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笑裏藏刀(소리장도)
“네 이놈!”
설요의 외침을 시작으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 사람이 달려들었다. 좌우의 정가 형제는 완전히 같은 검법이었으나 좌우를 다르게 시연하여 마치 거울을 마주 보는 것과 같았다. 형이 뻗은 검이 적의 배꼽을 찔러 들어가면, 아우의 검은 이미 등 뒤에 있었다. 몸을 옆으로 돌리려고 해도 전면에서 날아드는 설요의 검을 마주해야 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고작 그 정도 실력으로 허세를 부렸더냐?”
아군의 기세가 오르자, 설요의 어깨가 한층 올라갔다. 상대가 너무 자신만만하여 위축된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홍이성의 실력이 자신보다 크게 뒤처지지 않을진대, 너무 쉽게 나가떨어지는 모습에 겁이 더럭 났다. 헌데, 막상 부딪혀 보니 어떤가? 이름 모를 강호의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빈 것과 다르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데?’
그러나 지켜보는 운선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다. 세 사람의 검을 맞서면서도 아무런 병장기를 꺼내지 않는 흑의인의 태도가 사뭇 괴이했다. 그는 팔짱을 낀 채로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하기만 할 뿐이었다. 어쩐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의지가 엿보였다.
캉!
캉!
“어엇!”
“형님, 조심하십시오.”
삼십여 초가 지났지만, 상황은 그대로였다. 흑의인이 요리조리 피하는 바람에 오히려 같은 편의 검끼리 맞부딪치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심지어 호흡이 흐트러진 정가 형제는 마주 보는 자신의 형제를 찌를 뻔도 하였다.
‘안 되겠다. 이러다 체력을 다 소진하겠구나. 일단 내가 빠졌다가 기회를 보아 다시 끼어들어야겠다.’
여기까지 생각에 다다른 설요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고작 한 장 거리를 벌렸으나 검기의 움직임이 훨씬 잘 보이게 되었다. 그렇다고 흑의인에게 더 유리한 상황이 된 것은 아니었다. 정가 형제의 초식은 여전히 신묘했으며 두 개의 검 끝이 요혈을 찌르고 들어오니 매 순간이 위기였다.
“기휼”
“풍휼”
마치 한 몸과 같은 칼 사위가 어지럽게 펼쳐졌다. 형 쪽이 무려 일곱 번이나 검을 휘두르자 흑의인은 어쩔 수 없이 우측으로 물러섰다. 이 틈을 타, 아우가 횡으로 검을 쓱 베어냈다. 아니나 다를까, 미처 피하지 못한 흑의인의 오른쪽 소맷자락이 뎅강 잘려나갔다. 초식의 이름 그대로 기휼의 수법이었다.
“가소롭구나.”
어느새 구경꾼이 된 설요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배시시 웃었다. 굳이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적을 제압하니 여간 기쁘지 않았다. 정가 형제의 실력이라면 일이 수월하겠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때,
“엇!”
흑의인이 고작 오른손을 크게 휘둘렀을 뿐이었다. 여태 날랜 동작으로 사방팔방 뛰어다니던 정가 형제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그들이 자각했을 때는 이미 자신의 검도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으악!”
아니나 다를까, 필사적으로 쭉 뻗은 형의 칼은 흑의인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 아우의 단중혈에 박혀 버렸다. 비극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수직으로 내리꽂은 아우의 칼 역시 형의 어깨부터 가슴까지 대각선으로 베어내었다.
“흥, 머저리들.”
두 형제에게서 쏟아져나온 피로 붉은 우물이 만들어졌다. 흑의인은 혹여 자신의 옷자락에 피가 묻을까 봐, 발끝을 들어 시체 사이를 빠져나왔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으나 복면 아래 감춰진 얼굴은 분명 웃고 있었으리라.
“헉, 말도 안 돼.”
