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風說(풍설)
연향에서 운평까지는 꼬박 보름이 걸렸다. 산길을 거쳤다면 그리 멀지 않은 길이었으나 부러 죽평 큰 고을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평소 자신의 상처는 허투루 여기는 진건이 고을에 들어서자마자 의원을 찾았을 때, 찬영은 드디어 가은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설마 연정은 아닐 테고, 친척 같은 건가? 려국인이었다고 해도 너무 과하지 않은가?’
그는 애초에 가은이 강숙부의 질녀라는 이야기는 믿지 않았다. 그것은 설이의 태도만 보아도 짐작 가능했다.
“혹 가은을 만나거든 다치게 하지는 말되 되도록 엮이지 말아라.”
“그게 어디 가능한가요?”
설이의 주문은 그야말로 모순투성이였다. 열쇠를 얻어내려면 당연히 엮일 수밖에 없는 일인 데다가 다툼도 불가피했다.
“열쇠를 가져오는 게 여의치 않다면 차라리 포기하고 돌아오렴.”
“아니, 그럼 왜 거기까지 쫓아간단 말입니까? 뭐, 그렇다 칩시다. 만약 그들끼리 다툼이 일어나 그 여자가 위험해지면요?”
“그럼, 모른 체하렴.”
“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설이의 태도였다. 다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돕고 싶지는 않다? 정말 가은이 강운선과 핏줄이라면 절대로 그리 냉정할 리가 없었다.
‘고모처럼 려국 재건을 바라는 이가 왕실 핏줄을 모른 체한다고? 아니, 아니다. 그럼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군가?’
서용 역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은 진건이 고작 발목을 삔 가은을 정성스럽게 돌보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이건 마치 철없는 딸을 돌보는 아버지 모습 같구나.’
찬영에게 이미 들어 가은의 신분을 알고 있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사실로 여겨지지 않았다. 게다가 강운선의 태도 역시 미심쩍은 데가 많았다.
‘그간 보아왔던 그 자라면 질녀를 고작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리 없다. 안위를 챙기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애정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반면 마진건의 행동은 너무 과하다.’
두 사람은 결국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운평에 다다랐다. 진건의 모습이 워낙에 눈에 띄었으므로 더는 동행이 어려웠다. 고을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그들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다들 고생 많았다. 나는 형제들을 만나러 갈 테니 찬영은 원래 계획대로 진행하여라. 그리고,”
진건은 고개를 숙인 채, 잔뜩 풀이 죽어 있는 가은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헤어지면 딸아이를 언제 다시 볼지 모른다 생각하니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여기서부터는 황석파의 담당 지역이니 천서국의 자객을 만나지 않을 거다. 신교와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구나. 부디 몸조심하기를.”
“하지만,”
그러나 진건의 얼굴은 단호했다. 그녀가 장은의 사주를 받아 동문을 살해하고 열쇠를 훔치려 한 일이 모두 밝혀진 터였다. 아무리 뻔뻔하다 해도 그 행동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깊이 허리를 숙여 읍하는 서용에게는 간단한 손 인사만을 남겼다. 그 어떤 권유도 부탁도 없이. 어차피 인연이라면 바라지 않아도 얽히게 되는 것임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갈 길 가시오. 다시 만나거든 인사도 하지 맙시다.”
찬영은 가은 쪽을 향해 침을 탁 뱉더니만 매몰차게 돌아섰다. 민망한 서용이 머리를 긁적이며 엉거주춤 그 뒤를 따랐다. 이제 갈래 길에 남은 이는 가은밖에 없었다.
‘이대로 황석파에 돌아간들 무슨 낯으로 장은과 소소정을 만난단 말이냐? 열쇠든 뭐든 얻는 것이 있어야 내 입지가 생길 터,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 저들은 분명 강운선과 접선할 것이다. 몰래 뒤를 쫓자.’
한 식경을 기다린 뒤, 가은은 드디어 운평으로 향했다. 어차피 그들의 첫 목적지는 뻔했기에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뿐인가? 운평은 그녀가 나고 자란 고향이었다. 곳곳의 샛길까지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꿰고 있었다.
