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虎視牛步(호시우보)
상황이 점점 불리해지는 것을 깨달은 찬영은 재빨리 객잔 밖으로 뛰쳐나갔다. 서용이 깨어 있다면 모르겠지만 괜히 싸움에 끼었다가 엄한 이의 목숨을 날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철없는 객기를 부리는 데 일가견이 있는 찬영이지만 고수들의 혈전을 대면하고 나니 티끌만큼도 무모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
“용아, 제발 좀 깨어나자. 제발!”
아무리 마른 체형이라 해도 성인 남성의 무게였다. 찬영의 발은 점점 느려지고 숨도 가빠졌다. 저들 중 누구라도 손이 비면 열쇠를 가지러 쫓아올 테니 최대한 멀리 도망가야 하건만, 도무지 체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진심으로 이 녀석을 버리고 갈까 생각할 정도였다.
“어?”
얼마나 달렸을까? 찬영은 저 멀리 보이는 그림자에 가슴이 섬뜩해졌다. 또 천서국의 자객인가 싶어 일단 수풀에 몸을 숨겼다. 눈만 빼꼼히 내어놓고 지켜보니 그림자가 점점 거대한 형체가 되어 다가왔다.
“마숙부님?”
찬영은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수풀 밖으로 뛰쳐나갔다. 서용은 어찌 되거나 말거나 아무렇게나 내팽개쳐 버렸다. 진건과는 평소에 말도 몇 번 해본 적 없는 사이건만, 지금은 이토록 반가울 수가 없었다.
“몸은 상하지 않았느냐?”
“다행히 멀쩡합니다. 열쇠도 찾았습니다.”
찬영은 며칠 동안의 일을 압축하여 전하는 한편, 운선의 위기를 고하였다. 여기서 한가롭게 안부를 물을 때가 아니었다. 검선이 쓰러졌으니 운선 혼자 상대해야 하는 천서국의 적만 셋이었다. 여기에 장은까지 합세하면 설상가상이었다. 진건의 도움이 필요했다.
“저는 알아서 갈 테니 객잔으로 가보십시오. 검선 어르신이 다쳐 강 숙부님만으로는 버거울 겁니다.”
“되었다. 너를 무사히 데려오는 게 내 일이다.”
“네?”
찬영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당장이라도 경공을 발휘하여 객잔으로 뛰어갈 줄 알았건만, 뜻밖의 반응이었다. 마진건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가 거듭 호들갑을 떠는데도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어찌 이러십니까? 마 숙부님은 의리라면 사지를 잘라내도 군말 없으실 분이 아닙니까?”
다른 이도 아니고, 마진건이 사형제를 모른 척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신교 내에서 이기적이고 매몰찬 사람은 오직 윤찬영, 자신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운선을 구하겠다고 애가 닳는 사람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설마 강 숙부를 버릴 생각입니까?”
아예 연향의 반대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마진건을 향해 찬영이 소리를 빽 질렀다. 어쩐지 배신당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버리다니? 누가 누굴 버린단 말이냐? 나는 다만 내 할 일을 할 뿐.”
“하지만!”
불만이 가득한 찬영을 바라보며 진건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좀처럼 물러설 것 같지 않아 억지로 하는 대답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눈빛에 흔들림이 없었다.
“운선은 곡해고에게 지지 않는다. 이 강호에서 그를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찬영은 진건의 확신에 찬 말투에, 순간 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것은 하루 이틀간에 얻어진 거짓 믿음이 아니었다. 피를 나눈 가족보다도 더한 애정과 굳건한 신뢰.
뜬금없이 운선의 든든한 등이 떠올랐다. 이제 끝이구나 생각하는 순간, 들려온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다. 찬영은 명치 끝이 간질간질하여 자신도 모르게 손톱으로 북북 긁어보았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호오오오오.”
다시 서용을 둘러업은 찬영은 성큼성큼 나아가는 진건의 등 뒤를 쫓았다. 밤 산새가 길을 재촉하는 그들의 머리 위에서 긴 울음을 뱉어냈다. 찬영이 입을 다무니 세 사람 사이에서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도망가는 상황에 걸맞지 않게 호젓한 여름밤이었다. 이제 꺾어진 외길만 지나치면 지긋지긋한 연향도 끝이었다. 찬영은 이 힘든 여정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얻어낸 자신이 꽤 기특하여 길게 숨을 뱉어 보았다. 그 덕인지 여태 정신줄을 놓고 뻗어 있던 서용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이 맹꽁아, 깼으면 그만 일어나라. 허리 분질러지겠다.”
