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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무십일홍-155화 (155/209)

155화. 朝三暮四(조삼모사)

일취월장(日就月將)했다고는 하나 속성으로 배운 검법이 몸에 익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천서국의 일류 고수 봉천이었다. 수십 합을 넘기고부터는 고작 공격을 피하는 게 전부였다.

‘이럴 바에는 다른 무공을 섞어 쓰는 게 낫겠다.’

그러나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이것저것 훔쳐 배운 무공은 많으나 모두 깊이가 없었다. 그나마 봉천이 이미 다친 데다가 비월검의 위력 때문에 여태 버틴 것이었다.

“흥, 웬만한 송어 정도는 되는 줄 알았더니 피라미였구나.”

“글쎄, 그래도 늙은 요괴 하나쯤은 우스운걸.”

언제나 그랬듯 허세 가득한 찬영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마음가짐이 달랐다. 승패의 문제를 떠나 자신의 행동이 제법 자랑스러웠다.

“찬영아, 너는 가은을 데리고 가라.”

이윽고 자세를 가다듬은 진건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크고 작은 부상으로 몸을 가누기도 힘들 정도였으나 찬영에게 맡겨둘 수는 없었다. 만약 봉천과 동귀어진해야 한다면 앞날이 창창한 이 아이가 아니라 이미 전성기를 지나버린 자신이어야 했다.

“흥, 너희 둘이 한꺼번에 덤벼도 끄떡없다.”

휘몰아치는 봉천의 검기가 한층 더 빠르고 날카로워졌다. 혼자서 둘을 상대하는 게 여간 힘에 부치지 않았다. 하여 우선 더 만만한 찬영에게 치명상을 입혀 퇴로를 확보할 생각이었다.

휘익!

봉천의 건달바와 부딪친 충격으로 진건의 미타가 뒤로 물러난 순간이었다. 찬영의 안면을 향해 붉은 비단 천이 휘감겨 들어왔다. 자신의 차례가 아니라 생각했던 찬영은 미처 피할 새가 없었다. 임시방편으로 비월을 쭉 내밀었으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손목이 파르르 떨렸다. 천은 살아 있는 뱀처럼 비월의 검날을 타고 올라갔다.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반전이었다.

“이 요괴야, 무슨 해괴망측한 짓이냐?”

“호호, 이대로 힘을 주면 검은 물론이고 네 손목도 끊어질 텐데, 괜찮겠어?”

당황한 찬영이 일갈하자 봉천은 허리를 꺾으며 웃어댔다. 그러면서도 진건을 향한 검은 거두지 않았다. 분명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건만, 한 명을 인질로 삼아 다른 한 명을 협박하니 단번에 전세가 역전되었다.

“저 계집애와 이 건방진 애송이의 손목을 주면 둘 다 보내주겠다. 어때?”

“지랄, 너 같으면 그러겠냐? 아아아!”

찬영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욕지기를 뱉어내는 순간, 봉천이 왼손에 힘을 주었다. 손목에 감긴 천의 당기는 힘이 곱절로 세지자 당장이라도 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

“내 목을 내놓을 테니, 두 아이를 보내주오.”

“흥, 늙고 못난 사내를 갖다 뭐하누?”

진건의 읍소에 봉천은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승기를 잡은 쪽은 자신이었다. 찬영의 손목을 부러뜨리는 동시에 가은을 낚아채 달아나면 될 일. 다만 둔부에 출혈이 있으니 더 이상의 격전은 피할 생각이었다.

“성인(聖人)은 사람의 형체를 가졌으되, 사람의 정(情)은 가지지 않았다. 성인(聖人)은 시비를 조화시켜, 자연에 맡겨 가지런히 만든다. 이를 양행(兩行)이라 일컫는다. 즉, 어느 쪽도 다 쓸 수가 있고 하늘과 자연의 균형 속에 머무니 이는 천균(天均)이라 한다.”

그때, 청량한 청년의 목소리가 후텁지근한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봉천이 또 다른 불청객의 존재를 파악하기도 전이었다. 꽁꽁 묶여 있던 비월이 꿈틀거리더니 곧이어 붉은 천이 꽃잎처럼 갈가리 찢어졌다.

“천균(天囷), 서 이 보(步), 북동 일 보(步), 동 삼 보(步), 남서 사 보(步), 남동 삼 보(步), 고래의 곳간을 채워라.”