‘반드시 얻어낸다. 그게 뭐가 됐든.’
일부러 걸음을 재촉하던 두 사람은 고개 하나를 넘은 뒤에야 뒤를 돌아보았다. 당장은 가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나 안심하기는 일렀다. 운평은 오대산검의 영향력이 가장 큰 지역 중 하나였다. 마음을 놓았다가 뜻하지 않게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단 해금 객잔으로 가자. 이왕 눈에 띌 거면 가장 유명한 곳이 좋지.”
“그러게, 거기 음식이 그리 맛있다며?”
미행만 하던 차에 모처럼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으니 설렐 만도 하였다. 특히 서용은 감회가 남달랐다. 운평을 방문한 적은 있었으나 기껏해야 심부름이었다. 이리 도복을 벗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다니, 불과 반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못 할 일이었다.
“와아.”
“촌스럽게 굴지 말아.”
서용은 해금 객잔의 규모에 압도되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찬영이 핀잔을 주고 쿡쿡 찔러도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이러다가 동네방네 소문 다 나겠다.”
찬영은 툴툴거리면서도 서용을 위해 이것저것 음식을 시켜주었다. 사실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컸다. 그가 없었더라면 진작에 실패할 작전이 아니었던가? 무엇보다 비월검법을 반 이상 깨우쳤으니 그것만으로도 은인이었다.
“이 일이 끝나면 어쩔 작정이야?”
“글쎄.”
한참을 게걸스럽게 먹던 찬영이 서용의 의중을 넌지시 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분간 함께하고 싶었으나 강요할 수는 없었다.
“너는 어때? 너의 숙부들은 속박할 리 없으니 선택은 오롯이 네 몫이잖아.”
“예전엔 좋았는데 요즘엔 좀 서운하기도 해. 잡아주면 모른 척 신교도가 될 수도 있는데 말이야.”
“하긴.”
서용은 누구보다 그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용문파가 자신의 이상과 다름을 알았으면서도 섣불리 떠나지 못했던 이유와 같았다. 나를 필요로 한다는 안도감, 소속감, 그리고 고마움이 뒤섞여 쉬이 배신하지 못했다. 더 웃긴 건 그 감정이 여전히 죄책감처럼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좀 궁금해졌어. 려국이 숨기고 있던 것, 그것이 무엇이길래 경국도 천서국도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드는지. 답을 알 때까지만 네 신세를 지고 싶은데 괜찮을까?”
“뭐, 심심하지는 않겠네.”
닭기름이 잔뜩 묻은 입으로 찬영이 배시시 웃었다. 어쩐지 마음이 붕 뜨고 신나는 게, 당분간 재밌는 일이 많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때, 한 무리의 검객들이 들어와 술을 두 동이나 시켰다. 마침 찬영 일행 옆에 자리를 잡더니, 취기가 오르기도 전에 은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가 한발 늦었군. 큰돈을 벌 기회였는데 아쉽구먼.”
“허허, 이 사람 오히려 다행 아닌가? 무려 일흔두 명이네. 게다가 원용당이 말일세.”
“고작 하룻밤 만에.”
찬영의 귀가 번쩍 뜨였다. 그들이 원하던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관련된 내용이 분명했다. 하여, 몸을 바짝 들이대고 정신을 집중했다.
“정말 그들이 다시 나타난 걸까?”
“雨(우) 자가 있었다지 않은가? 수법도 완전히 같다고 하니 의심의 여지가 없지.”
“하아, 벌써 몇 개의 문파가 당하는 건가? 이러다 내로라하는 중소 문파는 아예 남아나지 않겠네.”
유심히 이야기를 듣던 서용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졌다. 원용당의 일흔두 명의 제자들이 하룻밤 만에 당했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벌써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말 그대로 강호에 피바람이 불고 있다는 말이었다.
‘결국, 강운선의 예상대로 되었구나.’
강가장에서의 그날, 강운선은 ‘해심밀경소’를 낱장으로 찢어 던져버렸다. 형제를 찌르고 베며 경전을 차지하려던 이들은 모두 명문정파의 협객들이었다. 그리고 반년 뒤, 완전한 경전을 모으기 위해 또다시 지옥도가 펼쳐진 참이었다.
