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放心(방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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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설의 서신을 받아든 찬영은 깊은 시름에 빠졌다. 여태 운선의 계획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됐으나 이번만큼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말이 되냔 말이야? 그곳의 존재를 숨겨도 모자란 판에 온 세상 사람들에게 소문을 내라니? 더구나 정파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살수를 적숙부라 인정하라고? 말이 돼?”
“흐음.”
반면 서신을 찬찬히 읽어내려가는 서용의 얼굴에는 근심이 없었다. 되레 재밌는 생각이라도 났는지 미소가 가득했다.
“다 좋다 이거야. 신교 내부에 분란이 있고 강숙부가 배척당하는 거로 소문이 나면 오대산검을 방심하게 할 수 있겠지. 헌데, 그게 뭐? 천서국과 경국 황실까지도 눈에 불을 켜고 그곳을 노리는 판국에 신교 내분 따위가 변수가 되겠어?”
“돌제비야, 너의 강숙부는 아마도 너를 진정으로 믿나 보다.”
“뭐?”
그제야 서신에서 눈을 뗀 서용이 흥분한 찬영의 어깨를 눌러 앉혔다. 성질 급하고 충동적인 아이에게 이런 중차대한 일을 맡기다니 어찌 보면 신뢰요, 어찌 보면 자충수 같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자신이 이 멍청이 옆에 있다는 사실이랄까?
“모두가 모여야 한다. 경국 황실도, 천서국도, 오대산검도, 심지어 강호에 떠도는 일개 무뢰배들까지 말이다.”
“뭐?”
“강교주는 그곳을 찾으려는 게 아니야. 그곳의 존재를 모두에게 알려 려국의 위대함을 알리려는 거겠지. 경국이, 오대산검이 탐냈던 이곳의 주인은 려국이라는 사실을 공표하는 거야. 그 과정에서 서로 싸우고 죽여 수를 줄여주면 더 좋고. 내분에 빠진 신교는 위협이 되지 않을 테니, 그사이 다른 덫을 마련하기도 쉬울 테고.”
그러나 찬영은 쉬이 수긍하지 못했다. 오히려 서용의 말을 들을수록 의문이 더 늘어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곳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고. 지금 신교는 풍비박산 직전인데 어찌 지킨단 말이야? 대단한 고수들에게 그 안에 숨겨진 온갖 보물과 비급을 뺏길지도 모르는데 그 위험천만한 방법을 택한다고?”
“어차피 두 나라의 황실은 그곳을 노리고 있어. 몰래 간다고 해도 오대산검이나 천서국과의 결전을 피하지는 못할 테니까. 긍정적으로 보면 도전이고, 나쁘게 보면 객기지.”
“아, 몰라, 몰라.”
찬영은 더는 생각하기 귀찮았는지 바닥에 벌렁 누워버렸다. 청명한 하늘에 하얀 구름이 무리를 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 방향인지도 모르고 바람이 부는 대로.
“그나저나 의심 많은 정파 놈들이 우리 얘기를 믿어줄까?”
찬영은 여전히 반신반의하였다. 운선의 의중이 전혀 이해되지 않기도 하거니와 이를 전하는 방식도 꺼림칙하였다. 반면 서용은 자신만만했다.
“의외로 강호에 홀로 떠도는 자객 출신 중에 떠버리가 많거든. 외로워 무리를 만들다 보면 자연스레 입이 가벼워지는 모양이야. 보통 자객들을 고용하는 시장이 운평에 있으니 가장 큰 객잔에서 기다리면 한둘은 걸리겠지.”
“참나, 그리 쉬우면 임무라 할 수 있나? 아무래도 헛걸음 같은데.”
투덜거리는 찬영의 어깨를 툭툭 치는 서용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신교의 일은 늘 위험하지만 흥미로웠다. 강운선의 계획을 들을 때마다 무릎을 칠 정도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엇보다 마냥 의롭지도, 의로운 척하지도 않는 솔직한 작전이 마음에 들었다.
