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述懷(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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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정을 먼저 고백한 이는 무영이었으나 이별을 먼저 고한 이는 창현이었다. 어차피 이루어지지 않을 마음이었건만, 돌아서는 정인의 뒷모습은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나라를 위한 일이고 백성을 섬기는 일이다. 이해해줄 수는 없겠는가?”
“여인 하나 버리는 일에 꽤 거창한 이유를 대십니다. 그저 물러나면 그뿐.”
그의 비겁한 변명에 더 매몰차게 돌아섰더랬다. 그러나 그리움은 점점 커졌고 덜어내지 못한 원망은 앙금이 되어 가라앉았다. 하여 운선이 태어나던 그 날도, 꼬물꼬물 첫걸음을 떼던 그 날도, 무영은 궁에 들지 않았다.
그 사이 정국은 하 수상하게 흘러갔다. 동생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했던 창의의 뜻은 바래져 또 다른 역심을 낳았다. 경국을 섬기던 이들이 국경지대까지 내어주었을 때, 그들은 대사성 성곤을 찾아가 구심점이 되어주기를 청했다.
“허나, 나의 딸아이가 왕의 검이 아닙니까? 하여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죽은 창의는 그의 제자와 같았으나, 어디까지나 운명이라 생각했을 뿐 창현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 그러나 그 결정은 성곤의 패착이었다. 경국은 고작 두 해 만에 탐욕스러운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다.
덫을 놓아 침략을 정당화하였고 복수하겠다 나섰던 일조차 함정이었다. 무고한 양국의 백성들이 죽어 나갔으며 려국의 충신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끝까지 왕을 지키던 성곤의 외동딸도 있었다.
만삭인 그녀의 뱃속에서 손녀를 꺼내 들고 성곤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삶의 의미를 잃은 그는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이 파국이 모두 창현의 탓이라 생각했다. 하여, 흩어졌던 창의의 사람들을 모은 것은 오로지 복수심 때문이었다.
“왕 창현은 일국의 왕으로서 감히 다른 나라를 섬기고 백성을 버렸습니다. 끝까지 그를 섬긴 충신을 돌아보지 않고 간악한 무리를 따라 멸국을 이끌었습니다. 마땅히 그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옳습니다.”
우두머리를 얻은 역적의 무리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동안 핍박당했던 설움을 갚는 과정은 잔인하고 냉정했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은 창현의 목숨이었다.
“무영, 부디 내 아들을 구해주시오.”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자윤이 무영을 찾아온 때가 바로 그즈음이었다. 아직 옹알거리는 아이를 품에 안은 애처로운 여인을 그녀는 모른 체했다. 오직 유치한 질투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영은 눈물로 호소하는 그녀를 뿌리친 그 순간을 평생 후회하게 되었다. 그날이 바로 왕후 자윤의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마마!”
뒤늦게 찾아갔을 때, 자윤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들만큼은 품에 꼭 감싸 안고 놓아주지 않았더랬다. 어미의 식은 체온에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를 받아든 이는 무영이 아닌 율천이었다.
“려국 왕실을 짓밟은 이는 천서국이다.”
“천서국이라니요?”
율천의 뜻밖의 말에 무영은 두려움을 느꼈다.
“역심이 모여 감당할 수 없는 나라를 불러들였다. 왕후를 죽인 이들이 바로 천서국의 자객이다. 이제 이 아이를 살릴 방법은 하나다.”
“먼저 대사형에게 의견을 물읍시다. 현명한 그라면 아이를, 아니 왕을 지켜줄 겁니다.”
무영이 다급하게 율천의 손을 붙잡았다. 경국에게 매달리려는 그의 의도를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창현이라면 고작 목숨을 구하고자 그 치욕을 견디지 못할 것이었다. 나라를 넘기느니 죽음을 택할 사람이었으므로.
“무영아, 천서국을 끌어들인 이들의 수장이 바로 형님이다. 그는 창현을 죽이려 한다. 역모다.”
“네?”
무영은 그길로 창현에게 뛰어갔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그를 구하고 같이 도망갈 작정이었다. 이따위 나라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와 함께라면 세상 끝까지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무영, 너는 반드시 살아남아 그곳을 지켜라. 그곳만 지킬 수 있다면 려국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부디 잊지 말아다오.”
