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上火下澤(상화하택)
백로가 지나자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제법 서늘했다. 그 끔찍했던 여름이 끝났다는 사실에 강호인들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려 열 곳의 크고 작은 문파가 화를 당했으며 그중에 다섯 곳은 아예 멸문하였다. 특히 신계문의 비극은 충격 그 이상이었다. 곳곳에 남은 흑접영의 가면과 적우의 흔적에 신교와 강운선에 대한 분노는 점점 더 불타올랐다.
물론 모든 문파의 비극이 적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들은 그저 원망의 대상이 필요했고 그 역할에 가장 잘 어울리는 대상이 태을신교였을 뿐이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참극이 잦아든 것은 어떤 기이한 소문 때문이었다. 해심밀경소의 숨겨진 비밀, 그 진실이 옛 려국 땅에 묻혀있다. 처음에는 낭설이라 웃어넘겼으나 천서국의 사호세주가 움직였다는 다른 소문을 탄 이후부터 진짜가 되었다.
“하여, 우리 오대산검 역시 좌시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신교를 멸하고 무림맹을 쇄신해야 할 때입니다.”
“맞습니다. 무엇보다 새로운 맹주를 추대하여 결속을 다져야 합니다.”
“옳습니다.”
황석산에 모인 오대산검과 유명 문파의 인사들은 임시 무림 맹주 직에 장은을 앉혔다. 두타공파의 형진이 극구 장은을 추천하기도 했거니와 황제의 친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신교의 궤멸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결과였다.
“폐하께서 직접 나서신 것은 이 일이 경국의 흥망에 열쇠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근래 서이국의 세가 날로 커져 감히 주제도 모르고 국경을 침범하고 있지요. 려국의 보물을 빌미로 그들이 노리는 것은 바로 경국의 패권입니다. 물론 대대로 무림맹에서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허나, 나라의 위기가 닥친 이 시국에 더는 좌시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서이국이 어떤 나라입니까? 오랑캐가 감히 본국을 위협하는 하극상을 언제까지 봐줄 겁니까? 신교뿐 아니라 서이국 놈들까지 쓸어 버립시다.”
장은의 예상대로 무림인들의 동맹을 얻어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해심밀경소를 욕심내어 일어난 사달을 오로지 신교의 탓으로 돌리며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또한, 또 다른 욕망 실현의 기회를 얻은 셈이니 함께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반년간의 참극으로 수많은 인재를 잃었습니다.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서이국은 물론 신교를 괴멸한다,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맹주께서는 어떤 대안을 갖고 계십니까?”
고대산파의 고인경이 정중하게 읍하며 물었다. 제법 도전적인 질문이었다. 장은은 그의 불순한 의도를 눈치채고 감정이 퍽 상했으나 부러 내색하지는 않았다. 어느덧 매월검을 자유자재로 다루게 된 그를 예전처럼 업신여기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네, 고문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무려 열두 문파의 장문이 돌아가셨고 그중 일곱 곳은 아예 멸문하였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지요. 하여 이번 일에는 오대산검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대산검과 각 관할 문파들의 대표를 뽑아 다섯 개의 원정대를 꾸릴 것입니다. 각 무리의 수장은 오대산검의 장로직 이상이 맡아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옳습니다.”
장로직 이상이라고 했으나 기실 장문이 나서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약소한 십여 개의 문파에게는 그야말로 든든한 방패막이가 아닐 수 없었다. 뿐인가? 목표는 려국의 보물이었다.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해심밀경소를 쫓던 자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한마음으로 필승을 외치는 그들 마음속에는 각각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이제 명분이 생겼으니 그 이후의 결과는 각자의 역량 차이였다.
“황석파는 고사숙이 이끌어 주십시오. 관할 문파와 합하여 열둘이 한 조가 되니 잘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흥, 너는 뒷짐 지고 구경만 하겠다는 게냐?”