쉬이 상대를 제압하리라 생각했던 설요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제 앞에 세워 놓을 동료도 없으니 오롯이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손발이 저리고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검 자루를 쥔 오른손이 덜덜 떨려 제대로 검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러길래, 함부로 입을 놀리면 쓰나? 온갖 강구들을 한곳으로 불러 모았으니 대가는 치러야 할 게 아니냐?”
흑의인의 갈고리 같은 손이 순식간에 설요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왔다. 본능적으로 검 자루를 들어서 막았으나,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었다.
통!
통!
고작 손가락을 두 번 튕겼을 뿐인데, 설요의 검은 큰 반원을 그리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그였기에 검을 제대로 들고 있을 수도 없었다.
“윽!”
흑의인은 왼손으로 그의 목덜미를 잡아 비틀었다. 숨통이 막혀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은 상황에서도 설요는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았다.
“살, 살, 살려 주시…….”
“큭큭.”
상대의 비굴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흑의인은 당장에 목을 비틀지 않고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뺐다, 반복했다. 설요가 파래진 입술로 오물거리는 모양이 재밌다는 듯,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비웃어 댔다.
“여기서 살아나가면 또 무슨 말을 나불댈 줄 누가 아나? 난 떠버리는 딱 질색이거든.”
“으헉, 콜록콜록.”
흑의인이 오른손에 슬며시 힘을 빼니, 설요가 숨을 훅 내쉬며 혀를 쭉 내밀었다. 상대가 언제 다시 숨통을 조일지 모르니 최대한 들숨을 모으기 위한 발악이었다. 그러나,
“으아아!”
“앞으로 평생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할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흑의인은 입 밖으로 삐져나온 설요의 혀를 거칠게 잡아 뜯었다. 사방으로 피가 튀는 끔찍한 현장은 차마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기도를 막을 만큼의 혀를 남겨두지 않았다는 점이랄까? 그 덕에 질식사는 피한 셈이었다.
“욱!”
바닥에 떨어진 설요의 혀를 확인한 아란은 욕지기를 참기 어려웠다. 운선이 입을 막고 있는데도 헛구역질이 절로 나왔다.
“누구냐?”
흑의인은 설요의 처절한 비명 속에서 낯선 목소리를 찾아냈다. 여기에 또 다른 누가 있나? 혹여 그렇다면 정체를 들키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설요를 잡은 손아귀에 힘을 빼 버렸다.
“으아아아아!”
“이런.”
고통에 찬 설요가 휘두른 손은 흑의인의 귓가를 세게 후려쳤다. 미처 피하지 못한 그가 고개를 휙 돌리는 순간, 단단히 묶어두었던 복면의 매듭이 설요의 손가락에 걸리고 말았다.
스으윽!
아주 잠깐, 설요는 복면이 벗겨진 흑의인의 민낯을 대면했다. 상대를 알아본 그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세차게 흔들렸다. 예상치 못한 존재의 등장은, 이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뇌리에 정확히 꽂혔다.
“으, 으으으…….”
‘제길. 아무것도 알아낸 게 없는데, 할 수 없구나.’
아직 쓰임이 남은 설요건만, 이미 틀린 셈이었다. 자신의 정체를 까발리기라도 한다면, 앞으로의 계획을 다 망칠지도 몰랐다. 결정을 끝낸 흑의인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오른손에 장력을 모으자마자 설요의 이마를 향해 내리꽂았다.
툭!
퍽!
어딘가로부터 날아온 돌은 정확히 흑의인의 손등에 맞고 떨어졌다. 내력을 거의 담지는 않았어도 손등은 금세 퉁퉁 부어올랐다. 만약 요혈에 맞았더라면 단숨에 골절될 정도의 엄청난 위력이었다.
“누구냐?”
흑의인은 벗겨진 복면을 재빨리 끌어 올리며 일갈했다. 급하게 던진 돌멩이가 이 정도 힘이라면 필시 고수가 틀림없었다. 넘어진 설요를 발로 뻥 차는 동시에 곧바로 검을 꺼내 들었다. 싸움이 벌어지고 처음 손에 든 무기였다.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당신, 누구입니까? 어째서 태을신공을 쓸 줄 아는 겁니까?”
