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昏庸無道(혼용무도)
경국의 관할로 귀속된 지역은 옛 려국의 경제 거점이었다. 온수, 구의, 금호, 갈매, 그리고 도농이 그러했다. 하여, 이미 그곳에서 려국의 색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십여 년간 자리 잡은 경국 세족들을 중심으로 그들만의 색이 덧입혀진 탓이었다.
“세월 참 무상하구만.”
도농 성곽을 넘어서자마자 금형권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끌끌 찼다. 수십 년 전의 그곳과는 사뭇 다른 풍광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곳에 되었으나 려국 특유의 고풍스러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여기서 잠시 쉬어갑시다.”
그는 장터를 들어서는 길목에 이르러서야 마차를 세웠다. 열흘 가까이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산길을 넘어온 터였다. 모처럼 큰 고을을 만났으니 재정비라도 할 참이었다.
“근방에 객잔이 여러 곳이니 묵어가는 게 좋겠소.”
“그러시지요.”
운선은 형권의 의견에 흔쾌히 동의했다. 목치수 일행을 쫓아온 길이기는 했으나 급할 것은 없었다. 공주를 데리고 있으니 불안한 쪽은 오히려 상대였다. 사실상 그들을 인질로 삼은 순간부터 칼자루를 쥔 쪽은 운선이었으므로.
“공주님, 내리시지요.”
“흥, 누가 누구에게 명령이에요?”
아란은 계획한 모든 일이 어그러지자 좀처럼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하여 동행하는 내내 온갖 신경질과 짜증을 부린 터였다. 지금도 선심 쓰듯이 배려하는 운선의 태도가 고깝기만 했다.
“네네, 어련하시겠습니까?”
톡 쏘아붙이는 아란의 말투에 기분이 상하기도 하련만, 운선은 예의 친절함을 잃지 않았다. 황궁에서 오냐오냐 자랐을 공주님이니 이 정도 까탈은 충분히 예상한 바였다. 오히려 권모술수에 능하거나, 과하게 어리숙하지 않은 점이 편하기도 했다.
작은 객잔에 행장을 푼 세 사람은 오랜만에 푸짐한 저녁을 먹었다. 화기애애하지는 않았지만, 남들이 볼 때는 세 사람의 관계가 결코 적대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되레 형권은 늘 예의 바른 운선에게 호감을 느낄 정도였다.
“여기서 금천으로 가는 길은 외길이라 합니다. 중간에 구의에서 오는 길과 겹쳐지니, 운이 나쁘면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날지도 모르지요. 하여, 그전에 우리 아우들을 만났으면 합니다.”
술 한 동이를 비워갈 때쯤, 운선은 본론을 꺼내 들었다.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기에 형권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안 그래도 황금산 어귀에서 만나자는 전갈을 받은 참이오. 대신, 그곳의 입구까지 우리를 안내하기로 한 약속은 꼭 지키시오.”
“그럼요.”
아란은 속없이 운선에게 호의적인 형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김새와 달리 순진하기만 한 사숙이 저 대 마두에게 속아 큰 사달을 낼 것만 같았다. 하여, 운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형권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사숙, 언제까지 이 치욕을 견뎌야 합니까? 저 무뢰한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틈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아서라, 괜히 그러다가 다치기만 한다. 곡 형님도 말씀하셨다시피 저이의 실력은 가늠할 수 없다. 목 형님을 만난 후에 다음 행동을 결정해도 늦지 않다.”
아란은 여전히 속 편한 소리를 하는 사숙이 답답하여 가슴을 쿵쿵 내리쳤다.
“그가 국사님을 만나고자 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 사내 두 놈이 가진 열쇠를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목적을 다한 후에 어떤 꼼수를 부릴지 알 수 없지요.”
“그, 그럴까?”
그러고 보니, 아란의 말이 일리가 있는 듯도 하였다. 사실 금형권은 사형제들을 만난 이후에 스스로 어떤 결정을 내려본 적이 전혀 없었다.
“그럼 봉천이 합류할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려보자.”
“사숙!”
마침 자리로 돌아온 운선 때문에 더는 따지고 들지 못했다. 입술을 앙다문 아란의 얼굴에는 불편함과 불쾌함이 가득했다.
‘저 여우 같은 놈은 필시 제 이의, 제 삼의 계책을 세워 놓고 우리를 유인하려 하는 것이다. 이대로 그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되면 애써 확보한 열쇠를 뺏기는 것은 물론이고, 더 불리한 상황에 부닥칠지도 모른다. 어차피 사숙은 아무 생각이 없는 듯하니 나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 틈을 노리는 수밖에 없다.’
