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舐犢之情(지독지정)
진건과 헤어지고 나서 한 시진쯤 지났을까? 숲속의 어둠은 고요하고 짙었다. 심지어 낮에 내린 비 때문에 달도 뜨지 않으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공포. 가은은 푹푹 찌는 밤 더위가 무색하게 오들오들 몸을 떨었다.
‘숨을 곳이라고는 나무 위밖에 없구나.’
주변을 휘둘러보던 가은은 그나마 줄기가 튼튼하고 키가 작은 노송을 골랐다. 비록 대단한 무공은 배우지 못했으나 기본기는 익힌 터라 나무 정도는 쉬이 오를 수 있었다. 다행히 더운 여름 볕에 물기가 바싹 말라 둥치가 따뜻했다. 이대로 밤을 새워도 별 탈은 없을 듯싶었다.
“어?”
목표한 나뭇가지 위로 마지막 한 발을 내디디려고 할 때였다. 뭐에 걸렸는지 왼쪽 발이 영 빠지지 않았다. 힘껏 차보고 줄기에 문질러 보아도 소용없었다. 아무래도 다시 내려갔다가 올라와야 할 듯싶었다. 가은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으악!”
“찾았다!”
까무러치게 놀라는 가은과 달리 봉천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왼발을 쥔 두 손가락을 조물조물하며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우리 란이가 그러더라? 네가 아주 예쁘장하게 생겼다고. 정말 그런가, 얼굴 한 번 보여주련?”
“으으으으으.”
극심한 공포심에 가은은 눈을 질끈 감았다.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벌어지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어떻게든 도망가야 하는데 몸이 꽁꽁 얼어 움직이지 않았다.
“사, 살려주세요.”
“뭐?”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 겨우 구걸이었다. 그러나 조금도 수치스럽지 않았다. 어떻게든 얼굴이 뜯기는 끔찍한 상황만은 피하고 싶었다.
“살려주세요, 제발.”
“어머? 얘는. 내가 언제 죽인다고 했니? 네 잘난 낯짝 좀 보여달라는데 웬 목숨 타령? 너 자꾸 짜증 나게 이럴래?”
“아악!”
봉천이 손가락에 힘을 주자 아슬아슬 매달려 있던 가은의 몸이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왔다. 노송의 거친 껍질에 쓸린 손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러게, 스스로 내려왔으면 다치지 않았잖니. 너 참 멍청하구나?”
“으으으.”
봉천은 얼굴을 가리고 있는 가은의 두 팔을 거칠게 걷어냈다. 그러더니 기어코 턱을 들어 올려 그녀의 얼굴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좀 어리긴 하지만 아주 마음에 드는 얼굴이구나. 어쩜, 피부가 이리 연하고 보드랍니? 이러니 그 머저리 검객이 네년 목숨 구하겠다고 설치지.”
“으으으.”
가은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차라리 객잔에서 죽을 걸, 아니 당나루 초옥에서 은률과 함께 죽을걸. 모든 순간이 다 후회였다.
“얘야, 안타깝게도 네 얼굴이 아주 마음에 드는구나. 요즘 내가 바빠서 웬만하면 그냥 보내주려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 너무 갖고 싶구나.”
“네? 네?”
겁에 질린 가은이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어떻게든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을 버둥거렸지만 어림없었다. 봉천이 뜯어내기로 마음먹은 얼굴을 얻지 못한 적은, 평생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그래도 너에게 기회를 줄게. 이대로 네 것을 훔치면 불공평하잖아. 내가 딱 천을 셀 테니, 그사이에 도망가려무나. 대신 다시 잡히면 그때는 거침없이 뜯어줄 테야. 호호호.”
“으으으으으.”
어차피 의미 없는 자비라는 걸 알면서도 일단은 다행이었다. 무시무시한 고통을 유예할 수 있다면 저 변태 살인마의 발바닥에 입을 맞출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시작!”
가은은 턱을 잡고 있던 봉천의 손이 떨어지자마자, 벌떡 일어나 뛰기 시작했다. 긴장으로 몸이 마비되어 몇 걸음도 떼지 못하고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 달렸지만, 또 얼마 못 가서 바닥을 굴렀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숨이 끊어질 듯 차오르고 몇 번을 더 넘어지고 굴렀으나 뛰고 또 뛰었다.
“구십구, 백…….”
공포심 때문일까? 이상하게도 봉천의 목소리가 조금도 멀어지지 않았다. 이제 삼백을 넘어서고 있는데도 마치 귓가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그럴수록 가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구백구십구……천! 여깄네!”
“흐억!”
마지막 숫자가 불리는 순간에서야, 애초에 도망은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깨달았다. 하얀 분칠이 반쯤 벗겨진 기괴한 얼굴로 키득거리는 저 요괴는 처음부터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얼마나 신이 났을까? 천이 아니라 억을 셌어도 그의 거미줄을 빠져나가지 못했을 터였다.
“으아아악!”
가은은 마지막으로 있는 힘껏 비명을 질렀다. 살려달라는, 누군가가 들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담은 외침이 아니었다. 평생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으나 결국 누구의 위에도 올라서 보지 못한 처량 맞은 자신이 불쌍해서 내지르는 한탄이었다. 려국 옹주의 딸이건만, 고귀한 신분을 누려보지도 못한 억울함이 가득 담긴 고통의 소리였다.
“아휴, 골 울려. 안 되겠다. 너무 늦기도 했고 귀찮기도 하니 바로 작업하자꾸나.”
봉천은 소매 속에서 손바닥만 한 비수를 꺼냈다. 자루를 빼내니 얼굴이 비쳐 보일 정도로 맑고 예리한 검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냥 스치기만 해도 피부를 벗겨낼 것 같이 날카로웠다.