“허나, 적우 혼자 이 모든 일이 가능했을까? 그를 봤다는 증언은 있으나 마진건의 목격담은 없는 게 이상하네. 그의 용모가 워낙 특이하여, 나타났다면 이미 소문이 났을 텐데 말이야.”
“마진건이 아니야. 이렇게 잔악무도하고 철저한 걸 보면 모르겠나? 강운선이 직접 움직이는 것일세. 그가 생사경의 경지에 올랐다는 소문을 못 들어 봤나?”
“그럼 그가 신교의 교주가 됐다는 말인가? 허허, 교주 자리가 탐나 성곤을 일부러 죽게 했다더니, 낭설이 아니었구먼, 그려.”
“인면수심이 따로 없지. 목숨을 구해준 현로선생을 배신한 게 엊그제건만, 거기서도 짐승 같은 짓을 하다니.”
찬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신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되는대로 지껄이는 놈들의 행태에 구역질이 났다. 그 잘난 혀를 잘라내 줄 심산이었다.
“아니야, 기다려.”
서용은 이를 부득부득 갈아대는 찬영을 잡아 앉혔다. 대신 그가 직접 술 한 동이를 들고 검객들에게 말을 걸었다.
“아휴, 이게 누구십니까? 그 유명한 도우객 설요 대협이 아니십니까?”
“아니, 나를 아는가?”
여태 과묵하게 술만 마시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희끗희끗한 턱수염만 보면 중년이었으나, 피부가 매끈하고 주름 하나 없는 얼굴은 청년 같았다.
“어릴 적 용문산에서 수련한 적이 있습니다. 능력이 부족하여 배움을 마치지 못하고 하산하였으나 사부님께서 종종 하시던 말씀이 있었지요. 도우객 설요야말로 강호에 다시 없을 협객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부님이라면?”
“네, 무왕 용문주님입니다.”
서용의 대답에 사내의 낯 색이 대번에 달라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그의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옆에 앉히는 것이었다.
“이런 인연이 있나? 참으로 잘 되었네.”
“술 한 잔 받으십시오.”
서용의 넉살에 곧 찬영까지도 합석하게 되니, 마치 오랜 친우를 만난 분위기와 같았다. 설요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함께하는 동료들을 한 명씩 소개했다.
“내 왼쪽에 앉은 이는 친한 아우로 자용검 홍이성이네. 워낙 유명하니 아마 들어보았을 테지. 여기 이 두 친구는 정가장의 장남 종훈과 차남 종길이네. 아직 별호는 없지만 둘 다 쌍검으로 이름을 날리는 참이지. 그리고 이 잘생긴 젊은이는 이번 여정에 처음 만난 염씨. 아직 통성명은 하지 않았지.”
“이리 유명하신 분들을 한 번에 만나다니 영광입니다. 저희는 문파도 없는 무명소졸이라 소개하기도 민망합니다. 전 용문파 도사 서용이고 이 아이는 제 아우 서가 찬영입니다. 부디 대협들께 대접할 수 있도록 허해 주십시오.”
여섯 사람은 방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큰 건수를 놓쳐 돈이 부족했던 터라 서용의 권유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도우객 설요는 용가현과의 인연이 있던 터라 더 신이 났다. 아까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수다 삼매경이었다.
“우리는 사실 원용당의 요청을 받고 모였네. 달포 전, 신교의 예고장을 받은 당주 허죽이 곳곳에 방을 붙여 자객을 불러들였거든.”
“아니, 신교가 원용당과 원한이 있었던가요?”
“그럴 리가.”
설요는 고개를 크게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자신은 일개 떠돌이 검객이지만 이 재앙을 어찌 헤쳐나가야 할지 가슴이 답답했다.
“원용당에서 해심밀경소의 몇 장을 얻은 모양이야. 부당주 허윤이 나머지를 찾으려고 일부러 소문을 퍼뜨린 게 실수였지. 그리고 열흘 전, 원용당은 멸문하였네. 무려 일흔두 명의 식구 모두 말이야.”
서용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바람의 근원지는 알겠으나 방향과 규모를 모르는 거대한 태풍이 불어닥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