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57화 (157/209)

157화. 挾雜(협잡)

설요는 원용당의 비극을 전하는 내내 가슴을 쿵쿵 쳐댔다. 아무리 악명 높은 그들이라지만 하루아침에 참극을 당했으니 전하는 처지에서 마음이 좋을 리 없었다.

“그나마 부당주 허윤이 자리를 비웠기에 망정이지, 장원에 있는 이들 몽땅 죽여버렸어.”

“허윤도 모르지. 악독한 그놈들이 쫓아가 죽였을지.”

대화를 묵묵히 듣던 찬영이 드디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계속 신교를 들먹이는 이유가 고작 적우의 표식 때문이라는 게 어이가 없었다.

“적우가 했다는 증거가 고작 雨(우) 자란 말입니까? 참으로 개가 웃을 일입니다. 정파 사람들의 더러운 누명 씌우기에 신물이 납니다.”

“찬영아!”

서용은 화들짝 놀라 찬영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가 흥분하여 날뛸 걸 뻔히 알면서도 넋을 놓고 있던 자신의 패착이었다. 하마터면 다 된 계획에 찬물을 끼얹을 뻔했던 것이었다. 다행히 그들은 각자의 생각에 빠져 크게 개의치 않았다.

“물론 표식이 중요하긴 했지. 적우의 필체가 워낙 독특하니 말이야. 허나, 그보다 더한 증거는 그의 쾌도 행덕 때문이었네.”

“네? 그게 무슨.”

이번에는 홍이성이 나서 설명을 시작했다. 살짝 흥분했는지 얼굴이 사뭇 상기된 채였다. 무학에 관심이 많고 병기에 능통한 그였기에 그럴 만도 하였다.

“그자의 무시무시한 행덕을 모르는 이는 없을 테지. 그러나 어쩐 일인지 용문산에서 잡혔을 때는 반 토막이 나 있더군. 하여 그가 죽인 시체에는 독특한 자상이 남더라는 거야.”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손가락에 술을 찍어 탁자에 찍찍 그어댔다. 순식간에 톱니처럼 삐뚤빼뚤한 칼날의 단면이 그려졌다.

“여태 그의 필체가 남은 문파의 시체들은 하나같이 상처 모양이 같았네. 걔 중에는 장력을 맞은 이도 있었는데 그 또한 상처 주변에 화상 자국이 남은 것으로 보아 태을신공의 흔적이라는 결론이 섰네.”

그의 설명을 들을수록 이 모든 일의 배후가 선명해졌다. 행덕이 부러진 사실을 아는 자, 그의 필체와 검법, 심지어 신공의 위력까지 흉내 낼 수 있는 자라면 이 강호에 많지 않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른 찬영의 얼굴은 불탈 것처럼 새빨갰으나 다행히 난동을 부리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나댄다면 뻔히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다. 서용은 최선을 다해 참는 그가 대견하기까지 했다.

“아무리 적우가 대단하다 한들, 혼자서 감당하겠습니까? 신교의 고수들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 하니 다른 이들이 있을 리 만무하지 않습니까?”

서용은 조심스레 의견을 더해 보았다. 이제 이야기를 좀 더 끌어당기면 원하는 방향에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운선이 함께 다닌다는 설이 있다네. 우리 중 그의 얼굴을 제대로 아는 이가 없으니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말이야.”

“무슨! 추측이 아니라 확신일세. 그가 성곤을 밀어내고 신교의 교주가 되었다면 딱 들어맞지 않는가?”

서용이 서둘러 찬영의 입에 닭고기를 잔뜩 넣어주었다. 혹시라도 허튼소리를 해댈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 중요한 임무의 시작인데 고작 감정 다툼으로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

“저, 사실 선배님들께 의논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여태 끙끙 앓아왔는데 설대협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와 제 아우가 그간 겪은 일과 일치하는 점이 있어 참으로 당황스럽습니다. 혹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고견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는 서용의 모습은 영락없이 해맑고 순수한 청년이었다. 강호에서 구른 지 수십 년인 설요조차도 그를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뭔데 그러느냐? 우리 같이 진위를 판가름해 보자.”