목치수의 입장에서야 공주인 자신을 먼저 구하려 들 것이었다. 그러면, 힘들게 인질로 잡은 신교도들을 풀어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들을 만나기 전에 몸을 빼내는 것만이 열쇠를 얻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공주님, 행여 다른 생각은 마십시오. 제가 의외로 눈치가 빠르고 예민하여 잠이 잘 깬답니다. 어차피 도망가지 못할 테니 푹 쉬기라도 하시지요.”
“뭐라고요?”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 것 같은 운선의 말에 아란은 괜히 역정을 내어보았다. 최대한 태연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코끝이 새빨개졌다. 그 모습이 너무 솔직해서 운선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보란 듯이 도망쳐서 네 놈의 계획을 다 망쳐버릴 테다!’
객잔은 규모가 작아 좁은 방 십여 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형태였다. 하필 운선과는 마주 보는 방이었기에 소리를 내지 않고 문밖을 나오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아란은 부러 일찍 방으로 들어와 거의 반 시진이 넘도록 곳곳을 둘러보았지만 영 소득이 없었다.
‘그나마 지붕으로 올라가는 수가 최선이다. 최대한 소리를 죽여야 할 텐데, 어찌한다?’
일단 뭐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탁자에 의자까지 올려, 아슬아슬하게 그 위에 서 보았다. 다행히 천장에 손이 닿으니, 잘만 하면 지붕으로 올라설 수 있을 듯싶었다.
“응차!”
태어나서 처음으로 온몸에 먼지를 묻혀가며 대들보 위로 기어올랐다. 모처럼 새로 장만한 옷이 못 쓰게 되니 절로 신경질이 났다. 이게 다 강운선 때문이다. 점점 더 마음속에 미움이 들어차는 기분이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무난하게 방을 벗어날 수 있었다. 혹시나 하여 숨을 죽이고 잠시 기다렸지만, 별다른 기척은 없었다. 다행히 들키지 않은 모양이었다.
‘흥, 그럼 그렇지. 잠귀 밝다고 허세는…….’
이 정도면 성공이라 할 만했다. 제법 서늘한 밤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조심스럽게 기왓장을 지르밟았다. 자분자분한 바람 소리 외에는 크게 거슬리는 소음은 없었다. 그때,
“어?”
순간, 거대한 검은 무언가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몰려오는 먹구름 같기도, 포악한 들짐승 같기도 하였다.
‘설마, 자객인가?’
아란의 시선이 장터를 지나 고개를 훌쩍 지나가는 그림자를 빠르게 쫓았다. 아주 잠깐 망설이기는 했으나 결국 이성이 호기심을 이기지는 못했다. 수상한 정황은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법. 그녀는 보법을 사용하여 검은 그림자의 뒤를 쫓았다.
휘이익!
사삭!
상대는 무공의 고수임이 틀림없었다. 눈 깜짝할 새에 사라지는 그를 쫓기 위해 아란 역시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금세 두 장 거리 남짓 사이로 따라잡았다. 달빛 없는 어두운 밤이었기에 망정이지, 앞선 상대가 눈치채기에 충분히 가까운 거리였다.
‘이러다 들키면 낭패다.’
더럭 걱정이 든 그녀는 주변을 휘둘러 보았다. 고작 고개 하나를 넘었을 뿐인데 향나무가 빽빽한 숲길이었다. 다행히 나무 기둥이 제법 굵으니 웬만한 덩치는 숨길 수 있을 듯싶었다. 아란은 제일 굵어 보이는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는 천천히 숨을 가라앉혔다.
“도대체 누군데 우리를 따라온 것이냐? 정체를 밝혀라!”
채 숨을 고르기도 전이었다. 벼락같은 호통이 온 숲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아, 망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따라오지 말걸. 그러나 이제 와 후회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란은 본능적으로 편초를 꺼내 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일단 기습적으로 대들어 유리한 입장을 확보하는 게 나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얼른 모습을 드러내라!”
“자, 읍!”
할 수 없이 막 나무를 등지고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거친 손 하나가 쑥 나오더니만 아란의 입을 단단히 틀어막았다. 그러더니 곧 귓가에 아주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쉿, 잠깐.”
‘강운선?’