황석파의 요직만 남은 자리이니만큼 속내를 감추고 싶지 않았다. 고유생은 자신의 고생이 모두 장은의 공으로 돌아간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네가 무림 맹주가 된 게 누구 덕이냐? 황제 폐하의 명을 수행한 이는 나다. 내 손에 피를 묻혀가며 얻은 영광이 아니냐? 헌데, 그 자리에 냉큼 앉은 것으로도 모자라 나를 사지로 보내? 아주 배은망덕하구나.”
“말조심하십시오.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흥!”
장은은 다시금 주변을 살피고 문단속을 꼼꼼히 하였다. 고유생이 숨기고 있는 사실이 밝혀졌다가는 오대산검이 강호의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아무리 황실의 명이었다고는 하나 실행한 쪽은 어디까지나 오대산검이었다.
“우리는 지금 줄타기 중입니다. 표면적으로는 황실의 편에 섰으나 어디까지나 태자가 황위를 이었을 때! 반면 저는 뒤에서 금황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생각입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황급히 줄을 갈아타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이걸로, 사숙이 나서야 하는 이유가 되었습니까?”
“흥, 핑계 좋구나.”
이죽거리고 있었지만, 그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황제와 손을 잡은 쪽은 어디까지나 고유생이어야 했다. 그래야 다음 황제가 누구냐에 따라 언제든 바꿔 잡을 수 있을 테니까.
“사숙, 상황에 따라서는 일행을 버리거나 죽여야 할지도 모릅니다. 무조건 보물은 우리 황석파의 것이니까요.”
“안다.”
“저는 몰래 뒤를 따르며 다른 문파의 동향을 살피겠습니다. 특히 백형진의 태도가 수상합니다. 두타공파의 장문 직도 정암 장로에게 양보하더니만 이번에도 수장으로 나서지 않고 뒤로 빠진다고 합니다. 분명 다른 속셈이 있으니 그를 지켜보는 것 또한 제 몫이 아니겠습니까?”
고유생은 장은의 과한 걱정에 헛웃음을 쳤다. 조양이 죽은 후로 수오당에서 두문불출하던 형진이었다. 스승의 뒷배가 없으면 고작 귀한 집 도련님일 뿐인 것을.
‘멍청한 늙은이, 지금은 나를 겁쟁이라 여기며 비웃고 있겠지. 황제가 어째서 황석파를 선택했겠는가? 세상에 둘도 없을 충신 조양이 죽었으면 응당 그의 제자 형진을 불러들이는 것이 인지상정. 그러지 않고 고유생을 골랐다는 건, 형진을 믿지 못한다는 뜻이다. 어째서?’
계속 혼란스럽게 하는 물음의 답을 찾지 못했으므로 장은은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하여 고유생의 뒤에 숨어 일의 추이를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한 수였다.
고유생에게 몇 가지를 더 당부한 장은은 이번엔 은률을 향해 돌아섰다. 그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지도 한 장과 서신을 함께 건네며 앞으로의 일을 신신당부했다. 기실, 그가 이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다.
“너는 몸을 숨기고 선운검파의 뒤를 쫓아야 한다. 여차하면 그쪽 제자들을 다 죽여서라도 가은을 확보해라. 그 아이는 강운선을 겁박할 수 있는 유일한 미끼니까 말이다. 그도 여의치 않다면 열쇠라도 가져와야 한다. 약속한 때와 장소는 적어 두었다.”
“네, 사형.”
가은을 지키는 일이라면 자신 있었다. 사형에게는 미안하지만, 그의 명이 가은의 안위를 위협한다면 항명도 불사할 생각이었다.
‘천서국의 동선은 옛 려국의 중심부 금천이다. 곡해고와 대면하면 불리하니 그들의 경로에는 용문파를 보내어 미리 힘을 빼놓아야겠다.’
머리를 굴리는 장은의 얼굴에 오묘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이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온 일이었는가? 려국의 전설을 듣고 자란 덕에 어느덧 그곳은 장은의 숙원이기도 했다. 자신을 버리고 짓밟은 려국 왕실에 대한 복수, 이제는 처절한 한을 넘어 경국 황실의 충신으로 남을 미래를 향한 꿈이었다.
