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目前之計(목전지계)
금천은 려국의 땅이었을 때에도 드나드는 사람이 없던 오지였다. 하여, 다섯 개의 고을을 통하여 도달하는 외길 이외에는 어떤 경로도 찾기 어려웠다.
선운검파와 관할의 문파 선유당은 그중 온수로 통하는 길을 선택했다. 거리는 가장 멀었지만, 다른 네 곳보다는 꽤 평탄한 지형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온수를 벗어나자마자 험준한 고갯길의 시작이었다. 체력적 한계에 부딪힌 선자들에게는 고될 수밖에 없었다.
전의를 상실한 선운검파와는 달리, 선유당의 젊은 당주 한율과 그의 제자 여섯은 아직도 기운이 넘쳐흘렀다. 사지(死地)에서의 결전을 준비하는 이들이 아니라 흡사 새로운 탐험을 즐기는 모험가와 같은 모습이었다.
“당주님, 직접 만나 보니, 오대산검도 별 게 아니지 않습니까? 장문과 두 장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약골입니다.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으나 체력과 정신력은 영 형편없습니다.”
앞쪽에 가는 선운검파의 무리와 얼마간의 거리가 벌어지자, 제자 중 하나가 슬그머니 한율에게 이죽거렸다. 고작 보잘것없는 선자들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자신들의 처지가 못마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한율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흥분한 제자의 어깨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잘 들어라. 비록 선운검파와 동행하고 있으나 위기가 닥쳤을 때는 각자도생이란다. 지금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이 길이 순식간에 피바다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뛰어든 일은 그만큼 위험천만하거든. 생각지도 못한 적이 튀어나올지도 모르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정작 선운검파가 우리의 뒤통수를 치면 어찌합니까? 저들을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제자는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어차피 탐욕에 눈이 먼 사람들의 집합소가 될 거라면 선자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테니까. 그들의 명을 따르고 호위하는 처지가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 전에 우리가 먼저 친다.”
“네?”
드디어 본심을 드러낸 한율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애초에 그는 오대산검이 제시한 원정대 계획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대산검과 관할 문파가 동등한 자격이라고 했으나 막상 조직도를 보니 한쪽에만 치우친 구성이었다.
아무리 험준하다 한들, 오대산검 인원의 반절도 되지 않는 여섯에서 열이 소 문파들에 배정된 최대 인원이었다. 그들에게는 애초에 선택지가 없었다. 오대산검의 수하, 혹은 방패막이 정도의 역할이 전부였다.
“우리는 이 일에 문파의 운명을 걸었다.”
한율은 장원을 떠나기 전, 나름대로 철저한 계획을 세웠다. 저 앞에 보이는 고개를 하나 더 넘으면 대나무가 빽빽한 산길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또한, 미리 매복해 둔 이십여 명의 제자가 숨어 있었다.
“결정적 순간까지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된다.”
최정예 제자들을 떠나보내기 전, 한율은 간곡히 부탁했다. 이 작전의 성공 여부는 비밀 엄수에 있었다. 하여, 자신과 매복한 제자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작전을 알지 못했다. 뿐인가? 지금 그의 옆에 함께하는 이들은 항렬이 높지 않은 새내기들이었다. 부러 선운검파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한 눈가림인 셈이었다.
“당주 한율은 음험한 자입니다. 지금도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제자들과 쑥덕이고 있네요. 어찌할까요?”
그들을 유심히 관찰하던 보현이 소소정에게로 다가와 은밀히 고했다. 오랜 동맹이었으나, 선유당에 대한 신뢰는 바닥이었다. 그저 위험한 상황이 닥쳤을 때, 방패막이로 쓰면 그뿐. 그 흔한 동료애도, 연민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내버려 두어라. 어차피 저들이 무슨 짓을 꾸미든 헛수고일 테니까.”
“하지만,”
보현은 좀 더 대거리하려다가 장문의 표정을 보고는 말을 멈췄다. 아까부터 그녀의 얼굴에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소정은 이미 이곳에 와 본 기억이 있었다.
‘세상은 한참 전에 변했건만, 이곳은 그대로구나.’
려국 땅에 발을 디디면서부터 가슴 한쪽이 슬금슬금 아파 왔다. 순진무구했던 젊은 날, 오직 연정 하나만 품고 달려온 그 길이었다. 문파도 나라도 그때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파국으로 끝나긴 했지만, 그 추억만큼은 마음속에서 도려내지 못한 채였다.