지시에 맞춰 비월이 허공을 향해 을(乙) 자를 그리자, 어느새 찬영의 날랜 몸이 봉천의 공격 반경 안에서 빠져나갔다. 당황스럽기는 진건도 마찬가지였다. 완전히 활로가 막힌 상태에서 단번에 역전이 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요망한 녀석! 썩 나와서 정체를 밝혀라!”

잔뜩 약이 오른 봉천이 허공을 향해 건달바(乾闥婆)를 좌우로 흔들었다. 누구라도 하나 걸리면 인정사정없이 찢어버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목소리의 주인은 그의 도발에 넘어갈 만큼 어리숙하지 않았다.

“돌제비야, 검은 상황에 맞게 휘둘러야 함을 잊었더냐? 천균을 써야 할 때 강지를 쓰고, 양행을 놓치니 초식마다 막힌 것이다.”

“네 말이 꼭 맞다. 하여튼 의리 하나는 끝내주는구나.”

찬영은 연신 손뼉을 치며 키득거렸다. 마치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세상 같았다.

‘다시 신교 놈이 나타났으니 나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겠구나. 아쉽지만 지금은 물러서야겠다.’

아무리 막무가내의 봉천이어도 목숨을 가지고 객기를 부릴 생각은 없었다. 보법을 사용하여 순식간에 한 장 이상을 뒤로 물러서더니 곧장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일련의 동작이 얼마나 빠른지 진건이 뒤따르려 했을 때는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제야 반대편 숲에서 서용이 사부작사부작 기어 나왔다. 봉천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던 터라 온몸이 흙투성인 채였다. 그래도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였다. 순간의 기지로 적을 쫓아 보냈으니 제법 자랑스럽기도 했다.

“십여 합만 더 겨루겠다 나섰으면 당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저치의 상처 부위에서 출혈이 심하고 주변이 어두워 저를 못 봤기에 망정이지,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하여튼 오지랖은. 그냥 가래도 굳이 따라왔구나.”

찬영은 괜히 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마운 감정이 울컥 올라왔으나 순순히 마음을 표하기에는 쑥스러웠다. 물론 그를 잘 아는 서용은 입술만 삐죽 내밀었을 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저기, 팔은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다. 정말 고맙구나.”

검에 깊게 찔린 진건의 상처는 그냥 보기에도 퍽 심각했다. 찬영과 서용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벌써 몸뚱이에서 떨어져 나갔을 팔이었다. 가은과의 관계를 알지 못하는 그들로서는 진건의 행동이 무모하기만 했다. 나이 어린 선자에게 측은지심이 일어서 그랬겠거니 추측만 할 뿐이었다.

“저 선자는 어찌할까요?”

“우리를 속이고 오대산검의 편에 붙은 요망한 계집 아닙니까? 그냥 버려두고 갑시다.”

진건은 다리까지 다친 딸아이를 버려두고 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동행하기도 어려우니 퍽 난감하였다.

“아직 나이가 어리고 철이 없어 벌인 짓일 것이다. 내 운평까지만 바래다줄 테니, 너희들은 먼저 떠나라.”

“허나, 숙부님!”

발끈하는 찬영을 서용이 막아섰다. 단호한 진건의 말투와 태도만으로도 그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저 선자와 무슨 인연이 있음이 분명했다.

“말씀 잘 알겠습니다. 허나, 어르신께서도 크게 다치셨으니 당분간은 우리도 동행하겠습니다. 그것은 괜찮겠지요?”

“아니, 네가 뭔데?”

반발하는 찬영의 입을 틀어막으며 서용이 고개를 숙여 허락을 구했다. 예의 바른 그의 태도에 진건은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 우선 이곳을 벗어나자꾸나.”

아직도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고 있는 가은을 내려다보았다. 원래도 주름이 많은 그의 얼굴에 한층 더 깊은 주름이 생겼다. 이 아이의 비뚤어진 심성과 과한 욕심이 모두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딸아이를 등에 업었다.

“불편하더라도 산에서 내려갈 때까지만 업혀 있어라.”

“네, 감사합니다.”

가은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이 등을 거부했다가 다시 또 천서국의 요괴를 만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한, 운이 좋으면 열쇠를 구할 수도 있으니 좋은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째서 저 여우 같은 계집을 떼어내지 않은 것이냐?”

찬영은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지고 나서야 서용을 향해 쏘아붙였다. 그가 나서 진건의 편이 든 것이 영 못마땅하였다.

