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千客萬來(천객만래)
찬영은 슬슬 한계에 도달했다. 한나절이나 기절한 척을 하고 누웠으니 좀이 쑤실 만도 했다. 그는 애초에 주인 영감을 의심하고 있었다. 시골 촌부라기에는 지나치게 침착한 성정, 늙은이치고는 너무 가벼운 발걸음. 무엇 하나 어색하지 않은 점이 없는데 아무 의심 없는 서용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심지어 내가 본 사람 중에 최강 못생겼다.’
찬영은 음식을 내오는 영감을 내내 주시했다. 덕분에 미약은 만두가 아니라 차에 들어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역시 천서국 사람들이었군. 이제 어찌한다?’
아무리 두 사람만 남았다 해도 혼자서 감당할 능력은 없었다. 오히려 가장 위험한 곡해고가 버티고 있으니 목숨을 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헛똑똑이!’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깊은 잠에 빠진 서용이 새삼 한심하였다. 손가락으로 코를 세게 비틀어보았지만 깨기는커녕 미동조차 없었다.
“사부님, 그게 뭘까요? 당나루에 숨겨둔 그 물건 말입니다. 이석이 그리 찾는다면 필시 중요한 것일 텐데 짐작이 가십니까?”
다시 밖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찬영은 숨을 죽이고 그쪽으로 귀를 바짝 갖다 대었다. 일단은 정황을 파악해야 탈출할 방법도 생길 터였다.
“저놈들이 누군지 모르겠다만 만약 신교의 소속이라면 짐작 가는 바가 있다.”
“저들이 왜요?”
“며칠 전부터 선운검파 뒤를 캐던 놈들이지. 정체는 모르겠으나 꾀가 아주 많더구나.”
그제야 찬영 일행의 존재를 알게 된 아란은 퍼뜩, 가은이 내지르던 말이 생각났다.
‘물건을 뺏겼다고 했다. 혹 저들인가?’
그러나 확신할 수 없으니 지금은 혼자만 알고 있기로 마음먹었다. 사부님의 말씀을 들은 연후에 뒤져보아도 늦지 않았다.
“선운검파가 움직인 이유는 이금의 사주 때문일 것이다. 만약 문파 내부의 사정 때문이었다면 이석까지 움직일 리가 없지. 즉, 찾는 물건은 황위를 얻어내는 중요한 조건일 터. 먼저 손에 넣는 자에게 유리한 무엇일 것이다. 게다가 이석은 그리 악을 쓰며 지키던 신화정을 내어주겠다 했다. 고작 황자 따위가 결정할 수 없는 문제이니 황제까지 이 일에 진심이라는 뜻. 그렇다면 신화정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무언가가 관련되어 있다.”
“그런 게 있을까요?”
“있지. 려국이 관여했다면 말이다.”
“설마?”
곡해고는 무심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벌써 해가 저물어 주변이 어둑어둑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곳을 찾아 헤맸던가? 오랜 세월 가슴 깊숙이 묻어두었던 욕망이 다시금 스멀스멀 고개를 들고 있었다.
“려국의 모든 것이 있는 그곳. 물건을 찾는 일은 그곳을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관문인 듯싶구나.”
“아아.”
아란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천서국 황제인 아버지의 숙원이자, 오라버니 자홍의 꿈을 어찌 모를 수 있을까? 그 어린 시절에도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듣던 전설 같은 이야기였다. 가슴이 쿵덕거리고 손에는 식은땀이 났다. 이제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사부님, 아까 그 어린 낭자가 열쇠를 빼앗겼다 하였습니다. 그 말이 진실이라면 몰래 선자들을 따라왔다던 저들이 범인 아니겠습니까? 당장이라도 품을 뒤져 확인해 보지요.”
“흐음, 하긴 굳이 의심하지 않을 이유도 없지. 괜히 깨어나 수작을 부리면 귀찮으니 아예 목을 자른 뒤에 찾아보자꾸나.”
두 사람의 섬뜩한 대화를 엿들은 찬영은 큰일이구나 싶었다. 자신이야 빠른 발로 어찌어찌 피한다고 해도 서용은 죽은 목숨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맞붙어 싸우자니 상대의 실력이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란아, 저 순진하게 생긴 서생부터 처리하렴. 아주 꾀가 많고 연기에 능하니 깨어나면 골치 꽤나 아플 것 같구나.”
“네, 사부님.”