“가은의 동태를 잘 살펴라. 분명 장문주와 내통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풍림 정은률이 따라붙었을지도 모르지. 절대로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네, 문주님.”
문득 정신을 가다듬은 소소정이 뒤따라오는 보현과 기정에게 신신당부했다. 지금 그들이 믿을 만한 것은, 오직 가은이 가진 열쇠였다. 아니, 그 아이의 존재가 강운선에게 미끼가 될지도 몰랐다.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한다?’
곁눈질로 사부와 사숙들을 보며 가은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사문의 열두 제자가 자신을 둘러싸고 지키는 중이니 잔꾀를 부려봤자 어림없었다. 게다가 아까부터 몸에 으슬으슬 한기가 들었다. 조만간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 때문에 더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문주님, 다음 고개를 넘으면 구의와 겹쳐지는 외길입니다. 길이 좁고 험준하여 말도 들이지 못하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하여, 저희가 먼저 길을 열어 동태를 살핌이 어떻겠습니까?”
산길로 굽어지는 마지막 고개를 넘기 직전, 한율은 부러 말을 달려 소소정의 앞길을 막았다. 세상 예의 바른 태도였으나 그의 딴에는 덫을 완성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사실, 선뜻 허락해주지 않아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그 장소를 들어서는 순간, 선운검파는 독 안에 든 쥐가 될 테니까.
“마음대로 하십시오. 말씀처럼 절대로 허투루 보면 안 되는 길입니다. 숲이 울창하여 한낮에도 어두운 곳이거든요. 매복하기 딱 좋은 장소이지요.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
“아, 아. 며, 명심하겠습니다.”
소소정의 의미심장한 말에 가슴이 섬뜩해진 한율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찝찝한 기분을 애써 부정하며 그는 일행 쪽으로 수신호를 보냈다. 잘 훈련된 여섯의 제자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선운검파를 하나둘 앞지르기 시작했다.
“잠깐 쉬어라.”
그들이 모두 고개를 넘어가는 순간, 소소정은 손을 들어 행렬을 멈추었다. 당연히 선유당의 뒤를 따를 줄 알았던 선자들은 장문이 내린 의외의 명에 다들 어리둥절해졌다.
“저들이 앞서가서 무슨 수를 쓰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이미 수를 써놓았을까 봐 그러는 것이다.”
기정의 질문에 소소정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는 누구보다 금천으로 가는 길에 대해 빠삭했다. 저 고개를 넘어가면 빽빽한 대나무 숲이 나올 터였다. 나무 뒤에도, 나무 위에도 누군가가 숨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한율은 야망이 큰 인물이다. 지금은 비록 작은 장원에 고작 백여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으나 꿈은 오대산검의 일원이 되는 것이지. 이번처럼 좋은 기회가 어디 쉽게 오겠느냐? 우리를 몰살하더라도 핑계가 좋지 않으냐? 지금 이곳은 그야말로 사냥터와 다름없으니 말이다.”
“과연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헌데, 문주님은 저놈의 꿍꿍이를 언제 눈치채신 겁니까?”
소소정은 장로들의 질문에 빙그레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한율의 검은 속내는 이미 원정대를 꾸릴 때에 드러났다. 평소라면 오대산검의 반절로 적은 인원에 버럭 화를 내고 대거리를 할 그가 너무 순순하게 응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꽤 오래전부터 선운검파를 무시하고 있었다.
‘만약 동행하는 조가 황석파나 두타공파였다면 감히 대들지 않았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가슴이 또 한차례 찌릿해졌다. 자신의 친언니를 죽이고, 황석파의 어린 장문에게 빌붙으면서 지켜온 사문이었다. 오직 선운검파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사모했던 이를 배신했고 피붙이 딸을 무참히 버리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무엇이 남았는가? 소소정의 공허한 눈이 천천히 가은 쪽을 향했다.
‘아니다, 저 아이를 이용하여 그곳을 찾아낸다면, 선운검파를 지킬 수 있다. 더는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문파로 거듭날 수 있다.’
“문주님, 언제쯤 출발할까요?”
“이제 시작하자꾸나.”
반 시진쯤 지났을까? 소소정은 제자들을 불러모아 일일이 검진의 위치를 바로잡았다. 사방에서 적이 나타나더라도 감히 파(破)할 수 없는 견고한 진법이었다. 선유당은 수적 우세를 앞세워 공격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한 가지.
