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以夷制夷(이이제이)
해금 객잔은 이른 오전부터 북적거렸다. 천서국에서 사신단과 함께 상단을 보낸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이참에 한몫 잡으려는 거점 상단들과 표국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이었다. 더불어 그들이 고용한 표사들로 객잔이 가득 찰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가져오게.”
“네.”
2층 가장 좋은 자리에 앉은 염아란은 마냥 들뜬 모습이었다. 말로만 듣던 운평에 와보니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덩달아 흥분되었다. 오라버니의 일을 돕겠다고 졸라서 왔건만, 이미 본래의 목적은 잊은 지 오래였다.
“란아, 너무 과하지 않으냐? 우리는 놀러 온 게 아니다.”
금형권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벌써 혼인을 하고도 남을 만큼 나이가 찼음에도 불구하고 소녀처럼 천방지축이니 내심 걱정도 되었다.
“사숙, 든든히 먹어둬야 일을 그르치지 않는 법입니다. 어차피 오라버니께서 잘 알아서 하실 테니 우리는 쉬엄쉬엄하지요.”
태평스러운 그녀의 태도에 마음이 무척 불안했지만 그렇다고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어쨌거나 천서국 황제의 귀한 외동딸이었다. 대사형의 제자이니 격식을 차리지는 않아도 되지만, 함부로 대할 신분은 결코 아니었다.
“그나저나 일이 끝나면 여기로 온다고 하였지요?”
“저하께서는 보는 눈이 있으니 빠져나오기 어려울지도 모르지. 그래도 목형님은 오실 테니 오후까지 기다려보자.”
“네, 그러지요.”
아란은 오히려 좋았다. 궁 안에 갇혀 사는 삶은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얌전히 호의호식이나 하다가 얼굴도 모르는 사내와 혼인하는 삶이야말로 최악이었다. 적어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고자 하였다. 하여 극구 반대하는 아버지를 졸라 오라버니의 스승인 곡해고와 사제의 연을 맺은 지 수년이었다.
‘이참에 공을 세워 돌아가면 폐하의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 관직을 내리지는 않더라도 혼인에 집착하지는 않겠지.’
오라버니를 돕겠다는 명목으로 나선 길이지만 계획은 더 거창했다. 경국의 황위 다툼이 종국으로 치닫는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귀한 정보를 손에 넣은 참이었다.
“사숙, 제가 려국의 보물을 찾게 되면 어찌 될까요?”
“뭐?”
형권은 뜬금없는 아란의 포부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는 얌전한 듯하다가도 정치와 무공에 관한 일에는 거친 황소 같았다. 도무지 제어되지 않으니 가끔은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란아, 어디까지나 저하를 돕기 위해서 온 것이다. 우리는 자중하자꾸나.”
벌써 형권의 등 뒤에는 땀이 흥건했다. 이럴 때 곡사형이라도 있었으면 대처가 쉬웠을 텐데, 혼자서는 감당이 어려웠다.
“사숙, 걱정하지 마세요. 사숙께 피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여기 머무는 동안만 자유롭게 즐길 테니, 사숙도 좀 쉬세요.”
“에그,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행여라도 사신단 일에 끼어들 생각은 말아야 한다.”
“네, 네.”
아란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주위를 쓱 훑었다. 표사 시험을 보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온 수많은 검객이 눈에 들어왔다. 걔 중에는 소문으로만 듣던 유명인도 있었고 능력에 맞지 않는 화려한 병기를 가진 이들도 보였다.
“저들은 누구입니까? 꽤 한 가닥 하는 인물들로 보입니다.”
“누구 말이냐? 아아, 도우객 설요로구나.”
“도우객이요?”
형권은 술동이를 벌컥벌컥 들이마시더니만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름 경국에 소문난 자객이란다. 과거 봉천이 경국의 고위급 관리의 아내를 살해한 적이 있었지. 어릴 때라 절제를 하지 못했거든. 그때 그 관리가 고용한 자객이 도우객 설요였다.”
“오, 그리 유명한 자였나요?”
아란이 감탄사를 뱉으며 그쪽을 흘끗거렸다. 확실히 다른 일행보다는 연륜이 있어 보이는 게 꽤 준수한 실력을 지닌 것 같았다.
“딱 이만큼!”
형권은 아란의 눈앞에 손가락 열 개를 쫙 펼쳤다.
“이게 뭐래요?”
