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進退無路(진퇴무로)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지만, 누구 하나 멈추는 이가 없었다. 잡히면 죽는다. 오직 그 일념으로 험준한 산길을 달리고 또 달렸다.
‘저 요괴에게 잡히면 끝이다.’
가은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피곤함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머릿속에는 오직 두려움, 공포, 감당 못 할 감정들이 가득 찼다.
“어?”
대나무숲의 끄트머리에 다다른 순간, 앞서가던 보현은 위화감을 느꼈다. 한 장 밖에서 보았을 때만 해도 그저 푸르른 나무숲이었다. 헌데, 지금 그들의 눈앞에는 풍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사람이 비파 줄을 튕기며 앉아 있었다.
‘범상치 않은 자다.’
신중하고 차분한 성격의 보현은 상대가 그저 이 지역에 사는 촌부로 보이지 않았다. 왜소한 체구에 초라한 노인이었지만 묘하게 눈빛이 싸늘했다. 이리 많은 선자가 뛰어오는데도 세상 여유로운 태도 또한 비범했다.
“어르신, 길을 지나가도 되겠습니까?”
제자들을 일단 세워두고, 보현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입가에는 친절한 미소를 머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적이 아니라면 쉬이 보내줄 터, 그 반대라면 전력을 다해 싸워야 할지 몰랐다.
“흐음, 예의 바른 처자구먼. 안타깝네, 안타까워.”
노인은 혀를 끌끌 차기만 할 뿐, 전혀 길을 비켜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또한, 멈췄던 비파 연주를 다시 시작하였는데, 곡조가 슬프고 우울하여 마치 곡소리 같았다.
“사저, 아무래도 정신 나간 늙은이 같습니다. 그냥 지나쳐 가지요.”
기정은 되레 보현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누가 봐도 촌부일 뿐인데 무림 대선배를 대하듯 공손한 점이 퍽 이상했다.
“정신이 말짱한 이에게 함부로 지껄이다니 버릇이 없구나. 무릇 도를 닦는 선자라면 자비가 있어야 하거늘, 가진 건 오직 잘난 낯짝밖에 없으니 한심하다, 한심해.”
“뭐라고요?”
귀가 밝은지, 기정의 목소리가 제법 작았는데도 노인은 찰떡같이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뱀처럼 각진 눈을 매섭게 노려보며 한참 동안 독설을 퍼부어 댔다. 악의가 없던 기정이었건만, 난생처음 듣는 욕설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 늙은이가 노망이 났구나!”
“사매, 잠시만.”
보현이 서둘러 말렸으나 한발 늦고 말았다. 벌써 출검한 기정은 화려한 앵화검의 초식을 앞세워 검을 휘둘렀다. 살해할 의도가 아니라 겁을 주어 쫓아 보낼 작정이었다. 아무리 노망이 났어도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고집을 부리진 않을 터였다.
“쯧쯧, 나이도 꽤 먹은 처자가 아주 방자하구나.”
노인은 검을 피하기는커녕, 되레 얼굴을 쭉 내밀었다. 이대로 검을 거두지 않는다면 코가 뎅강 잘려 나갈지도 몰랐다. 애초에 살인할 작정이 아니었던 기정이 오히려 당황하여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어어? 어?”
미처 거두지 못한 검은 본래의 목적대로 노인의 코에 다다랐다. 선자들 대부분 비명을 질렀으며 걔 중에는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신이한 광경은 그다음부터였다.
챙!
잘려나간 쪽은 코가 아니라 기정의 검이었다. 날이 닿자마자 경쾌한 음이 쟁쟁 울리더니만, 그대로 반 토막이 되었다. 마치 거대한 바윗돌에 검을 세게 내리친 것과 같았다.
‘아아, 끝이구나.’
그제야 보현은 망연자실한 가은의 표정을 확인하였다. 노인이 나타난 순간부터 사시나무 떨듯, 덜덜 경련을 일으키던 그녀가 이제는 완전히 의지를 잃은 모습이었다.
“저자가 누군데 이러느냐? 혹시 아는 이냐?”
“…….”
가은은 대답 대신 보현의 팔뚝을 꽉 잡았다.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아무런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오호, 이 아이가 여기 숨어 있었구나. 네가 우리 란이가 그리 욕하던 깜찍한 녀석이 맞느냐?”
“…….”
가은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그는 분명 객잔의 못난 주인장, 그리고 천서국의 자객 곡해고였다.
“흐음, 나를 알아보는구나?”
들쑥날쑥 못생긴 누런 이를 내보이며 곡해고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찾던 이를 만났다는 반가움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조롱이었다. 그저 비파에 붙은 먼지 같은 아이였으나 당장 죽일 마음은 없었다.
‘치수가 신교도 놈들을 확보했다고는 하나, 그 물건이 진짜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 이 아이도 확보해 두었다가 필요치 않으면 그때 죽여도 늦지 않는다.’