다 죽어가는 영인을 맞이한 소소정은 가슴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 같았다. 목숨은 어찌 살릴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사지의 경맥이 끊어졌으니 영영 무공을 잃어버릴 터였다. 뿐인가? 어쩌면 두 다리를 딛고 걸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열쇠도 찾지 못한 주제에 사형제들을 죽여서 왔으니 이 죄를 어찌 감당하겠느냐? 차라리 네년이 죽었어야지! 뻔뻔하게 혼자 살아 돌아왔어?”
분노로 부들부들 떠는 장문의 모습에 선운검파의 제자들은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러나 정작 가은의 태도는 태연하기만 했다. 두려워하기는커녕 눈에 쌍심지를 켜고 사부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저 또한 죽을 고비를 넘겨 겨우 돌아왔습니다. 같은 제자인데 왜 차별하십니까?”
“뭐야?”
벌벌 떨며 목숨을 구걸할 줄 알았던 가은이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자 소소정은 기가 턱 막혔다. 도대체 무슨 뒷배가 있길래 저리 당당한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왜, 제가 살아 돌아온 것이 그리 못마땅하십니까? 형주 사저의 죽음이 어째서 저 때문입니까? 사부님께서 은밀히 저를 죽이라 명하셨지요. 서로 똘똘 뭉쳐도 모자랄 판에 우리는 사형제를 죽일 궁리나 하고 있었던 겁니다. 하여 천서국의 자객에게 죽었으니 이게 과연 제 탓입니까?”
“이년!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느냐?”
“아직 더 남았습니다.”
가은은 꿇었던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이 순간을 적절히 활용해야 했다. 그래야 훗날 장문의 자리에 오를 때에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영인 사저는 끝까지 저를 지키다 저리되셨습니다. 친자매도 아니고, 심지어 어디서 굴러먹다 온 지도 모르는 저를 위해서 말입니다. 사부님이 무참히 버린 저를 오직 사저만이 감싸준 것이지요.”
‘오냐, 네년이 결국 황석파와 붙어먹은 게로구나.’
소소정은 그제야 깨닫는 바가 있었다. 여태 속내를 감추고 납작 엎드렸던 아이가 어째서 이리 바락바락 대드는가? 이곳이 바로 황석산이기 때문이었다. 오대산검을 비롯하여 유명 문파 열 곳의 수장들이 모두 모인 자리. 혹여 사부가 독한 마음을 먹더라도 자신을 함부로 죽이지 못한다는 확신이 있었으리라.
‘간악한 년. 이참에 나를 욕보여 끌어내릴 심산이구나.’
일을 그르친 것에 대한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 게 패착이었다. 내일 아침이면 이 하극상에 대한 소문은 모두의 귀에 들어갈 터였다. 문파의 망신 수준이 아니라 도덕적인 비난과 책임도 감수해야 했다.
“그래 네 말이 맞는다. 어린 제자들을 사지에 몰아넣고도 모자라 사이를 이간질했다고 치자. 그럼 내가 무엇으로 갚아야 하느냐? 스스로 위험 속에 뛰어들어주랴?”
“문주님!”
“사부님!”
당황한 선운검파의 제자들이 모두 바닥에 꿇어앉았다. 소소정은 선운검파의 기둥이었다. 그녀가 나섰다가 일을 당한다면 사문의 근간이 흔들릴 터였다.
“영인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그 아이에게 장문직을 내리고 선운검파의 사직을 잇게 한다.”
보현과 기정이 나서서 말렸으나 소소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이 사달의 원인인 가은에게 쏠렸다. 언제나 저 굴러들어온 돌이 말썽이었다. 그러나 원망과 비난의 눈초리에도 가은은 눈 하나 꿈쩍이지 않았다.
“곧 오대산검의 원정대가 옛 려국 땅으로 출발한다. 선운검파를 대표하여 내가 직접 가겠다. 물론 너와 함께 말이다.”
“네, 바라던 바입니다.”
가은은 자신을 매섭게 쏘아보는 소소정에게 되레 날카롭게 맞받아쳤다. 이 말을 받아내기 위해서 얼마나 절치부심 연습했던가? 예상대로 나와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 상화하택(上火下澤):
위에는 불, 아래에는 연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