“저자가 봉천과 부딪친 합이 총 열 합이다.”
“네? 고작 그 정도 실력인데 어찌 살아 있대요?”
열 합도 채 견디지 못했다면 실력이 형편없을진대, 목숨이 붙어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봉천은 사호세주의 그 누구보다 살인을 즐겼다. 게다가 실력이 미천하면서도 허세가 가득한 이를 유독 싫어했다.
“그건 저자가 눈치가 빨라 도망쳤기 때문이지. 아마 제대로 붙었다면 그보다는 오래 버텼겠지만, 결과는 같았을 테니 말이다.”
“아아, 아주 비겁하고 약은 사람이네요. 그런데 어째서 유명해졌을까요?”
그녀의 물음에 이번에는 혀를 쑥 내밀었다. 이보다 그를 더 잘 설명해 줄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강호에 그가 모르는 일은 없다고 한다.”
“의리도 양심도 없는 자이구나.”
아란은 입술을 쭉 내밀고 투덜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상다리가 휘어져라, 차려진 음식을 먹다가 말고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유명한 떠버리라면 응당 아는 소문이 많을 터였다. 의외의 고급 정보를 얻을지도 모르니 허투루 기회를 날릴 수 없었다.
“아니, 그 형제는 못 찾았나?”
“아주 땅으로 꺼져버렸는지 감쪽같이 사라졌네.”
홍이성의 대답에 설요의 미간 주름이 더 깊어졌다. 중간에 누군가가 개입한 것이 분명했다. 객잔에 보는 눈이 많아 암습을 하려던 것인데 일이 완전히 틀어진 셈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로잡아 두었어야 했는데, 안일하게 놓친 자신의 잘못이었다.
“어쨌든 그들 말이 맞는다면 우리가 이럴 때가 아니네. 신교의 속셈을 알았으니 무의미한 의심과 싸움을 멈춰야지. 해심밀경소 따위에 낚여 진짜 보물을 빼앗기면 안 되네.”
“그럼 우리는 어찌할까요?”
정가 형제는 마음이 급했다. 지금 원용당의 멸문이 문제가 아니었다. 려국의 보물에 관한 이야기는 강호에 떠도는 오랜 전설이었다. 그저 헛소문이라고만 여겼는데 실체를 마주하니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 제대로 한몫 잡는다면 더는 용병으로 떠도는 것도, 거대 문파의 눈치를 보는 일도 끝이었다.
“마음에 맞는 무리를 모아 강운선의 뒤를 쫓는 게 어떻겠나? 운평에 아주 유명한 수색꾼이 있다 하니 그쪽을 알아보세.”
“그거 좋은 생각일세.”
홍이성 역시 친우와 같은 생각이었다. 해심밀경소를 한 장이라도 훔쳐보기 위해 운평까지 흘러들어온 터였다. 그의 목표는 오직 절세 무공을 얻는 것, 려국의 신공보다 더한 비급을 얻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쿵쾅거렸다.
“흐음, 이거 일이 아주 재밌게 흘러가는걸?”
한참을 훔쳐 듣던 아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애초에 그녀는 객잔에 얌전히 앉아 오라비가 공을 세우는 양을 구경만 할 마음이 없었다. 이 재밌는 일에 뛰어들어 한바탕 난장을 벌이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다.
“저기, 대협들. 말씀 좀 묻겠습니다.”
형권이 말릴 새도 없었다. 아란은 벌써 설요의 무리 쪽으로 다가가 은밀히 말을 붙이는 중이었다. 급작스럽게 미인이 나타나 말을 걸자 그들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말씀하신, 사라졌다는 형제의 인상착의를 여쭤도 될까요? 한 명은 키가 크고 마른 도사 느낌인데 무공을 전혀 못 하는 서생이고, 다른 한쪽은 눈이 동그랗고 머리숱이 많은데 천에 둘둘 감싼 큰 검을 어깨에 메지 않았습니까?”
“뭐요?”
설요는 화들짝 놀랐으나 짐짓 모른 체하며 쏘아붙였다.
“낭자는 누구시길래 함부로 남의 말을 엿듣는 것이오? 우리는 말을 섞고 싶지 않으니 이만 자리로 돌아가시오.”
“아아, 딱 들어맞은 모양이군요.”
아란은 상대의 태도에서 자신의 예측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그렇다면 이 일은 절대로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아니 되었다. 경국 황실과 신교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온갖 파리들까지 끼어들면 골치가 아팠다. 하여, 형권을 돌아보며 답이 빤한 질문을 던졌다.
