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義疏(의소)
무영의 호흡이 점점 가빠졌다. 운선의 내력으로 독기를 일부 빼냈지만 크게 효험은 없었다. 천서국의 독충을 조합한 이것은 제조한 곡해고조차도 해독하기 어렵다는 극독이었다. 무영의 내공이 웅혼하기에 망정이지 평범한 사람이라면 일각을 버티지 못했을 터였다.
“지금이라도 가서 해약을 달라고 하겠습니다.”
결국, 운선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무영의 만류에 빈손으로 객잔을 나온 일이 두고두고 후회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무영은 고개를 저었다.
“소용없다. 어차피 가도 해약은 없다. 애초에 죽이려는 목적이기에 해약 따위 가지고 다니지 않는 작자다. 다행히 네 덕에 기경팔맥에 침범하지 못했으니 시일이 지나면 알아서 사그라들 것이다.”
“하지만,”
그다음을 알기 때문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무영의 말처럼 당장은 목숨을 잃지는 않을지도 몰랐다. 다만 내력을 끊임없이 소진하게 되어 수명이 단축될 것이었다.
“안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 하지만 괜찮다. 이게 다 내 업보인가 싶다. 차라리 마음이 가볍구나. 그간 했던 몹쓸 짓들을 안다면 나를 동정하지는 못할 거야.”
“사숙.”
무영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운선은 슬프기만 했다. 그녀가 평생을 견뎌왔을 죄책감과 외로움을 알기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언제부턴가 무영에 대한 미움은 사그라들고 없었다. 주운을 보내 목숨을 구해주고, 평생의 검법을 전수해준 고마움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너는 어찌 나를 따라온 게냐? 장은이 따라오는 줄은 알았지만 네가 온 줄은 몰랐다.”
무영은 부러 화제를 돌렸다. 운선의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요량이었다.
“그곳의 열쇠를 찾는 중이었으나 다 찾는다고 해도 장소의 의미를 풀지 못하였습니다. 장은이 사숙을 쫓는 이유 역시 같다고 사료 되어 감히 뒤를 밟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오히려 잘 되었어. 마지막 열쇠를 찾은 뒤에는 너를 만날 생각이었으니까. 단번에 두 가지 일이 해결되었으니 내 다친 것도 아무렇지 않단다.”
“그런데 어떻게 이곳에 열쇠가 있는 줄 아셨습니까?”
운선은 자신의 안위를 염려하는 무영의 마음을 알았기에 더 살갑게 대답했다. 실은 지금 당장이라도 설이에게로 모시고 가 치료를 받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또한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가 아는 한, 이무영은 이 강호에서 가장 고집이 센 사람이었다.
“장은 그 머저리는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알지만, 세상에 다시 없을 헛똑똑이야. 반년 전, 그가 금황자를 만났을 때부터 뒤를 쫓고 있었다. 수수께끼의 답을 아는 이는 우리 사형제들밖에 없으니 당연히 내 행방을 수소문하리라 예상했다. 나는 역으로 그걸 기회 삼아 마지막 열쇠의 행방을 알게 되었지.”
“열쇠를 찾으려 하신 건, 그곳을 열기 위함입니까?”
운선의 질문은 많은 것을 함의했다. 여태 숨어 살던 이무영이 스스로 나서 열쇠를 찾은 이유, 굳이 곡해고를 자극하여 그곳의 존재를 각인시킨 이유. 암암리에 회자 되던 전설 같은 그곳을 전면에 부각하려는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지. 우리 대단한 사형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언젠가는 드러날 일이었다. 때를 정하는 것이 어려웠을 뿐, 내 결심은 오래전에 섰다. 그리고 드디어 경국과 천서국의 황실이 움직였다. 표면적으로는 황위 다툼의 돌파구겠으나 진실은 남의 것을 탐내는 도둑놈 심보인 것을. 하여 더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그곳마저 저들 손에 넘어간다면 려국은 아예 역사 속에서 사라질 테니까.”