“아이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바람에 서용의 아득했던 의식이 돌아왔다. 온몸이 멍투성이에 두통이 극심했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리니 마진건의 커다란 어깨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마 숙부님께는 간단하게 네 얘기를 해놓았다. 해코지하거나 교도가 되라고 권하지 않으실 테니 안심해라.”
“아아.”
혹여 오해가 있을까 봐, 찬영이 재빨리 상황을 정리했다. 그렇다 해도 껄끄러운 마음은 여전했다.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해도 죽이겠다고 칼날을 겨누던 상대에게 갑자기 관대해질 리 없었다. 그러나 대충 보아도 죽을 뻔한 자신을 마진건이 구해준 상황이 분명했다. 고마움을 전달하지는 못할망정 인상을 쓰고 있으면 안 될 듯싶었다.
“저기,”
“쉿!”
예의 바른 서용이 머뭇머뭇 감사 인사를 드리려 할 때였다. 안 그래도 험악한 진건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원숭이처럼 큰 귀가 미세하게 움직이더니만 두꺼운 입술 사이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설마.’
진건의 심장 박동이 급격하게 빨라졌다. 바람결에 들려오는 이 소리는 어린 여인의 비명이었다. 뒤이어 소름 끼치는 쇳소리 역시 사람의 것이 분명했다.
“아아악!”
그제야 뒤에 선 두 사람에게도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연향을 벗어나면 끝이라 생각했건만, 또다시 위기를 마주한 것 같았다. 세상 낙천적인 찬영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역력했다. 방금 의식이 돌아온 서용이지만 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너희들은 다른 샛길로 넘어가라. 절대로 따라오면 안 된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가은에게 위험이 닥친 게 분명했다. 만약 비명에 뒤따르던 웃음의 주인이 예상하는 그가 맞는다면 더 큰 일이었다. 자신이 간다고 해도 목숨을 거는 싸움이 될 것이었다.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허나, 너라면 어떤 상황이 닥쳐도 잘 해낼 것이다.”
진건의 크고 따뜻한 손이 찬영의 머리 위를 잠시 스쳤다. 이 인사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막 돌아서려던 순간, 잊었던 말이 생각났다. 어린 후배들에게 반드시 해줘야 하는 그 말이.
“찬영아, 신교의 대의 따위는 네 몫이 아니다. 너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나라 때문에 목숨을 걸지 말아라. 그러니 이 일이 끝나거든 자유롭게 날아가려무나.”
“숙부님?”
찬영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진건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뛰쳐나갔다. 고작 두세 걸음 만에 손도 닿지 않을 거리까지 멀어져갔다.
“그런 말을 하면 어찌 도망가냔 말이야.”
찬영은 꽉 메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늘 무뚝뚝한 진건의 한 마디가 돌림노래처럼 머릿속을 윙윙 울렸다. 이대로 혼자만 살겠다고 가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품속을 한참 뒤적이던 찬영은 배꼽 근처까지 깊이 숨겨둔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뒤에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서용에게 건네주었다.
“맹꽁아, 여기까지가 우리의 인연인 듯싶다. 그래도 함께 한 정이 있으니 부탁 하나만 들어다오. 이 열쇠를 소중히 지니고 있다가 우리 강 숙부님께 꼭 좀 전해 다오. 혹 전하지 못할 상황이라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겼으면 좋겠구나. 장은과 한통속인 오대산검에게 넘기는 짓을 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
서용은 차마 대답을 할 수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그의 손에 주머니를 꼭 쥐여주며 찬영이 해맑게 웃었다. 그의 얼굴은 마치 열 살밖에 안 된 소년 같았다.
“그래도 맹꽁이 네가 함께여서 좋았다. 가끔은 진짜 지기(知己)가 된 것 같기도 하였다. 고맙다.”
찬영은 연신 코를 훌쩍이더니만 소매로 콧등을 쓱 훑었다. 부끄러워 더는 말을 붙이지 못하고 진건의 뒤를 쫓아 들입다 뛰었다. 그런 그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서용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장승처럼 서 있었다.