“아주 오래전에 용문주님께서 농을 하신 적이 있어. 강호에 삼 대 떠버리가 있는데 그 입 때문에 지금은 다 죽고 오직 한 명만 남았다고 말이야. 걔 중 가장 입이 가벼운데도 살아남은 걸 보면 최고의 살수가 아니겠냐 하셨지. 만약 해금 객잔에서 그자를 만날 수 있다면 이 계획은 무조건 성공인데 말이야.”
“그가 누군데?”
잘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신나서 떠벌리는 동료에게 짜증이 났는지 찬영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날씨도 습하고 더운데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니 그럴 만도 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용이 크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도우(屠牛)객 설요! 세 치 혀로 소도 잡는다는, 강호 최고의 주둥이 자객!”
***
당연히 설요가 따라왔으리라 생각했던 두 사람은 당황한 낯빛을 감추지 못했다.
“아까 들었던 이야기가 너무 흥미로워 더 듣고 싶어 그렇습니다. 게다가 우리 동년배 같은데 친밀하게 지내도 좋지 않겠습니까?”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이는 무리에서 가장 과묵했던 염씨 사내였다. 다른 점이라면 아까와 달리 복색이 자못 화려하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서로 이름도 모르는데 어찌 친분을 맺겠소. 일없으니 가던 길 가십시오.”
문득 상대의 정체에 의문이 든 서용은 부러 매몰차게 거절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아까와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의 태도 변화가 영 꺼림칙했다.
“그럼 내 소개를 다시 하겠습니다. 성은 염, 이름은 자홍. 염자홍이라고 합니다.”
고른 치아를 씩 드러내며 웃는 그의 얼굴에는 악의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눈치 빠른 두 사람은 곧바로 상대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맙소사, 천서국의 황자가 납시었구나.’
찬영은 어깨에 멘 비월의 검자루를 조심스레 감아쥐었다. 여차하면 선공하여 퇴로를 확보할 마음이었다. 상대의 실력을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그의 동생의 무예는 충분히 확인하고 온 터였다. 그 이상이라면 두 사람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게다가 황자가 혼자 움직였을 리 없다. 사호세주의 셋이 아직 연향에 있다 해도 다른 한 명은 따라붙었을 테지.’
바짝 긴장하면서도 본능적으로 서용의 앞을 막아서는 찬영이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자홍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나는 전혀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친분을 쌓고 싶다니까?”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말고 본론을 말해라.”
“이런,”
조금도 믿어주지 않는 그들의 태도에 당황했는지 자홍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다.
“말 그대로 동행하고 싶습니다. 여러분과 함께라면 제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아니 그렇습니까?”
“조건은 무엇입니까?”
그제야 서용이 앞으로 나섰다. 이리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을 보면 이미 이쪽의 정체가 들통났다는 뜻이었다. 굳이 말다툼으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조건이랄 것도 없지요. 그저 그곳에 저를 데려다주시면 됩니다. 할 일도 알고, 반드시 하고 싶은데 도통 목적지를 모르니 갑갑하지 뭡니까? 마침 신교의 적우가 나타났다길래 따라갔다가 아까 그분들을 만났지요. 근데 웬걸? 운명처럼 여러분이 제 앞에 나타난 게 아니겠어요? 함께 계시던 분들이야 어떻게 잘 속였는지 모르겠으나 저는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당신들이 바로 신교 사람인 것을요.”
“싫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서용은 긴장감에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상대의 의중을 물었다. 어영부영 끌려다니다가 그들 손에 놀아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빠져나갈 수 없다면 적당한 선에서 거래를 해야 했다.
“그럴싸한 이야기를 흘린 것은 강호의 욕심쟁이들을 그곳으로 불러모으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까? 헌데 제가 만약 그들을 다 죽인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여러분의 교주님이 곤란해지지 않을까요? 뭐, 최악의 상황에서는 둘 중 하나의 목숨을 거둘 수도 있지요. 그건 내 취향이 아니긴 합니다만.”