아란은 단번에 곡해고의 은밀한 눈짓을 알아들었다. 일부러 발소리를 쿵쿵 내어 위협하니 찬영의 눈꺼풀이 움찔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가까스로 눌러 참았다.
“쯧쯧, 젊은 나이에 안타깝구나.”
아란은 크게 한숨을 내쉰 뒤, 검을 높이 들었다. 이러고도 찬영이 눈을 뜨지 않는다면 그냥 목을 잘라낼 작정이었다. 딱히 원한이 없으니 불쌍한 마음도 들었으나 그보다는 물건을 찾고 싶은 열망이 더욱 컸다.
쉬익.
챙!
무언가에 세게 부딪친 란의 칼이 반원을 그리며 날아갔다. 벽에 깊숙이 박힌 검날을 본 그녀는 너무 당황하여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손바닥이 찢기는 바람에 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곡해고, 엄한 애들에게 손대지 말고 나와 이야기나 합시다.”
등불도 켜지 않았건만, 하얀 옷을 입은 이의 모습은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였다. 중년의 여인이었으나 얼핏 보아도 눈길이 갈 만큼 미인이었다.
“이게 누구신가? 그 대단한 검선 이무영이 아닌가? 내가 지금 꿈이라도 꾸는 건가?”
“글쎄, 그건 당신 사정이고, 시간이 없으니 허튼소리는 그만두시오.”
무영은 누가 권하지도 않았는데 정 가운데에 놓인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아란은 자신의 존재를 모른 체하는 상대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섣불리 따지지 못했다. 형언하기 어려운 압도적인 분위기에 감히 함부로 다가갈 수도 없었다.
“역시 그곳과 관련된 물건이 맞는군.”
“어차피 알고 있었으면서 괜히 떠보지 마오. 하여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이만 저 아이들을 놓아주는 거로 합시다.”
“흐음, 거래라는 게 주고받는 것이거늘, 어찌 이리 예의 없게 구는 건가?”
곡해고의 못난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이 상황이야말로 먹이가 제 발로 걸어들어온 꼴이었다. 뜻하지 않게 무영을 만났으니 쉬이 돌려보낼 마음이 없었다. 탈탈 털어내어 장소의 위치와 물건에 대한 정보까지 다 알아낼 작정이었다.
“내가 왜 당신과 거래를 한다 생각하지? 안타깝게도 난 협박 중이거늘. 못 알아들은 듯하니 다시 말하겠소. 저들을 보내주시오. 아니면 오늘 당신과 당신의 저 사랑스러운 제자의 목숨을 끊어놓겠소.”
“흥! 안 본 사이에 정신을 놓은 건가? 이십여 년 전에도 못 이겼던 자네가 이제 와 날 이길 수 있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군.”
곡해고가 예의 소름이 끼치는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쇳조각으로 그릇을 긁는 것 같은 소리를 듣자니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인제 보니 곡해고 당신, 퇴물이 다 됐구려. 설마 아직도 눈치채지 못한 것이오?”
“뭘?”
웃음을 멈춘 곡해고의 눈빛이 살벌하게 바뀌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미묘하게 변한 주변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장문주, 인제 그만 숨고 나오시게.”
“누구?”
무영의 말과 동시에 어둠 속에서 검은 인영이 나타났다. 머리를 긁적이며 등장하는 모습이 꽤 머쓱한 모양이었다.
“천서국 국사 곡해고 영감이 아니십니까? 참으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워낙 옛날이라 저를 기억하실지 모르겠군요. 황석파 장문 장은입니다.”
“하하.”
곡해고는 실로 황당하여 헛웃음이 다 나왔다. 무영의 존재만으로도 놀라운데 장은까지 튀어나오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내가 놓아둔 덫인 줄 알았건만, 아예 이 판 자체가 거미줄이었구나. 참으로 어리석었다.’
짙은 낭패감에 속이 쓰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되레 너스레를 떠니, 모르는 이가 보면 약속이라도 하고 만나는 자리처럼 보였다.
“내 너를 왜 모르겠느냐? 나보다 스무 살은 족히 어린놈이 야무지게 검을 휘두르지 않았더냐? 그때 방심하였다면 네 손에 죽을 뻔하였다.”
“그 오래전 일을 기억하시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깊은 인연으로 간직하고 있었건만 이리 예기치 못하게 뵙게 되어 당황스럽군요.”
“흥, 잘도 거짓말을 지껄이는구나.”