곡해고는 선자들을 한 번 쭉 둘러보았다. 오대산검의 한 문파를 맡기에는 누구 하나 썩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오늘 죽이지 않더라도 조만간 도착하는 지옥도에서 살아남지 못할 듯싶었다.
“마음이 바뀌었네. 저 아이를 남겨두고 간다면 나머지는 지나가도 좋아.”
“네?”
기정은 이미 노인의 놀라운 내력을 확인했으므로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사부님도 없는 지금, 괜히 정체 모를 고수와 겨루다가 더 큰 사달을 내고 싶지 않았다.
“사저, 우리 가은이를 내어줍시다.”
“뭐?”
보현은 생각지도 못한 기정의 제안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부님이 그리 신신당부하셨거늘, 무슨 황당한 말인가 싶었다.
“은이의 얼굴을 보셨지요? 저 아이는 아는 겁니다. 상대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우리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고수일 테지요. 은이가 가진 열쇠를 빼앗고 저 늙은이에게 준다면 딱히 손해 볼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무슨 야박한 소리냐? 어찌 사문의 제자를 함부로 버리겠다는 생각을 해?”
보현은 상기된 낯으로 사매의 경솔함을 꾸짖었다. 아무리 일리가 있는 의견이더라도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할 수는 없었다.
“답답하십니다. 이러다 우리 다 죽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보현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콧등으로 검을 부러뜨릴 정도면 사부님과 겨뤄도 비등하거나 그 이상이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볐다가 모두 죽어버리면, 가은을 지키겠다는 애초의 계획도 무산이었다.
“아아, 지루하구먼.”
눈앞에 적을 두고도 호들갑만 떠는 선자들을 보며, 곡해고는 가래침을 뱉었다. 저런 것들이 명문정파랍시고 설치니, 경국의 앞날도 불 보듯 뻔했다.
‘기득권이 되면 나태해져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하는 법. 정치질에 온 힘을 다하느라 근본을 잃었구나.’
그리고 그것이 비단 선운검파만의 문제가 아님을 잘 알았다. 려국의 멸망 이후, 의지가 꺾이고 게을러진 것은 천서국의 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이란 무릇 꺾어야 할 대상이 있을 때 부지런해지기 마련이었다.
“나와 이 아이가 남겠으니 나머지는 보내주십시오.”
“사저?”
드디어 결심이 선 보현이 곡해고의 앞에서 다시 허리를 숙였다. 사문은 지키면서도 가은은 살려 보겠다는 고육지책이었다. 기정은 사저의 기가 막힌 결정에 입이 딱 벌어졌다. 외골수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야말로 앞뒤가 꽉 막힌 방퉁이가 따로 없었다.
“흐음, 좀 모자라기는 해도 의리는 있는 편이구나. 그런데 어쩌나? 너는 필요 없다. 선택지는 둘. 저 아이만 놓고 가든지, 여기서 다 죽든지.”
“그건,”
보현은 자신의 등 뒤에서 옷자락을 꽉 쥐고 놓지 못하는 가은을 바라보았다. 입술이 파리하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양이 애처로웠다. 평소 아끼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측은지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또 그 뒤에는 여태 동고동락을 같이했던 소중한 자매들도 보였다.
“은아, 정말 미안하구나. 사부님이 안 계신 지금, 너를 지키기에는 역부족이다.”
“네? 사숙, 저를 버리시려는 겁니까?”
맑은 가은의 눈에 금세 눈물이 들어찼다. 엄마 치마폭을 잡은 아이처럼 꽉 붙들어 잡고 있던 손에 스르륵 힘이 빠졌다.
“사문을 위해서다. 그러니 네가 가진 그것을 내게 주련. 너의 희생을 잊지 않으마.”
“그래, 우리는 불도를 공부하는 이들이 아니더냐? 천수관음께서 너의 선행에 감읍하여 보살펴 주실 게다.”
절망감으로 가득했던 가은의 눈동자가 서서히 분노로 바뀌었다. 자신을 매몰차게 버리면서도 대의명분을 운운하다니 얼마나 위선적인가? 이런 양심 없는 이들에게 열쇠를 내어놓을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을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겁니다.”
“아니, 너!”
가은은 사형제들과 주춤주춤 거리를 벌렸다. 일단 큰소리를 쳤으나 그저 허세일 뿐이었다. 빨리 이 위기를 타개할 묘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봉천에게 느낀 공포가 좀처럼 가시지 않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결정이 났구먼.”
그들이 수군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곡해고는 길게 하품을 했다.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지레 겁먹고 덤비지 않는 모습이 한심하면서도 우스웠다. 이도 저도 짜증나니 전부 죽여버릴까 싶기도 했다.
휘익
“어엇!”