정가장의 두 형제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이리 뜸을 들이는 걸 보니 대단한 이야기임이 틀림없었다. 원용당의 멸문으로 갈 곳을 잃은 그들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안줏거리였다.

“강운선이 해심밀경소를 던진 이유 말입니다. 그게 사실은 미끼가 아닐까요?”

“뭐? 더 말해 보아라.”

설요의 눈이 곱절로 커졌다. 더 들어봐야 알겠지만, 구미가 확 당기는 소문이 틀림없었다.

“저는 강운선이 비급을 찢던 그 현장, 용문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태도가 영 이상했더란 말이지요. 그 위험천만한 순간에도 칠원성군은 고사하고 신교도들 누구도 그를 엄호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적우를 심문한 자리에 있던 동기들 말에 의하면 칠원성군 누구도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하더군요. 비급은 그가 가졌으나 신교 내에서 그의 입지가 영 바닥이었던 건 아닐까요? 오대산검 내부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적우는 심지어 현진과 이서문 죽음의 책임을 그에게 물었다 하지요. 어찌어찌 신교의 교주 자리는 차지했지만, 수세에 몰린 그가 비급을 찢어 살길을 마련했다고 보는 게 옳을 듯싶습니다.”

“으음, 일리가 있구먼.”

설요를 비롯한 일행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뜬금없이 적우가 나타나 설치는 상황도 이해가 되었다. 그들의 보물을 강운선이 함부로 내돌렸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그럼 신교의 교주가 정작 신교 내에서는 배척당하는 꼴이란 말입니까?”

“그런 셈이지요.”

여태 조용하던 염씨 사내가 입술을 삐쭉거렸다.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표정이었다. 서용은 이때다 싶어 한층 더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그런데 그 해심밀경소에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경전에 담긴 것은 말 그대로 경전일 뿐, 진짜는 그 안에 숨겨진 무언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서용은 뭐가 두려운지 한참 동안 머뭇거리며 주변 눈치를 살폈다. 일행들이 한 마디씩 거들어 그를 잘 얼른 후에야 조심조심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실 제 아우는 오랫동안 두타산의 시동으로 있었지요. 현로선생님이 돌아가시던 그 날, 아주 괴이한 장면을 보았다 합니다.”

서용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자 그제야 찬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순간을 위해 연습하고 또 연습했건만, 과연 잘 속아 넘길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게다가 아까부터 자신을 따갑게 노려보는 염씨 사내의 눈길이 심히 거슬렸다.

“그날 저는 조맹주님께서 평소 폐관 수련하는 내당 근처에서 청소 중이었습니다.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새벽녘쯤이었는데 웬일인지 내당 안이 소란스러웠습니다. 호기심에 가까이 가보니 웬 피투성이 사내가 시체를 업고 나오지 않겠습니까? 사내의 얼굴은 명확히 보지 못했으나 시체는 반신불수의 맹인이었습니다.”

“반신불수의 맹인?”

설요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한동안 두타산에 흑접쌍살 좌영이 잡혀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 시체가 좌영이라면 업고 나온 자는 강운선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사내의 행동이 자못 수상했지요. 분명 안에서 난동을 부린 게 맞는데 도망은커녕 시신의 몸을 뒤지더란 말입니다. 그러더니 혼잣말로, 그곳을 찾기만 하면 되니, 비급은 필요 없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강운선은 비급을 이용해 강호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본인은 정작 진짜 보물이 숨겨진 곳으로 갈 예정이란 말인가?”

홍이성은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불쑥 끼어들었다. 이 젊은이들의 말을 합쳐 보면 여태 그들은 헛짓해온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또 다른 기회이기도 했다.

“으음, 이제 알겠네. 비급을 가졌으나 그 이면에 숨은 장소를 찾고 있던 강운선이 부러 비급을 찢어 혼란을 준 것이다. 이에 분열된 신교는 새 교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분오열되었으며 적우를 위시한 일부는 흩어진 비급을 모으고 있다. 그 말인가?”

“네, 저는 그리 파악했습니다.”

서용은 설요의 현명함을 거듭 감탄하며 몇 가지 소소한 변명도 덧붙였다.