아란은 차마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고 눈동자만 또르르 굴렸다. 언제 이 여우 같은 놈이 따라왔단 말인가? 눈앞에 처한 위기보다도 운선에게 들켰다는 사실이 더 절망적이었다.
“네놈이 사흘 전부터 따라붙은 걸 모를 줄 알았더냐? 감히 우리가 누군지 알고 함부로 뒤를 밟는가?”
“제법 눈치는 있구나.”
아란은 그제야 자신이 완전히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호통을 친 주체는 그녀가 따라온 흑의인이 아니었다. 또한, 그 대상도 애초에 그녀가 아니었다.
“쫓은 이유가 있을 터, 그것부터 밝혀보자.”
“아니, 형님. 우선 저놈 면상부터 봅시다.”
뒤편에 서 있던 이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몹시 못마땅한 말투였는데 당장이라도 흑의인에게 달려들 것처럼 살기가 가득했다. 그러나 정작 흑의인의 태도는 태연하기만 했다.
“어차피 이곳이 당신들 무덤일 텐데 내가 누군지는 알아서 뭐 하게?”
어둠 속에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흑의인은 여유롭게 팔짱을 꼈다. 반가운 친구라도 만난 마냥 한껏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네놈이 이래도 그리 거만한가 보자.”
이번에는 좌우에서 하나씩 인영이 튀어나왔다. 처음부터 계획한 모양인지, 지주망처럼 네 사람이 위치를 잡았다. 숲으로 들어서는 입구를 제외하면 완전히 둘러싸인 셈이었다.
“꼴값이구나.”
“뭐?”
좌우에 선 두 사람은 대번에 검 자루를 고쳐 잡았다. 수적으로 보나, 상황으로 보나, 훨씬 유리한 입장이다 보니 조금도 거칠 것이 없었다. 마냥 허세를 떠는 상대가 우스울 뿐이었다.
“설대협, 기다려 무엇합니까? 몸뚱이를 가른 후에 정체를 알아내도 늦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명을 주십시오.”
네 명의 얼굴이 달빛 아래 드러나는 순간, 아란은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했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들의 등장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달포 전, 객잔에서 만났던 도우객 설요와 그의 일행이 분명했다.
“우리는 의와 협을 아는 무인이오. 상대의 의중도 모르고 함부로 살인할 수는 없는 일. 서로 간에 오해가 있으면 풀고, 은원이 없다면 갈라섭시다.”
“큭큭.”
흑의인은 설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리를 구부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그의 건방진 태도에 잠시 완화되었던 분위기는 조금씩 무거워졌다.
“뭐가 그리 우스운가?”
“이보시오, 설대협. 겁이 나면 차라리 대놓고 얘기하십시오. 의니, 협이니, 어울리지 않는 말을 주절거리지 말고. 당신은 강호에서 내로라하는 겁쟁이가 아닙니까?”
“뭐야? 이놈이!”
오히려 참지 못한 쪽은 홍이성이었다. 왼발로 바닥을 힘껏 구르는 동시에, 날렵하게 한 바퀴를 빙그르르 돌았다. 단숨에 적과의 거리를 한 장 가까이 좁히더니만 그대로 묵직한 검을 쭉 들이밀었다. 단순한 동작이었으나 그만큼 명쾌하고 깔끔했다. 제대로 명치에 꽂히기만 한다면, 최소 치명상이었다.
“흥!”
흑의인은 피하기는커녕, 되레 날아오는 검 쪽으로 손을 뻗었다. 무려 다섯 근이나 되는 검이었다. 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거니와 스치기만 해도 손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캉!
쿵!
“윽!”
어둠 속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홍이성의 검은 반으로 뚝 잘려 흑의인의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검의 주인은 두 장 이상을 뒤로 날아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어찌나 충격이 컸는지 혼자 힘으로는 일어날 수도 없는 모양이었다.
‘고작 한 합이었다.’
아란은 흑의인의 가공할 만한 내력에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늘 자신의 스승이 최강의 고수라 생각했던 그녀였기에,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터였다. 자신의 뒤에서 묵묵히 서 있는 강운선은 차치하더라도, 저 괴물 같은 고수는 또 누구란 말인가? 갈수록 태산이라는 말이, 그야말로 딱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운선 역시 정체 모를 자객의 등장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란과는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태을신공…….’
홍이성의 검에 실린 내력을 완전하게 튕겨내는 힘, 그것은 오직 태을신공밖에 없었다.
*** 혼용무도(昏庸無道):
세상이 온통 어지럽고 도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