“대의 따위라니, 나야말로 그런 멋진 말을 듣고 도망갈 수 있겠냐? 돌제비 주제에 혼자 의리 있는 척하기는.”
앞이 자꾸 뿌옇게 보여서 소맷자락으로 눈을 비벼보았다. 멍청한 찬영이 자신을 헌신짝 버리듯 떨구고 갔으니 쫓아가 골탕을 크게 먹여야지 다짐했다.
“호오오오오오.”
부지런히 걸어가는 서용의 머리 위로 산새가 다시금 긴 울음을 뱉어냈다. 아까와 같은 노래가 분명한데 이번에는 어쩐지 그를 응원해주는 것도 같았다.
퍽!
곡해고는 명치 바로 앞에서 운선의 주먹을 붙잡았다. 겨우 막아내기는 했으나 어마어마한 내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뒤로 한 장 넘게 밀려 들어갔다. 부엌 끝까지 다다라서야 몸의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너 이 녀석, 정체가 뭐냐?”
주름이 가득 잡힌 곡해고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우수수 떨어졌다. 이곳저곳 얽어 추한 얼굴에 붉은 기운이 번져나갔다.
“강운선입니다.”
“뭐?”
“태을신교 교주, 강운선입니다.”
운선이 차분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병기가 부딪는 소리로 가득했던 마당이 한순간에 고요해졌다.
“역시…….”
혹시나 기대했던 무영은 결국 굵은 눈물을 떨궜다. 태을신교가 멸문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코웃음을 쳤던 그녀였다. 하여 심한 고뿔에 걸렸는데도 그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무리하게 여정을 강행했다.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지난날에 대한 용서를 빌어야겠다는 다짐으로 수백, 수천 리를 걸어왔던 참이었다.
“성곤이 죽었어?”
충격을 받은 것은 곡해고도 마찬가지였다. 평생의 맞수이자, 지향점이었던 그가 이제 세상에 없다니.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구역질이 올라왔다. 손에 꽉 쥐고 있던 비파가 주르륵 미끄러졌다. 싸울 의지도 이유도 다 잃어버린 모습이었다.
“곡어르신, 오늘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는 제 식구들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결코, 어르신의 일을 방해할 의도가 없으니 이대로 겨루기를 끝냈으면 합니다.”
“……그가 죽었구나.”
“차후 다시 뵙는다면, 그때는 목숨 걸고 어르신을 상대할 것입니다.”
정중하게 말하고 나서는, 주먹을 거두어들였다. 무기력한 상대를 향해 살수를 날릴 생각은 없었다. 곡해고의 싸움은 이미 끝난 뒤였다. 멍한 눈빛으로 먼 산을 돌아볼 뿐이었다.
“장문주, 또 봅시다.”
금형권과 대치하고 있던 장은 역시 상황이 일단락되었음을 깨달았다.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었다. 잠깐 부딪쳐 보았지만, 이 무식한 사내랑은 사흘 밤낮을 싸워도 승부가 날 것 같지 않았다. 그나마도 운선이 곡영감을 맡아줘야 가능하지, 또 다른 일행이라도 온다면 끝이었다.
“하아, 열렬한 환영 인사에 감사드립니다. 이다음 환영식은 나중에 마무리 짓지요.”
“겁쟁이처럼 도망치는구나.”
형권은 부러 큰소리를 쳤지만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상대의 실력이 자신과 비등하여 버거웠던 데다가 사형이 다친 것도 염려되었다. 이쯤 해서 물러서 주니 살짝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사숙, 가시지요.”
운선은 망연자실하여 앉아 있는 무영을 부축하여 객잔을 나섰다. 이제 검귀 성곤의 부재가 알려졌으니 강호에는 또 다른 바람이 불 것이었다. 일부러 자초한 위기였건만, 운선의 마음속에서도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그의 죽음을 입 밖으로 낸 순간부터, 그동안 혼자 감내했던 모든 비극이 현실이 되는 셈이었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연향을 벗어나는 숲길을 지나며 운선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지난 몇 개월간, 그가 짜놓은 거대한 판이 드디어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 호시우보(虎視牛步):
범처럼 노려보고 소처럼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