“이 더러운 오랑캐가!”
찬영은 더 이상 상대의 도발을 참지 못하고 비월을 뽑아 들었다. 이판사판이었다. 어차피 목숨줄을 담보로 삼을 거라면 싸워보고 죽는 게 후회가 없을 터였다. 게다가 자신이 먼저 나서면 서용의 목숨이 더 안전해질 것도 같았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이 일에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무고한 이의 억울한 죽음을 목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서용이라면 더더욱.
“아, 비월. 당신이 설마 풍림을 이겼던가요? 그럼 대단한 실력자일 테지요. 안타깝게도 제가 검법은 미처 배우지 못해서 혼자 상대하기에는 겁이 나는군요.”
자홍은 한 발 크게 물러서더니 박수를 세 번 쳤다. 마치 무용을 하는 듯한 우아한 몸짓에 찬영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아, 제발 점소이 부르듯 하지 마십시오. 이래 봬도 내가 저하의 스승이 아닙니까?”
“아아,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비월을 보니 무서워서요, 마음이 급해 그리하였지요.”
자홍의 뒤에서 나타난 이는 키가 족히 칠 척은 될 법한 노인이었다. 마른 몸이었는데도 골격이 크고 단단하여 마치 커다란 소나무를 보는 듯하였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하얀 수염은 숱이 많아 움직일 때마다 출렁거렸다.
“자네들, 잔소리 말고 같이 가세나. 강호 선배가 되어서 새파랗게 어린 후배들을 다치게 하면 쓰겠나? 우리 저하는 고집이 쇠심줄 같아서 한 번 정한 것은 무르지 않으니 그만 버티게.”
“설마?”
새롭게 나타난 인물을 보자마자 서용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풍문으로만 들었던 그 자가 맞는다면 도망갈 방법은 아예 없었다. 죽거나, 따라가거나 선지는 단 두 가지였다.
“돌제비, 검을 거둬. 순순히 따라가는 게 좋겠어.”
“뭐? 미쳤어? 우리가 잡히면 강숙부가 위험할지도 몰라.”
서용 역시 찬영의 의견에 동의했다. 아니 어쩌면 열쇠의 행방을 들킬지도, 더 심각한 상황으로 번질지도 몰랐다.
“그러나 저들에게 덤비다가 되레 모든 일을 그르칠 수 있어.”
“비겁한 녀석, 너는 도망가. 난 싸워 볼 테다.”
마음 같아서는 서용의 싸대기를 후려갈기고 싶었다. 려국인이 아니었기에 이리 쉽게 포기하나,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잘 들어. 함부로 덤비다가 정말 최악의 상황이 될 수 있어. 인질이 될지언정 기회가 생길 거야. 그 틈을 노리자.”
“아니, 도대체 저 늙은이가 누구길래 이리 겁을 먹은 거야?”
서용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여기에 강운선 본인이 나타난다 해도 과연 우리를 구할 수 있을지 확답할 수 없었다. 어쩌면 연향 객잔에서 만난 곡해고보다도 훨씬 악질이었다.
“천서국 국사이자 사호세주의 사천왕 중 광목천왕 목치수야.”
“뭐?”
“곡해고와 더불어 천서국 최고의 고수 목치수.”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던 찬영은 얌전히 검을 집어넣었다. 세상일에 무지한 그였으나 곡해고와 목치수의 악명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보았다. 어째서 서용이 꼬리를 내렸는지 단박에 이해가 되었다. 이렇게 된 거, 한 번 어떻게 최악으로 치닫는지 경험해보자 싶었다.
‘어차피 인질이 될 거라면 최대한 진상이 되어봐야지.’
될 대로 되라 싶어진 찬영은 이제 휘파람까지 불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곳의 장소는 강운선만이 알고 있었다. 끝까지 열쇠만 지켜낸다면 또 다른 변수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