그때, 계속 가은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기정이 그녀의 목덜미 쪽으로 손을 쭉 뻗었다. 습관처럼 목 주변을 만지는 행동으로 구슬의 위치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물건을 챙기는 즉시 흩어진다면 아무리 고수라 하더라도 모두를 잡아 죽이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팅!
“아아악!”
목표물에 다다른 순간, 기정은 극심한 통증에 놀라 손을 거뒀다. 그러나 이미 날카로운 비파 줄이 그녀의 손가락 두 개를 잘라낸 다음이었다.
“어디서 돼먹지 못한 짓을!”
곡해고는 선자들의 비겁한 수를 보는 순간 이미 결심이 섰다. 아무도 보내주지 않겠다. 오늘 이곳에서 귀찮은 것들은 모두 쓸어버리겠다.
딩기딩!
오른손으로 부드럽게 비파 줄을 튕기니 오묘하고 신비로운 소리가 숲속을 휘감았다. 그러나 선운검파의 제자들에게는 조금도 아름답게 들리지 않았다. 이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들이 살아서 나갈 가능성은 없었다.
‘할 수 없다. 내가 나서서 시간을 벌어야 한다.’
보현은 다른 사매에게 기정을 맡기며 눈짓을 보냈다. 최대한 흩어져 각자도생하는 것.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분분(紛紛)”
보현의 얇은 검이 허공에서 빠르게 회전했다. 그 사이로 흙먼지가 뽀얗게 일어나니, 마치 회오리바람 같았다. 왼손으로 수인을 맺어 내력을 모으자마자 회전이 더욱더 빨라졌다.
“지금이다!”
신호가 떨어지자 선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나무가 빽빽하여 숨을 곳이 많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저들 중에 반은 살 수 있으리라. 보현의 그늘진 얼굴에 잠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단향(斷香)”
다음은 가장 자신 있는 초식이었다. 허공에 거대한 글씨를 써 내려가는 모습은 앵화검법 특유의 동작이었다. 유려한 몸놀림 사이사이 적의 주요 약점을 노리는 매서운 검법이었다. 하얀 옷자락을 펄럭이며 바위 쪽으로 내려앉는 모습은 흡사 꽃잎이 떨어지는 모양과 같았다.
“흥! 금옥패서(金玉敗絮)로구먼.”
검날이 이미 인중까지 다가왔으나 곡해고는 피하기는커녕 혀를 끌끌 찼다. 실과가 없는 화려한 꽃은 피어봤자 관상용이었다. 어차피 떨어지면 발에 밟히고 채는 게 꽃이거늘, 외양에 현혹되어 빈 껍데기만 남은 화목일 뿐이었다.
디리링!
다시 한번 비파의 현을 당기자 이번에는 근처의 대나무 수 그루가 바르르 몸을 떨었다. 가부좌를 풀어 오른 다리를 꼬아 돌리니 곡해고의 작은 몸이 옆으로 획 돌아갔다. 그 일련의 동작이 너무 빨라 보현의 시야에는 마치 상대가 사라졌다가 나타난 것처럼 보였다.
“아차!”
검이 허공을 가르며 기우뚱, 중심을 잃었다. 보현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바위에 검 끝을 짚어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으나 곡해고와의 거리가 한 치 앞도 되지 않았다.
“쯧쯧, 어리석다, 어리석어.”
곡해고의 손이 어느새 보현의 콧날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엄지와 중지를 잡아 툭 하고 튕겨내니 상대의 허리가 뒤로 휘리릭 넘어갔다. 보현은 그의 내력을 담은 손가락을 감당할 만한 실력이 아니었다. 척추가 뒤로 접힌 사람의 숨이 붙어 있을 리 만무했다. 고작 십여 합도 버티지 못하고 보현은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아아.”
방금까지도 자신의 손을 잡아주던 사숙이 눈앞에서 비명횡사하자, 가은은 공포에 질렸다. 부러 도망치지 않고 곡해고와 거래를 해보려던 자신이 가소롭게 느껴졌다. 차라리 발버둥이라도 쳐 볼걸. 이 괴기스러운 노인은 그녀가 이전까지 봐왔던 그 어떤 악당보다 사납고 냉정했다.
“아가야, 눈동자 굴리지 말아라. 노부에겐 전혀 통하지 않으니까. 다만, 지금 내어놓으면 안 아프게 죽여주마.”
“저번에 그 언니에게 말했잖아요. 태을신교의 두 사내놈이 가져갔어요. 정말이에요.”
“흐음, 앙큼한 것. 아무것도 없다면 저 의리 없는 처자들이 너를 안 뺏기려고 했겠느냐? 만약 없더라도 만들어내렴. 아니면 죽인 뒤에 찾아갈 테니.”
“아아.”
가은의 눈이 자신도 모르게 죽은 보현 쪽으로 향했다. 극심한 고통으로 사정없이 일그러진 얼굴은 끔찍하고 징그러웠다.
“저, 저, 정말 없어요. 없습니다.”
가은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내어줘도 죽을 목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