 두 무리가 서둘러 위치를 잡았다. 이어서 다른 네 무리도 예정된 자리에 서니, 인경을 앞장세우고 작은 방사형이 되었다.

“이대로 흐트러뜨리지 말아라.”

다음 명을 숙지하며 모두 검을 그러쥐었다. 뼈를 갈며 익힌 검진이기에 홀로 싸우는 것보다 자신이 있었다. 불과 수년 만에, 고대산파의 설익은 제자들은 한 문파를 지켜낼 정도의 검객이 되었다.

“고문주!”

그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호기롭게 떠난 포태문의 장문이 피투성이가 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할 만큼 온몸에 자상을 입은 그는 대단히 무서운 걸 본 사람처럼 동공이 풀려 있었다.

“아니, 태문주님.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기, 기습이네.”

“네?”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는지, 태문주는 인경의 앞에서 풀썩 엎어지고 말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흙바닥에 쏟아지니 대역죄인의 참회 장면 같기도 했다.

“멸악문 놈들이 우릴 배신하였네. 강호의 뜨내기 자객들을 불러모아 매복하였으니, 이 앞길은 모두 덫이네.”

“아아.”

인경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뱉었다. 두 문파가 연합하여 본 파를 치려고 한 음모가 사실인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그 와중에 그들끼리 배신하여 등에 칼을 꽂았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내 자네에게 사죄하겠네. 제발 날 살려주게.”

“혼자, 살아나오신 겁니까?”

태문주를 바라보는 인경의 눈이 바르르 떨렸다. 이런 의리 없는 자와 같은 줄을 잡았다는 사실이 한없이 수치스러웠다.

“어, 어쩔 수가…….”

푹!

빽빽한 노송 사이에서 비수 하나가 날아왔다. 미처 인경이 쳐내기도 전, 그것은 태문주의 풍지혈에 정확하게 꽂혔다.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진 그는 단번에 숨이 끊어졌다.

“고문주님, 안타깝지만 오늘 이곳을 벗어나긴 어려우실 듯합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함께, 검은 옷을 입은 열두 명의 자객이 나무 사이 사이로 불쑥 튀어나왔다. 그 가운데에는 세상 화려한 무늬의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중년의 사내가 읍을 올렸다. 방금까지도 여정을 함께 했던, 멸악문의 문주 현송이었다.

*** 양봉음위(陽鳳陰違):

겉으로는 명령을 받드는 체하면서 물러가서는 배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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