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64화 (164/209)

164화. 焦眉之急(초미지급)

대나무 숲의 참상을 마주한 순간, 가은은 이번에야말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극한의 공포를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꿈에서조차 듣고 싶지 않은 그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여기 예쁜 언니들이 많네?”

허옇게 분칠한 붉은 옷의 요괴. 반드시 네 얼굴을 뜯어내리라 쫓아오던 끔찍한 천서국의 자객, 봉천이 틀림없었다.

‘도망쳐야 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재촉했으나 가은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도망칠수록 가까워지던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은아, 이리 바짝 붙어라!”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끌어당긴 이는 다름 아닌 사숙 기정이었다. 무섭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사문을 지키겠다는 사명감이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가은을 지켜야 그곳을 찾을 수 있다. 오직 장문의 명을 수행하겠다는 일념으로 그녀를 지킬 생각이었다.

“어머머, 설마 너희들 여기서 한 명이라도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어쩜, 어리석기도 해라.”

보현이 아홉의 선자들을 끌고 길을 트려 할 때였다. 자지러지는 웃음과 함께 붉은 천이 대나무 사이로 구렁이처럼 뻗어 나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앵화검의 기본 초식인 낙화를 펼쳤다. 마치 떨어지는 꽃잎을 한 장, 한 장 받아내듯이 빠르게 목표물을 베는 검법이었다.

휘익

슥, 슥, 슥, 슥

네 번의 동작으로 붉은 천을 정확하게 다섯으로 등분하였다. 손바닥 크기로 잘린 천이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자 꽃잎처럼 보였다.

“제법이네?”

봉천은 가소롭다는 듯, 헛웃음을 치더니 또 다른 붉은 천을 휘둘렀다. 천의 색도, 질감도 같았으나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었다. 푸른 나뭇잎 사이로 십수 개의 천이 여러 방향으로 뻗쳐 나오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사저, 조심하세요.”

지켜보던 기정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이었다. 수 갈래의 천을 정신없이 쳐내는 사이로, 날카로운 무언가가 반짝 빛났다. 그 크기가 너무 작아 다른 쪽에 정신이 팔린 보현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캉!

캉!

캉!

보현의 얼굴에 암기가 꽂히기 직전, 소정은 그녀의 천천검을 좌우로 크게 한 번 휘둘렀다. 마치 자석에 붙듯, 세침 세 개가 검날에 쪼르르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과연, 연성 소소정의 실력은 녹슬지 않았구나.”

어지럽게 늘어진 천 사이에서 붉은 옷을 입은 기괴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실력에 감동했다며 손뼉을 치는 꼴이 건방지기 이를 데 없었다.

“역시 봉천, 너로구나.”

“흥! 봉천이라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여태 여유로웠던 봉천의 인상이 일순 사나워졌다. 소소정과는 크게 원한을 맺은 일이 없던 터라 우호적으로 대하려 했건만, 수많은 미인 앞에서 촌스러운 이름을 부르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봉천을 봉천이라 하지, 뭐라 할까? 그 기괴한 취미 생활은 여전하구나. 불쌍한 중생.”

소소정은 합장을 하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극락왕생을 빌어주는 비구니처럼 한없이 자비로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말과 행동은 일부러 상대의 약을 바짝 올려놓기 위함이었다. 그녀가 아는 봉천은 속이 옹졸하고 변덕이 심했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도 흥분하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마련이니까.

“여우 같은 년. 나이를 먹어도 교활하고 음흉한 면은 그대로구나. 흥, 저런 줄도 모르고 세상 착한 척 위선을 떨다니. 기어코 너를 받아준 네 사부는 보는 눈이 똥이야.”

소정은 그의 도발에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흥분하는 쪽은 봉천이었다. 어쩌면 제자들을 무사히 보낼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보였다.

“아무튼, 고맙다. 친구란 오래될수록 좋다더니, 우리가 딱 그렇지 않으냐?”

“흥, 계절이 가을인데 더위를 처먹었나? 뭔 헛소리람?”

“귀찮은 선유당 놈들을 치워줬으니 이보다 더 고마울 수가.”

“뭐야?”

봉천은 그제야 자신이 소소정의 말장난에 놀아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십수 년 전에 만났을 때도 그러더니만, 어쩐지 밀리는 기분이었다.

“됐고! 내 구역에 들어온 이상 빠져나갈 수 없다.”

“네 구역? 어쩌다 이곳이 네 것이 되었느냐?”

봉천은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더니, 상대와의 거리를 서서히 좁혀 들어왔다. 소정은 사뭇 여유로운 태도였으나 사실 검을 쥔 손에는 힘이 바짝 들어갔다. 여차하면 먼저 출수하여 저놈의 시선을 뺏어야 했다. 그 틈이 제자들을 살리는 유일한 기회가 될 테니까.