장은이 한 마디씩 뱉어낼 때마다 탁자에 앉은 무영이 이죽거렸다. 그를 흘겨보는 눈동자에는 상대에 대한 경멸이 가득 담겨 있었다.
“검선 어르신, 제가 사람을 붙여 몰래 따른 일은 죄송합니다. 허나, 덕분에 신교의 인재들을 구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이번만큼은 어르신을 도울 테니 노여움을 푸십시오.”
“흥, 내 아이들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네 사람이나 챙겨라. 거기, 언제까지 혼절한 체하며 능청을 떨 테냐? 얼른 일어나 네 친구 놈 데리고 꺼져라!”
무영의 일갈에 모두의 시선이 주방 안쪽으로 쏠렸다. 찬영은 뻘쭘하여 괜히 간드러지게 하품을 쩍 해보았다.
“하암, 영감님 덕분에 잘 잤습니다. 그럼 중한 말씀들 나누십시오. 저는 이만 총총히 가보겠습니다.”
서용을 어깨에 들쳐멘 찬영은 일부러 더 호들갑을 떨며 주방을 나섰다. 일련의 상황이 황당하기만 했으나 지금은 도망치는 게 우선이었다. 그러나 고작 열 걸음도 떼지 못한 채, 장은에게 길이 막히고 말았다.
“아아, 검선 어르신. 이러면 아니 되지요. 저들이 가져간 우리 물건은 놓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 뻔뻔하구나. 어째서 그것이 너희 것이냐?”
“경국의 땅에 있었으니 경국의 것이 아닙니까?”
“흥!”
무영은 갑자기 장은의 쪽으로 오른팔을 쭉 뻗었다. 본능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으나 팔은 정확히 그의 코 한 치 앞에서 멈췄다.
“그럼 네 코앞에 있으니 내 팔도 네 것이냐?”
“제가 어르신의 팔을 잘라 가지면 제 것이 되는 게 아닙니까?”
장은은 눈 하나 꿈쩍 않고 대꾸했다. 말투는 제법 예의를 차렸으나 눈빛만큼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뭐라? 이 배은망덕한!”
“말조심하십시오.”
두 사람이 치고받고 공방을 벌이는 사이에 곡해고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생각해 보니 오히려 잘 되었다 싶었다. 이왕 모두 모인 김에 소유권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자자, 남의 객잔에 와서 소유권 운운하지 말고 차근차근 따져보세.”
그는 손뼉을 쳐서 주의를 집중시키는 한편, 재빨리 아란에게 눈짓을 보냈다. 눈치 빠른 제자가 은근슬쩍 자리를 옮겨 찬영에게로 다가갔다. 여차하면 그를 덮쳐 물건을 찾을 작정이었다.
“나는 그 물건이 뭔지도 몰랐네. 그저 부탁을 받았을 뿐. 하여, 자네들보다는 객관적으로 상황을 볼 수 있다네. 자, 장문주의 말처럼 물건이 존재하는 곳에 소유권이 있는 건 사실이지. 몰래 훔치든, 강탈하든 말이야.”
“개소리!”
버럭 고함을 내지르는 무영을 무시하고 곡해고는 말을 이었다. 애초에 정당한 것은 없었다. 이 무시무시한 강호에서 순수한 의협은 이미 메말라 버렸으므로.
“물론 검선의 말도 틀리지 않네. 출처가 려국이었으니 려국의 것이 맞기도 해. 그런데 지금 여기 려국인이 누가 있나?”
“이, 이 영감탱이가…….”
무영은 그제야 곡해고가 나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신의 약점을 파고드는 그의 악랄한 수작에 꼼짝없이 걸려든 셈이었다.
“나는 애초에 려국과 상관이 없으니 열외, 장은 자네는 경국인이니 열외, 그리고 검선은 스스로 려국인을 포기했으니 열외. 즉 우리 중 누구도 려국인이 아니니 모두가 공평한 입장 아닌가?”
이야기를 마친 곡해고는 불쾌한 소리를 내며 웃어 젖혔다. 막장 논리를 있어 보이게 펼쳐 놓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반박하기도 어려웠다. 이제 겨루어 강한 자가 물건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보나마나이겠지만.
“과연 공평할까요? 한 사람이 더 있지 않습니까?”
후텁지근한 바람이 객잔 안으로 훅 불어닥쳤다. 또 다른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나타나자 여태 주눅이 들어 있던 찬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강숙부! 오실 줄 알았습니다.”
*** 천객만래(千客萬來):
천 명의 손님이 만 번씩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