“움직이지 마. 혹시 아니? 깨끗하게 벗겨내면 며칠 더 살 수 있을지.”
“아아아아악!”
가은이 비명을 지르거나 말거나 봉천은 태연한 얼굴로 비수를 들이댔다. 딱 손가락 한 마디 정도를 사이에 두고 요리조리 각을 재보고 있었다.
휘익!
챙!
극렬한 살기에 봉천은 데구루루 굴러 피했다. 본능적으로 좌측으로 내지른 비수에 옹골찬 돌멩이가 날아와 부딪쳤다. 내력을 담아 던진 암기 때문에 비수는 반 토막이 되어버렸다.
“누가 내 귀한 물건을 망가뜨렸느냐?”
앙칼지게 쏘아붙이는 봉천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감히 일을 방해하다니 용서할 수 없었다.
“오랜만이구나.”
“어? 너, 너는?”
목소리만으로 알아챈 마진건처럼, 봉천 역시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벌써 수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일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자신과 형권을 상대로 수백 합을 겨루면서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던 사내, 사형제들을 살리기 위해 순순히 목숨을 내어놓았던 그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비록 실력으로는 그들이 우위에 있었지만 어쩐지 진 것 같은 기분 때문에 몇 날 며칠 괴로워하기도 했더랬다.
“날 방해하면 이번엔 진짜로 죽인다.”
“그러자.”
진건은 여러 말하고 싶지 않았다. 피투성이가 된 딸의 모습을 보는 순간, 오직 상대를 죽이겠다는 충동만이 그를 지배했다. 저 불쌍한 아이를 감히 죽이려고 한 죗값을 톡톡히 치르게 해줄 작정이었다.
휘익!
초식을 외치지도 않았다. 어차피 그의 무공에는 이름이 없었으므로. 살기를 가득 담은 창 미타는 거대한 존재감을 뽐내며 적의 가슴을 찔러 들어갔다. 곰이 무시무시한 발톱을 들이밀듯 묵직하지만 섬세한 일격이었다.
“흥!”
봉천은 크게 코웃음을 치더니 소맷자락을 넓게 펼쳐 허공에 휘저었다. 평소에는 거의 쓰지 않는 그의 검 건달바가 신묘한 자태를 드러내었다. 이미 겨뤄 본 상대이기에 웬만한 잡기로는 제압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챙
챙
창과 검이 만나 눈 깜짝할 새에 수십 합을 부딪쳤다. 편초처럼 휘어지는 그의 유연한 검날은 빠르고 정확했다. 창의 큰 반경 때문에 생기는 공간의 여백을 파고들어 진건의 사지를 얕게 베어냈다.
그러나 미타 역시 대단한 귀물이었다. 크게 휘두르는 대신 깊이 파고들었다. 작은 자상들을 양보하는 대신 좌둔부를 찔러 드니, 봉천의 무게중심이 단번에 무너졌다. 어느새 두 개의 무시무시한 무기는 상대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이 개자식이!”
둔부를 베인 봉천의 아랫도리에서 피가 툭툭 떨어졌다. 붉은 옷이기에 망정이지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몰골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왼쪽 다리를 심하게 절뚝이면서도 봉천의 공격은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매서운 초식을 몰아쳐 대니, 금세 진건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가라!”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진건은 봉천을 감당할 수는 있었으나 제압할 자신은 없었다. 만약의 경우, 자신이 진다면 딸아이의 목숨은 끝이었다. 그녀가 안전한 곳으로 도망칠 때까지 이 요물을 막아서는 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이었다.
“으으으, 불가능해요.”
“뭐?”
가은은 몇 번이고 일어서려 노력했지만 움직이지 못했다. 발목에 아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제야 진건은 딸아이의 부상을 알아챘다. 퉁퉁 부어오른 발목은 그냥 삔 정도가 아니라 골절인 듯도 싶었다. 혼자서는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할 게 분명했다.
‘미타를 버리고 한쪽 팔을 내어주면 얼마간의 시간을 벌 수 있다. 아이를 들고 뛰면 고을 하나 정도는 앞설지도 모른다. 게다가 저놈은 둔부에 상처가 깊으니 끝까지 따라오지는 않을 것이다.’
딸아이를 위해서라면 팔 한쪽과 미타 따위는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다만 아비로서 끝까지 지켜줄 역량이 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고 초라할 뿐이었다.
휘익!
진건이 양손으로 잡고 있던 미타에서 오른손을 뗐다. 받치는 힘이 줄어들자 창이 손에서 핑그르르 돌았다. 그 회전력을 이용하여 앞으로 두어 걸음 나아가니 상대의 공격 반경 안에 진격하는 꼴이 되었다.
“흥! 어리석은 놈. 이대로 끝이구나.”
“그러자!”
일부러 봉천의 검날 앞으로 왼손을 내민 진건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찰나의 고통을 견뎌야 딸아이를 안고 도망갈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남들보다 통증에 둔한 그였지만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의연하게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쉬익!
봉천의 건달바가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순간, 진건은 자신도 모르게 가은을 바라보았다. 제발 이 고육지책이 자충수가 아니길 빌고 또 빌었다.
챙!
“너 이 녀석!”
비월과 부딪친 건달바는 가느다란 검신을 바르르 떨었다. 그 검을 쥔 주인 역시 진동을 그대로 느끼며 뒤로 성큼 물러섰다.
“과연 보검은 보검이로구나!”
비월이 찬영의 두 손안에서 윙윙 진동음을 냈다. 마치 진짜 주인을 만난 보검의 탄성 같았다.
*** 지독지정(舐犢之情):
송아지를 핥는 소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