무영의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비록 과정은 아름답지 못했으나 오래 묵혀온 과제를 끝마친 기분이었다. 어차피 이리되었을 일을 여태 도망친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다.
“운선아, 네가 운이와 구월산에 왔을 때, 마음이 흔들렸다. 정인과 함께하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기쁨일진대, 그걸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깟 나라가 뭐라고 너에게 다 떠넘기는 세상이 밉기도 했다. 그런데 얘야.”
무영은 미처 다음 말을 하지 못하고 잠시 멈췄다. 낮에 온 비로 축축해진 땅에서 지렁이가 몸을 비집고 나왔다. 이대로 아침이 되면 말라 죽을 게 뻔한데도 뭐가 좋은지 몸뚱이를 이리저리 꼬아댔다.
“그렇게 미워했던 사형이건만, 평생 그를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했건만, 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만으로도 깨닫게 되더구나. 아, 내 잘못이구나. 내가 나라를 버렸을 때, 대사형은 지키려 했다. 율천 사형의 어리석은 선택이 너의 목숨을 지켰듯, 대사형은 너의 아버지를 죽여 백성들을 구했다. 나 따위가 범접할 수 없는 숭고한 선택을 그는 매 순간 해왔더구나.”
“아버지를 연모하셨습니까?”
운선의 질문에는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고마움이기도 했다. 려국인 중 누구도 아비를 비난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것이 오롯이 죄책감이 되어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당연한 원망이려니 받아들이고 산 삶이었다. 그래도 한 번은, 단 한 명이라도 아비를 동정해 주기를 바랐는지도 몰랐다.
“맞다. 그를 만난 이후, 연모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망국의 왕이 백성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잘 안다. 하여 나는 그의 오명을 애써 변명하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어질었는지를, 얼마나 백성을 위했는지를 알면서도 말이다. 대신 그에게 책임을 묻고 죽음에 이르게 한 대사형을 증오했다. 그가 아니라 너를 구한 율천 사형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의 정인에게 지어미로서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네 어미를, 그를 대신하여 목숨을 얻은 너를 미워했다.”
“…….”
운선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무영이 안쓰러워 눈물을 떨궜다. 그녀가 얼마나 창현을 아꼈는지, 고작 몇 마디 말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대답 대신, 그녀의 차가운 손을 꼭 잡아주었다.
“비겁하게 도망치고 나서 내 평생은 후회였다. 감히 뭣도 아니면서 네 운명을 논하고 함부로 참견했던 내가 혐오스러웠다. 하여, 언젠가 운이가 나에게 칼을 겨눌 때까지만 살고자 다짐했었다. 허나, 너와 그 아이는 나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더라. 용서와 이해, 내가 이뤄내지 못한 두 가지를 너희들은 진작에 깨달았더구나. 감히 뭣도 아니면서 네 운명을 논하고 함부로 참견한 내가 혐오스러울 뿐이었다. 운선아, 이제 나는 창현의 숙원을 이뤄주려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네 몫이다.”
“네, 사숙. 감사합니다.”
미약하게 맥이 잡히는 무영의 손목을 그러쥐고는 운선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창현이 지키고자 했던 그곳, 려국의 모든 것이 있는 그곳으로 향하는 첫 관문이 시작된 것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려국의 글자는 경국의 글자에서 비롯되었다. 다만 창의적인 선조들은 우리의 말소리를 반영하여 경국 글자에 담긴 뜻과 음을 바꾸어 사용했지. 이 수수께끼 역시 그러하다. 素那佛阿尉九尊物(소나불아위구존물). 음으로만 읽어서는 도저히 알 수 없을뿐더러, 뜻으로 푼다고 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 하얀 어쩌고 부처 언덕의 벼슬이 아홉 개의 높은 물건. 어이없는 글자 조합이 되어버리지. 허나, 이를 뜻과 음으로 나누어 해석하면 달라진다.”
素那佛阿尉九尊物
하얀 내를 건너는 소의 뿔, 그것이 가리키는 아홉 개의 우물.