“우리 대 천서국의 태자 저하께서 이곳을 지나는 그 누구도 살려두지 말라고 하셨지.”

소소정은 순간 움찔하였으나, 전혀 내색하지 않고 실소를 터뜨렸다.

“하하, 천서국? 아주 꼴값이구나. 고작 서쪽의 오랑캐 주제에 천자를 붙이다니. 우리 경국인은 모두 서이국이라 부르거늘, 부끄럽지 않으냐?”

“뭐야? 이 건방진 년이?”

봉천은 결국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검을 뽑아 들었다. 웬만한 상대에게는 사용하지 않는 무기이지만, 잔뜩 흥분한 상태라 분별력이 없었다. 빨리 저 늙은 여우의 주둥이를 잘라내고 나머지 선자들의 목을 떼어낼 생각이었다.

‘되었다.’

바로 소소정이 그토록 기다리던 작은 틈이었다. 보현을 보며 일갈하는 동시에 달려 들어오는 봉천을 향해 손가락을 쫙 펼쳤다.

핑!

다섯 개의 쇠 구슬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봉천의 요혈을 향했다. 양팔, 양다리, 그리고 명치 끝. 이 중에 하나만이라도 스친다면 대결이 훨씬 수월해질 터였다. 구슬에는 언제나 그랬듯, 강렬한 독성의 고독이 잔뜩 발라져 있으니까.

“애들이나 갖고 노는 희구로구나.”

봉천은 한쪽 입술을 픽 올리더니, 선 자리에서 한 바퀴 몸을 돌렸다. 덕분에 다섯 개의 구슬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사지를 피해 날아갔다. 다만, 명치 쪽으로 직진한 구슬만은 달랐다.

“흐음, 동글동글 예쁜 구슬이네. 그러나 극독을 품고 있으니 꼭 위선적인 제 주인과 같구나.”

구슬을 잡은 봉천의 엄지와 검지가 금세 푸르스름하게 변색 되었다. 고독의 위력이 눈으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너라도 고독은 견디기 어려울걸.”

소정의 천천검이 화려한 초식을 구현하며 봉천에게 달려들었다. 마치 허공에 글자를 쓰는 것 같은 황홀한 검기의 움직임은 보는 사람마다 감탄을 자아냈다. 바로 앵화검의 세 번째 초식 분분(紛紛)이었다.

‘비록 실력은 저놈에 미치지 못하나 백여 합은 충분히 버텨낼 수 있다.’

이를 악물고 스물네 개의 초식을 연달아 사용하는 소소정의 모습은 처절했다. 봉천의 움직임을 봉쇄하며 제자들과의 거리를 벌리다 보니, 어느새 대나무 숲에는 두 사람의 그림자만이 남았다.

“흥, 이걸 노린 거로구나?”

고독에 중독되기도 했거니와 앵화검의 화려함에 놀란 탓에 봉천의 움직임은 현저히 느려졌다. 구슬을 손가락으로 잡은 순간부터 아차 싶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은 소소정을 잡고 따라가야겠군.’

봉천의 마음은 점점 초조해졌다. 이 쉬운 임무조차 수행하지 못하면 얼마나 개망신인가? 안 그래도 지나친 살인과 기괴한 행적들 때문에 황제의 눈 밖에 난 터였다. 그나마 자홍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천서국 밖으로 쫓겨났을 신세였다.

‘이놈, 말렸구나.’

눈치가 빠른 소소정은 봉천의 속마음이 눈에 다 읽혔다. 하여, 더 빠르고 어지럽게 검을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앵화검은 스물네 초식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검법이지만 그 속도와 힘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초식의 변화가 수백, 수천이었다. 하물며 소정은 현존하는 최고의 앵화검법 고수이니 쉬이 업신여길 대상이 아니었다.

맨 뒤에 따르던 기정의 옷자락이 사라졌을 때, 소정은 드디어 내공을 끌어올렸다. 기세를 잡은 김에 밀어붙여 또 다른 기회를 만들어볼 심산이었다.

‘죽이지는 못해도 다치게 하는 것은 가능하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무리 약해빠졌다고는 하나 무려 오대산검의 하나인 선운검파였다. 사조님의 뛰어난 무공을 제대로 이어 내리지 못했을 뿐, 앵화검만큼은 무엇과 비견해도 모자라다 생각해 보지 않았다. 심지어 그 비교 대상이 매월검일지라도.

캉! 캉!