드디어 달빛 아래, 운선이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었다. 어두워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와 일면식이라도 있는 상대라면 바로 알아볼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강운선?”
흑의인의 눈가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의 등장에 퍽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는 품속을 재빨리 뒤져 다섯 개의 구슬을 꺼내 들었다. 말릴 틈도 없이, 이내 바닥에 내팽개치자 요란스러운 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졌다.
톡, 톡, 톡, 톡, 톡
푸쉬!
구슬이 깨지는 즉시, 갈라진 틈으로 희뿌연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연막탄이었다.
“이런,”
뒤늦게 눈치챈 운선이 서둘러 보법을 사용했으나, 딱 한 자 거리 앞에서 흑의인의 옷깃을 놓치고 말았다. 아무리 운선이라지만 작정하고 도망치는 상대를 쉬이 막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으아아아악!”
상대의 손아귀에서 풀려나긴 했지만 설요의 얼굴에는 또 하나의 큰 상처가 남았다. 운선의 돌 때문에 조준이 비껴간 흑의인의 손이 그대로 얼굴 위에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설요의 눈을 비롯하여 눈 주변이 내력이 분출한 화기로 인해 붉게 타버렸다. 언뜻 보아도 실명이었다.
“도대체 누구길래, 이리도 잔인한 겁니까?”
뒤늦게 쫓아온 아란이 설요와 그의 일행들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완전히 폐인이 된 설요와 홍이성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정가 형제는 서로의 검에 몸이 관통한 채로 절명한 지 오래였다.
‘분명 태을신공이다. 이처럼 화기를 응축하여 방출할 수 있는 내공은 내가 아는 한, 그것밖에 없다. 그런데 사백님도 대사형도 없는 지금, 나 외에 이 정도 신공을 구사할 만한 사람이 존재한단 말인가?’
설요의 화상을 살펴보는 운선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그는 자신이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앞으로 이십여 년은 강호를 후리고 다닐 만큼 앞날이 창창한 자객이었다. 극도의 죄책감과 정체 모를 흑의인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다.
“이게 그 유명한 태을신공인가요? 허나, 검귀가 죽은 지금 당신 말고 누가 또 그걸 사용한답니까?”
“…….”
정답을 모르는 운선은 아란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대신 설요와 홍이성의 사이를 바쁘게 이동했다. 어떻게서든 두 사람의 목숨을 구해내고 싶었다. 다행히 홍이성의 상처는 상대적으로 덜 심각했다. 내상이 깊으나 설이의 단약을 먹였으니 며칠은 버틸 터였다. 또한, 팔 골절만 있을 뿐 외상은 가벼운 편이었다. 급한 마음에 운선은 혼절한 그의 인중을 세게 눌렀다. 그제야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홍이성의 의식이 돌아왔다.
“홍대협, 잘 들으십시오. 이 길로 설대협을 데리고 마을로 가 의원을 찾으세요. 당장 치료받지 않으면 사흘을 넘기기 어려울 겁니다. 요행히 목숨을 구하게 된다면 여기서 산 하나를 넘으세요. 금호와 연결된 샛길이 나올 겁니다. 그곳을 지나는 남녀가 보이거든, 도움을 요청하세요.”
“네네.”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구하고픈 운선의 발악이었다. 그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는 아란의 눈빛에는 묘한 불쾌감이 서렸다.
‘이 모든 분란의 시작점이 누구인가? 강운선, 참으로 가증스럽구나.’
한없이 냉정하면서도, 때로는 측은지심을 발휘하는 그에게 역겨운 마음이 들었다. 하여, 당분간은 이 음흉한 마두의 곁을 지키며 관찰해 보리라 생각하는 아란이었다.
*** 소리장도(笑裏藏刀):
겉으로는 상냥하게 대하지만 속으로는 상대방을 해칠 뜻을 품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