“사숙, 이들이 오라버니의 일을 방해하려는데 어찌해야 합니까?”
“방해라고? 그러면 큰일이지.”
형권이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천서국에 해가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충신이었다.
“안타깝지만 그들에게 듣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들었으니 이만 퇴장하셔야겠습니다.”
“뭐? 이 건방진!”
눈치 빠른 설요와 홍이성은 단박에 상대의 살기를 느꼈다. 황급히 무기를 들고 상대와의 거리를 벌리니 분위기가 일시에 달라졌다. 물론 형권의 기세에 주눅이 든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고작 두 사람이니 무공에서 크게 밀리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두 무림 선배의 태도를 보고 정가 형제 역시 재빨리 공격 태세를 취하니 객잔 안은 금세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여어, 여기서 이러면 아니 되지요.”
그때였다. 어느새 나타난 허름한 옷차림의 사내가 태연스레 두 무리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청아한 이목구비에 침착한 목소리, 우아한 몸놀림은 누가 보아도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이 머저리는 누구냐?”
“강운선.”
아란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웅얼거렸다. 웬 엉뚱한 사내라 생각했던 설요 일행도 그제야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었지만, 소문으로는 들은 적이 있었다. 이마와 뺨을 잇는 자상이 없었더라면 고귀한 신분의 도련님처럼 곱상한 외모의 미남자였다.
“설대협, 명성대로만 해주십시오. 저 강운선은 려국의 보물을 찾으러 갈 것입니다. 또한, 여기 계신 천서국의 공주님이 함께하신다니 아무쪼록 널리 널리 알려주십시오.”
“뭐, 뭐야?”
설요는 머뭇머뭇 뒷걸음질 쳤다. 위압감만으로도 감히 대들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얼른 이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 원하신다면 여러분도 참여해도 됩니다. 한바탕 축제가 될 테니 참석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그럼 이만 가보십시오.”
“가, 가자.”
설요는 동료들에게 재빨리 눈짓을 보냈다. 더 이상 이 살벌한 분위기에 끼어 있을 이유가 없었다. 후다닥 움직이는 네 사람을 따라 아래층에서 그들을 구경하던 손님들도 함께 사라졌다. 이제 그곳에는 오직 세 사람만이 남았다.
“굳이 모두를 불러 모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란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자신의 실력으로는 이 무방비하게 앉아 있는 사내의 옷자락조차 벨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 수치스러웠다. 뿐인가? 함부로 나섰다가는 사숙의 목숨마저 위험한 지경이었다.
“저 혼자 맞서기에는 천서국이 너무 막강해서랄까요?”
술잔을 든 운선의 손은 고운 얼굴과 달리 투박하고 거칠었다. 그 굳은살과 물집이 그의 인생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그럼, 원하는 대로 할 일이지, 굳이 여기까지 와서 저를 겁박하는 이유가 뭡니까?”
“당신이 제 계획을 방해하니 끼어든 것뿐입니다. 또한, 변수가 생겨 부득이하게 찾아왔으니 양해 바랍니다.”
“변수?”
“공주님을 감히 건드렸다가는 네 머리통이 박살이 날 줄 알아라.”
아란을 위협한다고 생각한 형권은 철퇴를 휘두르며 앞으로 나섰다. 곡해고도 감당하지 못한 적이라지만 아란을 도망치게 하는 정도의 시간은 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두 분을 해칠 생각은 전연 없습니다. 그저 동행을 원합니다.”
“뭐라고요?”
아란은 그의 황당한 발언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동행? 갑자기 무슨 개수작이란 말인가? 어차피 거절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 협조를 구하는 양은 분명 조롱이었다. 그러나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턱 밑까지 차오르는 욕지거리를 꿀꺽 삼키면서 운선을 한껏 노려보는 게 전부였다.
“당신의 오라비이자 천서국의 태자, 염자홍의 바람이지 않습니까? 그가 내 조카들을 인질로 삼아 목적지를 알아내려 하니, 그에 상응하여 친히 안내하려는 것입니다. 뭐, 이를테면 천서국과 려국의 새로운 동맹이라고나 할까요?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동맹?”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운선은 주전자에 남은 술을 몽땅 털어 넣었다. 뜨거운 여름 해가 어느덧 뉘엿뉘엿 산등성이를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