연달아 검날이 부딪치자 불꽃이 번쩍 튀었다. 그때마다 현란하게 움직이던 천천검의 검기가 눈에 띄게 사그라들었다. 반면 건달바는 조금씩 위력이 강해졌다. 드디어 고독의 기운을 다스리게 된 봉천이 내력을 불어넣었기 때문이었다.

“진작에 무너져야 할 문파가 오대산검이라는 위명에 숨어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구나. 딱하다, 딱해.”

서서히 기세가 살아난 봉천이 한껏 비아냥거렸다. 원래 소소정을 고깝게 보기도 했거니와 깜냥도 안되면서 건방을 떤 것이 퍽 얄미웠다. 이참에 제대로 혼내주리라 마음먹으니 점점 흥이 솟아올랐다.

‘막기만 해서는 벗어날 수 없다.’

칠십여 합을 부딪치고 나니, 서서히 승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잠깐 우쭐했던 소정은 어느덧 실력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사문을 지키지 못했다는 수치심이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혔다.

“초용(憔容)”

소정에게 마지막 남은 초식이었다. 이름처럼 천천의 검신이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마냥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묵직한 건달바가 잠시 움찔하는 사이, 천천은 미끄러지듯 상대의 반경으로 들어가 팔 안팎의 혈 자리를 툭툭 찔러댔다.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초식이냐?”

심지어 간지럽지도 않은 찌르기에 봉천은 헛웃음이 나왔다. 갖은 화려한 기술로 무장한 앵화검법이건만, 어린애 장난 같은 동작이 아닐 수 없었다. 보통 혈 자리를 누르는 검법이라면 강약이 중요하거늘, 강아지풀로 간지럽히는 듯하니 어이가 없었다.

“너 같은 철부지는 회초리가 답이지.”

봉천이 비웃거나 말거나, 이번에는 그의 다리를 노리고 들어갔다. 앉은 자세에서 무릎을 쭉 펴니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붉은 도포 자락 사이로 보이는 상대의 발목을 향해 검이 달려들었다. 오른발의 현종, 구허, 신맥을 차례로 찍고 달아나니, 마치 모기에 물린 것처럼 발목이 따끔거렸다.

“이 간악한 년이!”

봉천이 화들짝 놀라 성큼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건달바가 소정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니 높이 올려 묶은 그녀의 추결(상투)이 숭덩 잘려 나갔다. 또한, 축이 되던 왼발을 쭉 뻗어 상대의 명치를 정확히 찍어 눌렀다.

“욱!”

치명타를 맞은 소정은 울컥 선혈을 뿜었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가슴이 뻐근한 걸 보니, 늑골 두세 개는 부러진 듯싶었다. 분명 완패임에도, 소정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이게 돌았나? 평생 다물지 못하게 아가리를 찢어버릴라! 욱!”

흥분한 봉천이 마지막 일격을 날리려고 할 때였다. 딱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인데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뿐인가? 소정의 검이 지나고 난 자리가 갑자기 저릿저릿해지는 것이었다.

“아뿔싸!”

불현듯 깨달은 바가 있어 양 소매와 발목을 걷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열두 군데의 혈 자리가 까맣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제기랄!”

“하하, 잘난 척하더니, 꼴 좋구나. 손가락에 묻은 고독이야 네 내력으로 어찌어찌 밀어냈을지 몰라도 협죽도에 찔린 상처는 쉽지 않을 것이다. 사지의 요혈에 독이 퍼졌으니 잘라내지 않으면 곧 심맥을 상하게 하겠지.”

입 주변이 피투성이가 되었으면서도 소정은 우스워 죽겠다는 듯 어깨를 들썩거렸다. 비록 싸움에서는 패했지만, 상대의 발을 묶어두었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흐응, 안타깝게도 네가 틀렸다.”

봉천은 스스로 사지의 혈도를 찍어 기혈의 움직임을 막았다. 협죽도의 독성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한 시진만 운기조식하면 얼추 빼낼 수 있으리라. 다만 놓친 선자들이 문제인데, 그것도 크게 걱정할 바는 아니었다.

“늙은 여우야, 아쉽게도 네 제자들은 다 죽을 거야. 설마 나 혼자 이곳을 지키리라 생각한 건 아니지?”

“뭐?”

자신만만하던 소정의 낯빛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설마 아니겠지, 아니겠지 마음을 가라앉혀 보았지만, 봉천의 다음 말이 그녀의 바람을 무참히 짓밟아 놓았다.

“요 앞에 합쳐지는 길에 말이다, 우리 형님이 기다리고 있거든. 그래, 너도 잘 알겠구나. 사호세주의 수장 우리 곡해고 형님 말이다.

*** 초미지급(焦眉之急):

눈썹에 불이 붙은 것과 같이 매우 위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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