이미 독을 삼킨 그는 오장육부가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도 무영을 붙잡고 유언을 남겼다. 창현이 지키려던 것은 자신의 목숨도 아들의 삶도 아니었다. 오직 려국, 죽기 직전까지도 그는 철저히 한 나라의 왕이었다.
“아니야, 듣지 않을래!”
꺼져가는 숨으로도 여덟 글자를 반복하는 그를 무영은 애써 외면했다. 귀를 막고 머리를 내저으면서도 그의 마지막 얼굴은 놓을 수 없었다. 하여 몇 글자는 그 후로도 기억 속에 똑똑히 남게 되었다.
“창현!”
그의 시신을 끌어안고 있는 무영 앞에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성곤이었다. 이 기가 막힌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매 끝으로 눈을 비비고 또 비벼댔다.
“참으로 가증스럽습니다. 사형을 믿었기에 죄 없는 민간인을 죽인 접니다. 그래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려국을 지키려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허나 이 꼴이 무엇입니까? 큰 나라 피하겠다고 더 큰 나라를 끌어들여 얻은 것이 고작 왕실의 목숨이란 말입니까?”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는 사매 앞에, 성곤은 무릎을 꿇었다. 바닥을 두드리며 고통에 찬 신음을 뱉어냈다. 그제야 무영은 성곤의 진심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창현의 죽음은 그의 뜻이 아니었음을, 천서국 또한 그의 의도가 아니었음을.
“저는 절대로 사형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평생 원망할 겁니다.”
그러나 무영은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다. 죗값으로 얻은 주운을 품에 안고 산속으로 숨어버렸다. 영영 세상에 나오지 않으리라. 빌어먹을 려국 따위, 다 사라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녀가 구월산으로 숨어든 이유였다.
***
난장판이 된 객잔을 치우는 건 형권의 몫이었다. 넋이 나가 앉아 있는 사형 곡해고는 물론이거니와 아란 역시 골이 잔뜩 난 모양이었다. 그의 온몸에는 어느새 땀이 범벅이었다.
“어째서 강운선을 보낸 것입니까? 사부님의 실력이라면 그를 잡아둘 수 있었을 게 아닙니까?”
참다못한 아란이 냅다 따지고 들었다. 평소 사부를 지극정성 섬겼던 그녀인지라 형권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손에 든 빗자루를 집어던지고는 쫓아와 아란을 잡아끌었다.
“아니, 어찌 이러니? 너답지 않구나. 어서 사죄드리고 물러나렴.”
“이해가 되지 않아 그럽니다. 성곤이 죽은 게 뭐 대수라고 이리 넋이 나가신 겁니까? 네?”
짝!
아란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이었다.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린 곡해고가 아끼는 제자의 뺨을 매섭게 후려쳤다. 어찌나 세게 내리쳤는지 아란의 고운 얼굴이 금세 부어올랐다.
“사형!”
형권은 식겁하여 곡해고의 오른손을 부여잡았다. 아란이 누구인가? 그의 제자이기 이전에 천서국 황제의 하나뿐인 여식이었다. 아무리 곡해고라 할지라도 공주를 해한 죄를 면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미천한 지식으로 뭘 그리 다 안다는 듯 잘난 체를 하느냐? 너 따위 제자는 필요 없으니 썩 꺼져라!”
“사형!”
분노로 덜덜 떨리는 곡해고의 손이 다시금 아란의 뺨을 향해 돌진했다. 형권이 제때 막지 않았다면 이번에는 이가 몇 개 빠질 뻔하였다. 그제야 아란은 사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사부님, 부디 어리석은 제자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그 자세로 한 식경이 지나고 나서야 곡해고의 거친 호흡이 가라앉았다. 그래도 붉어진 얼굴이 제 색깔을 찾기까지는 다시 한 식경이 지난 후였다.
“란아, 네가 틀렸다.”
“네?”
곡해고의 찢어진 눈이 한층 더 가늘어졌다. 초점 없는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모습은 꼭 어미를 잃은 새끼 삯 같았다.
“그 아이는 태을신공을 이미 깨우쳤다. 검귀 성곤조차도 5성에 그친 신공을 말이다. 만약 그가 죽일 생각이었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그러고 나서 생각하니 그 아이가 누군지 알겠더구나.”
“그럴 리가요.”