“대협을 만나기까지 이 이야기를 과연 누구에게 전해야 할까 고민이었습니다. 게다가 제 아우는 두타산을 도망쳐 나왔으니 혹여 연루되어 죽을까 걱정도 되고요. 황석파의 장문은 좀 다를까 싶어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데 대협을 만났으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마음고생이 많았겠네, 그려.”

찬영은 홍이성과 정가 형제가 빠르게 신호를 교환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강호를 떠돌며 익히 보아왔던 탐욕에 찌든 자의 눈빛이었다.

‘되었다.’

찬영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서용의 뒤에 숨었다. 계획이 성공했다는 기쁨에 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끝까지 연기력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우리를 만났으니 정말 다행이네.”

홍이성은 한층 다정한 태도로 두 사람을 챙겼다. 되레 설요는 깊은 시름에 빠진 눈치였는데 그 좋아하는 술도 더는 들어가지 않는 듯 보였다.

“이 이야기는 좀 더 검증이 필요하네. 자네들, 절대로 오늘 들은 내용을 함부로 발설해서는 아니 되네.”

이미 술에 취해 흥이 잔뜩 오른 동료들이건만, 그는 수차례 신신당부를 하는 것이었다. 또한, 서용 일행을 안심시키는 일도 잊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오대산검과 같은 유력한 문파의 제자는 아니지만, 의리 빼면 시체라네. 소문을 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혹여 곤란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자네들 신변만큼은 보호해 줄 걸세. 아니, 아예 우리와 같이 다니는 건 어떤가?”

“선배님의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허나 엄한 오해를 받을지도 모르니 이만 헤어지는 게 좋겠습니다. 원래는 황석파에 의탁하여 목숨을 구걸해 보려 했으나 이제 그럴 필요도 없네요. 선배님들을 만난 게 천운인 듯싶습니다. 저희는 깊은 산에 들어가 약초나 캐며 살기로 하였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시어 대의를 이루십시오.”

무르익은 술자리를 마무리하며 서용이 인사를 건넸다. 그 태도가 얼마나 정중하고 예의 바른지 과연 명문정파의 정식 제자라 할 만했다.

밖으로 나서니 벌써 주변이 어둑어둑했다. 굳이 객잔을 옮기는 것 또한 그의 계획 일부였다. 예상대로라면 저들 중 한둘은 반드시 뒤를 따라와 소문의 근원지를 없애려 들 것이 분명했다.

“어때? 저 중에 누가 올 것 같아?”

“글쎄, 적어도 염씨 사내는 아닐 듯.”

“하긴.”

그러고 보니, 꽤 과묵한 청년이었다. 옷차림은 허름했으나 어딘지 모르게 귀한 티가 나는 모습이 명문가의 자제처럼 보였다.

“이대로라면 임무 완수까지 딱 반걸음 남았군.”

“암, 게다가 귀한 손이 한 명 더 따라붙었으니 더할 나위 없지.”

서용은 곁눈질로 골목 맞은편을 가리켰다. 검은 머리가 쏙 올라왔다 사라지는 양이, 익히 예상했듯 가은이 틀림없었다.

“다 들었을까? 그렇다면 오히려 잘 되었어. 저 여자는 곧바로 오대산검에 알릴 테니, 달포면 개미 새끼 한 마리까지도 다 알게 되겠지.”

“뭐,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자신이 가진 열쇠를 지키려는 마음에 뭐라도 해보겠지. 일단 지금은 가진 수단이 없으니 함부로 나서진 못할 테지.”

무공도 형편없는 어린 여인이 혼자서 뭘 할 수 있겠냐 싶었다. 그날 연향 객잔에서 본 정은률의 시체 같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괜히 불쾌한 기분이 들어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여인에게 휘둘려 목숨까지 내놓는 놈이라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작자였다.

“자, 이제 기다려 볼까?”

도란도란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운평 중심부에서 한참 떨어진 나루터에 다다랐다. 민가는커녕 사람 그림자도 없으니 제법 오싹한 풍경이었다.

“여보시오?”

그때였다. 굵은 사내의 목소리가 밤바람에 실려 살랑살랑 불어왔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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