“대나무 숲은 매복이 쉽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포위가 어렵다. 고개가 험준하여 어렵겠지만 우리는 몇 마리 말을 끌고 올라간다. 숲에 다다라서 말을 먼저 풀어놓으면 그들의 대열은 금세 흐트러질 것이다. 우리의 견고한 진법으로 되레 그들의 퇴로를 막는다면 쉬이 진압할 수 있다.”
그 외에도 계획을 세세하게 전달한 소소정은 무리의 맨 앞에 나섰다. 고작 선유당 따위에게 위협을 받는 작금의 상황이 치욕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잘된 일이기도 했다. 미리 흑심을 드러냈기 망정이지, 정작 중요한 순간에 뒤통수를 쳤다면 꽤 골치가 아팠으리라.
쉬익!
그때, 심상치 않은 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들려왔다. 누군가의 휘파람 소리 같기도, 짐승의 울음 같기도 했다. 안 그래도 곧 있을 결전 때문에 불안한 선운검파의 제자들은 불길한 기운에, 더럭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사부님,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그저 산새가 지나가는 소리 아니냐?”
기정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어린 선자들에게 겁을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한 발 앞장서서 바위 언덕에 올라섰다. 그런데,
“어엇!”
그녀는 바로 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예상대로라면 빽빽한 대나무의 푸르른 숲이 나타나야 했다. 그러나 눈앞은 온통 핏빛이었다. 부러진 대나무 가지마다 사지가 찢기고 베인 수십의 사람들이 빨래처럼 널려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 떨어진 피가 외길 가운데에 모이고 모여 거대한 웅덩이가 되었다.
“으아아아악!”
뒤따라 올라온 제자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걔 중에는 충격을 받아 바위에서 미끄러지는 이도 있었고, 애써 끌고 올라온 말을 놓치기도 했다. 이제 그들이 싸워야 할 대상은 어리숙한 선유당의 무리가 아니라 정체도 알 수 없는 악귀였다. 여태 연습하고 숙지했던 진법은 그들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미끄러지고 자빠지고 도망치는 선자들의 얼굴에는 너도나도 공포였다.
“침착해라! 진법을 펼쳐라!”
그나마 강호 경험이 많고 침착한 보현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제자들을 보호하는 한편, 재빨리 기정에게 눈짓하여 가은의 신변을 보호했다. 상대가 누군지는 몰라도 선유당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단한 무공의 소유자임이 분명했다. 만약 감당할 수 없다면, 장문과 가은만이라도 이 지옥도에서 탈출시킬 작정이었다.
“어머! 여기 예쁜 언니들이 많네?”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에 귀청이 찢어져 나갈 것 같았다. 분명 걸걸한 사내의 목소리인데 한껏 어조를 높여 여성스럽게 내는 것이, 퍽 역겨웠다.
“일단 수적으로는 우리 쪽이 우세합니다. 저자야 무공이 높아 기척을 감췄다고 해도 다른 이의 살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장문께서 가은을 데리고 길을 뚫고 나가십시오. 저자는 저희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보현은 소정에게 공수하며 이후의 명을 기다렸다. 이 일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했던 장문이라면 절대로 반대하지 않을 작전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틀렸다.”
“네?”
소소정의 얼굴에는 짙은 낭패감이 가득했다. 불안한 눈동자는 이미 그들이 이 숲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소용없다. 너희는 감당하지 못한다. 차라리 내가 남아 시간을 벌 테니, 너와 기정이 가은을 데리고 빠져나가라. 금호와 구의가 합쳐지는 길에서 고대산파와 만나기로 하였다. 그때까지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라.”
“문주님?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희가 충분히…….”
“명이다.”
보현을 바라보는 소정의 눈에 굳은 결심이 보였다. 사매들에 대한 불신도, 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결정은 오직 사문을 지키겠다는 숭고한 희생의 마음이었다.
“내가 쫓아오지 않거든, 일전에 말한 대로 일을 처리하면 된다. 보현아, 너만 믿는다.”
“문주님, 도대체 저자가 누구길래 이러십니까?”
소정은 그제야 보현의 등 뒤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가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만나본 적이 있어, 그 공포를 누구보다 잘 알 터였다. 저 끔찍한 악귀를 무려 두 번이나 만나다니, 정말 재수가 없는 아이가 아닌가? 처음으로 가은에게 연민이 느껴졌다.
“천서국 사호세주의 지국천왕 봉천. 그라면, 선유당 따위를 멸문하는데 한 시진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 목전지계(目前之計):
눈앞에 보이는 한때만을 생각하는 것. 임시적인 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