아란은 다시금 성질이 버럭 났다. 그녀에게는 강호 최강의 고수 곡해고였다. 감히 그를 이길 수 있는 이가 세상에 있겠는가? 그저 사부님이 충격을 받아 헛소리를 뱉는다 생각하였다.
“성곤과는 딱 한 차례 겨뤄보았다. 아마 폐하의 명으로 려국의 왕후를 시해한 날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혈기 왕성한 한창때였고 그는 이미 고수의 반열에 이르러 명성을 떨치던 시절이었다. 왕후의 죽음을 따지러 온 그는 별호 그대로 귀신과 같았다. 처음 신공을 접한 나는 그 후로 지금까지 단 하루도 그 공포심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를 무인으로서 존경하게 되었단다.”
“하지만 사형, 그날 이긴 쪽은 사형이 아닙니까?”
한쪽에서 듣고 있던 형권이 불쑥 끼어들었다. 자신의 기억과 사뭇 다른 이야기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맞다. 대결의 승자는 나였다. 그러나 내 능력이 아니었다. 그의 자멸이었다. 태을신공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 제어하지 못하는 무공, 하여 그는 그 후로 완공에 이를 수 없는 몸이 되었다 하더구나. 주화입마에 빠져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앞에 두고 나는 겨우 목숨만 붙은 채로 빠져나왔다. 성곤은 사라졌고, 려국은 망해버렸다. 모두 살아나온 나를 승자라 칭하였으나, 참으로 구차한 승리였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아란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수치스러운 기억이었던 것은 맞으나 그것이 성곤을 존경하게 될 이유는 아니었다.
“사부님, 제가 아는 사부님이라면 절치부심하여 수치를 갚아주려 했을 것입니다. 어찌 적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답니까?”
곡해고는 대답 대신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그날의 성곤의 모습이 그의 기억 속에서는 아직도 생생하기만 했다.
“나를 죽이러 온 이유 때문이며, 그가 주화입마에 빠진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네? 무슨?”
성곤의 검에 베인 곡해고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어차피 죽을 바에는 뭐라도 질러봐야겠다 싶어 쉴 새 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스스로 천서국을 불러 들인 려국인들의 무지함을, 경국에게 놀아나 더러운 화친을 맺은 그들의 무능함을. 그러나 그 어떤 도발에도 성곤의 낯빛은 평온하기만 했다.
“창현 따위를 왕이라고 섬긴 너희 려국인이 참으로 가엽구나. 하여, 위대한 천서국이 대신해 경국을 몰아내 주겠다. 더 훌륭한 나라를 세우도록 돕고 어진 왕을 찾아주겠다. 뿐이냐? 반드시 그 더러운 핏줄을 찾아 목숨줄을 끊어 놓을 테다.”
욕이 먹히지 않자 이번에는 회유책을 써보기로 했다. 창현에게 역심을 품었다던 성곤이었다. 려국 재건을 돕는다면 마음이 누그러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곡해고의 오만이요, 착각이었다. 왕의 이름을 뱉어내는 순간, 그의 핏줄을 위협하는 순간, 성곤의 낯빛이 빠르게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는 악몽이었다. 곡해고를 향해 휘두르는 검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검이 스쳐 지나가는 자리마다 살점이 뜯겨나갔다. 울컥 검붉은 피를 토해내면서도 성곤의 광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내력의 폭발을 감당하지 못한 그는 곡해고의 딱 한숨을 남겨놓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평생 잊히지 않더구나. 창현은 려국의 유일한 왕이다. 내 나라며 내 핏줄을 감히 누가 더럽다 욕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이다. 결국, 그 뜻을 이뤄내어 핏줄을 키워냈으니 정말 대단한 인물이 아니더냐?”
곡해고는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빗물 때문에 질척해진 땅이 이미 물렀는데도 개미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몇 년이 걸릴지, 평생이 걸릴지, 아니 영영 집을 잃을지도 모르면서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그들이었다.
“나는, 단 한 순간도 내 목숨보다 황제를, 나라를 귀히 여긴 적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여 그의 그 처절한 애국심이 부럽고 존경스럽더구나. 란아, 과연 너라면 어찌하겠느냐? 천서국이 무너진다한들, 그 사람처럼 다 내어놓을 수 있겠느냐?”
아란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