“이 멍청아, 내가 나서지 않았더라도 너의 숙부님은 저 선자를 구했을 거다. 너 따위가 반대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단 말이다.”

“그렇다고 치자, 그럼 왜 우리가 같이 가야 한단 말이냐? 저 계집이 또 무슨 악랄한 수를 쓸 줄 알고!”

투덜거리는 찬영을 바라보며 서용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남을 괴롭힐 때 보면 누구보다 비상한 머리거늘, 가끔 이렇게 물색없이 구는 걸 보면 철부지 어린애 같았다.

“저 선자는 인질이자 미끼다. 두고 보아라.”

더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서용은 휘적휘적 걸어가 버렸다. 그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찬영은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릴 뿐이었다.

은률이 정신을 차린 것은 꼬박 하루하고도 한나절 뒤였다. 두통으로 고개를 가눌 수 없는 상태에서도 그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가은이었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지금이라도 되돌아가 그녀를 구해야 했다.

“몸이 많이 상했으니 좀 더 누워있어라.”

“사형?”

차분하고 무미건조한 목소리의 주인은 장은이었다. 의자에 걸터앉아 자신을 내려다보는 양이 꽤 화가 난 듯도 보였다.

“이게 다 어찌 된 일입니까?”

그제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소박하고 단출한 방 안에는 침상이 두 개였다. 반대편에도 누군가가 누워있는 듯했는데 얼핏 보아도 여인이었다. 은률은 가슴이 끔찍하여 대번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여태 의식이 없다면 크게 다친 것이 틀림없었다.

“그 아이가 아니다.”

근처까지 다다르기도 전이었다. 장은이 앉은 자리에서 팔짱을 낀 채로 심드렁하게 웅얼거렸다. 일을 다 망치게 생겼는데도 사랑놀이나 하는 아우에게 퍽 짜증이 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죽게 내버려 두는 건데, 후회도 되었다.

“지금 그깟 년이 중요한 게 아니야. 계획이 다 어그러졌으니 큰일이구나.”

“죄송합니다.”

간략하게 상황 설명을 들은 뒤에야 은률은 안정을 되찾았다. 적어도 장은의 눈에 띄지 않았다면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는 방증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신교가 나타난 일은 놀랍지도 않다. 다만 천서국이 어째서 열쇠를 지키고 있었을까? 그게 계속 마음에 걸리는구나.”

“물건의 정체는 알지 못했으나 정확히 그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쪽에서 정보가 새어나간 게 틀림없습니다.”

장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장소의 정확한 위치는 소소정과 가은만이 알고 있었다. 하물며 강운선도 자신의 뒤를 따라왔을진대, 다른 이가 먼저 알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소소정이 천서국과 내통하였는가? 그러나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아는 한, 소소정의 가장 큰 욕망은 사문의 부흥과 명예였다.

“사형,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있긴 했습니다.”

“그게 뭐냐?”

아란과 한참 호각지세를 다투던 중이었다. 불현듯 나타난 봉천의 검에 겨우겨우 버티고 있던 은률의 검이 세 조각으로 부러졌다. 당황하여 진헌신장을 내질렀으나 상대의 동작이 반 박자 더 빨랐다. 주먹에 관자놀이를 맞은 은률은 바로 혼절하였지만, 덕분에 치명상은 피할 수 있었다. 하여, 수레에 실려 오는 도중에 그들의 대화를 언뜻언뜻 들은 것도 같았다.

“이 일의 대가로 신화정을 내어주는 약조를 하였다 들었습니다. 또한, 누구를 만나 거래를 한다는 말도 하였는데 이 일의 배후가 아니겠습니까?”

장은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번뜩 스쳐 지나갔다. 만약 그 예상이 맞는다면 실로 위험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주먹을 불끈 쥔 그의 양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곡해고의 사형제들이 나선 일이라면 서이국 황실의 명을 받은 것이다. 게다가 신화정을 내어주는 거래가 가능한 상대는 오직 한 사람, 경국의 황실이구나.’

황제의 든든한 오른팔이었던 현로 조양이 없는 지금, 태자 이석이 끌어들일 수 있는 가장 막대한 힘은 천서국이었다. 그들을 이용하여 려국의 보물까지 손에 넣는다면 황위는 당연히 그의 것일 터였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이루어져서는 안 될 일이었다. 려국의 멸망을 직접 겪은 장은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외세를 끌어들여 지키는 황좌란, 한낱 모래성에 불과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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