바닥에 하나씩 글자를 써나가는 무영의 얼굴에 은은한 달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미 절정의 미모를 잃어가는 나이인데도 지금만큼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아마 너도 알 테고, 너의 누이 현진도 아는 내용일 것이다. 또한, 수년 동안 칩거하며 닥치는 대로 려국인을 잡아들여 괴롭힌 끝에, 조양 역시 여기까지는 알아내었지. 하지만 이것 역시 수수께끼이다.”
무영은 차분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정인을 잃은 후, 그녀는 삶에 대한 의지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할 일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그 뒤부터는 오직 이 이야기를 전하기 위한 삶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나(素那)는 원래 ‘쇠나’라는 지명에서 비롯되었다. 내의 물이 빨라 물살이 하얗게 이는 모습을 부른 말이었지. 려국의 표기법을 경국의 발음으로 읽으면 쇠금(金), 내천(川) 즉 금천(金川)이 된다. 불아위(佛阿尉)는 뿔 아래, 뿔은 각(角)이요, 아위는 바위(岩) 즉 각암(角岩)이 된다. 금천 지역에 큰 소의 얼굴과 같은 땅이 있었지. 뿔 모양 밑에 있는 고을 이름을 뿔아위라 불렀다. 구존물(九尊物)는 아홉 개의 우물, 각암 마을에는 구정(九井)이라는 우물이 있다. 이 모든 뜻을 합치면 그곳의 수수께끼가 풀린단다. 금천 각암 마을의 구정 아래.”
“아아.”
운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려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솟아올랐다. 비록 큰 나라 경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으나 문화와 정신에서만큼은 단 한 번도 꿇린 적이 없던 려국이었다. 그 대단한 역사를 잊었던 자신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운선아, 누가 뭐래도 너는 려국의 마지막 왕 창현의 아들이다. 려국은 경국 따위의 속국이 아니라, 독립된 나라이니라. 굽히지 말고, 꺾이지 말고, 잊지 말아라.”
“네, 사숙.”
운선의 선택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들어찬 달빛이 굳건한 의지를 대변해주었다.
‘아아, 당신의 아이가 이리 훌륭하게 자랐습니다. 너무 늦어 미안합니다. 죽어가는 당신을 차마 마주할 수 없어 끝까지 듣지 못하였고, 다 알고 나서도 차마 이 아이를 불구덩이에 집어넣을 수 없어 망설였습니다. 참 어리석지 않습니까? 내가 무슨 선택을 했듯 이 아이는 결국 당신의 뜻을 이어받았을 텐데요.’
무영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어느새 발작이 멈추고 호흡이 편안해졌다. 내력으로 억눌러 놓았으니 한동안은 버틸 수 있으리라.
“나는 가보련다. 보다시피 이제 쓸모없는 퇴물이 되었으니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무엇보다 나도 운이에게 가서 용서를 구하고 싶구나.”
“운이는 이미 용서했습니다.”
“안다. 그래도 마지막은 그 아이와 함께하고 싶구나.”
“네.”
무영은 마지막으로 운선의 어깨를 감싸 안아주었다. 이미 다 커버린 사내이건만, 그녀에게는 아직도 소년 같았다.
“운이는 강한 아이야. 그 아이가 스스로 보내주었으니 마음 쓰지 말아라.”
“…….”
운선은 그렇게 한참 동안 어머니 같은 사숙의 품에 안겨 흐느꼈다. 끝끝내 덜어내지 못했던 외로움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서는 좀처럼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아비는 물론이거니와 너의 어미는 진심으로 너를 지키려 했다. 내 평생 그녀를 시기하고 질투했으나 그 마음만큼은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대사형은.”
무영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울컥 감정이 치받쳐왔으나 꼭 말해주고 싶었다. 그의 숭고한 마음을 전해주고 싶었다.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다. 너의 완공을 돕는 것이야말로 그가 속죄하는 길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것이 너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
휘영청 떠올랐던 초승달이 구름 뒤로 조금씩 몸을 숨겼다. 부둥켜안고 있는 두 사람이 안타까워 그 역시 눈물이 나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