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48화 (148/209)

148화. 山盡水窮(산진수궁)

가은이 산등성이를 막 넘었을 때는 이미 미시(未時)가 지난 뒤였다. 이른 아침부터 내린 부슬비로 옷이 흠뻑 젖은 탓인지 한여름인데도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오라버니는 어찌 되었을까? 아직 그 여자가 쫓아오지 않는 걸 보니, 이긴 걸까?’

그러나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면 벌써 은률이 자신의 뒤를 따라왔어야 했다. 지난 몇 달간, 그는 가은을 그림자처럼 따르며 보호해 왔다. 지금껏 오지 못했다면 최악의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다.

‘내 탓이 아니야.’

밀려오는 죄책감을 덜어내려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나 머릿속에서는 끝까지 자신을 보호하던 영인과 은률의 얼굴이 떠나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생사 따위에는 관심도 없던 가은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진심을 확인한 지금, 가슴속에 큰 바위가 들어앉은 것 같았다.

‘이게 다 강운선, 그 악랄한 마두 때문이다. 그는 나를 질녀로 여긴 적이 없다. 의심하고 덫을 놓았으며 기만했다. 그놈이 내 가슴을 더듬은 파렴치한의 행동만 보아도 그러하다. 열쇠를 훔쳐 가려던 것이 틀림없다.’

불행 중 다행으로 열쇠 네 개는 여전히 그녀의 품에 있었다. 만약 목에 걸어둔 채였다면 더 큰 절망을 맛볼 뻔한 것이었다. 가은은 또 한 번 깊이 깨달았다. 의심에 의심을 거두지 않아야만 이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진리를.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한다. 오직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드디어 산을 넘어오자 일전에 묵었던 그 객잔이 보이기 시작했다. 춥고 배가 고팠으므로 잠깐 쉬었다 가고픈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방금까지 뼈저리게 느낀 바가 무엇인가? 이 손님도 없는 신화정 어귀에 객잔을 차려 놓은 이가 평범한 촌부일 리 없었다.

‘아니다. 괜히 해이해져 있다가 큰 낭패를 볼지 몰라. 그래, 아직은 견딜 만하다.’

그러면서도 못내 아쉬워 객잔 주변을 바로 떠나지는 못했다. 큰 나무 뒤에서 비를 피하면서 그 안을 흘끗흘끗 들여다보았다. 솥에 무언가를 끓이는지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 혼자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는 양이 누구를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만났던 어부가 참 이상했더랬지.’

가은은 그제야 찬영 일행이 어떻게 그곳에 먼저 와서 기다렸는지 알 것 같았다. 그때도 분명 위화감을 느꼈건만, 끝까지 형주를 말리지 않은 것이 패착이었다. 결국, 그때의 경솔한 행동이 위험을 자초한 꼴이었다.

‘아니, 그렇다면 저 객잔 영감은 누군가? 신교 놈들은 워낙 교활하고 변장에 능하니 분명 한패일 것이다. 아! 지금도 나를 낚으려고 기다리는 중이구나. 내가 그리 호락호락할 줄 알고?’

가은은 더 은밀하게 숨을 곳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대로 도망칠 일이 아니라 일이 돌아가는 추이를 지켜보는 게 더 현명하리라 판단했다. 자신의 추측이 맞는다면 이 객잔이 신교 놈들의 거점일 터였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반전시킬 기가 막힌 작전이 떠올랐다.

‘그 여자는 천서국의 자객이 분명하다. 풍림을 처리한 후엔 반드시 나를 잡으러 올 테지. 이대로 뛰어봤자 얼마 못 가 잡히고 만다. 차라리 여기서 기다리다가 여자가 나타나면 유인하여 저 객잔으로 뛰어 들어가자. 내 능력을 발휘하여 양쪽을 이간질해 보는 건 어떨까? 저 안에는 분명 노인 외에도 신교 놈들이 숨어 있을 테니, 싸움이 일어난다면 내 한목숨은 구할지 모른다. 뿐인가? 그놈이 가져간 열쇠까지 찾을지도.’

죽상이던 가은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지어졌다. 생각할수록 묘수가 아닐 수 없었다.

어느덧 비가 그치고 산 너머로 선명한 무지개가 고개를 내밀었다. 축축한 나뭇잎에 싸여 있던 가은 역시 따뜻한 오후 햇살에 잠이 들고 말았다. 고단한 며칠을 보상해 주듯 달콤한 한잠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보지 않았더라면 어쩔 뻔했니? 이놈은 네 잘난 호위들 몇 정도에는 끄떡도 안 할 놈이란다. 호호.”

“그러게요. 역시 언니밖에 없어요.”

도란도란 들려오는 대화에 가은은 화들짝 놀라 단잠을 깼다. 막 고개를 넘어온 그들은 붉은 옷을 입은 여인 둘이었다. 한 명은 당나루의 그녀가 맞았으나 다른 쪽은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옷차림이 화려하여 얼핏 보면 여인 같았으나 유달리 덩치가 크고 선이 굵은 이목구비는 남자가 분명했다. 허연 분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얼굴은 그 자체로도 괴기스러웠다.

‘아뿔싸, 동료가 있었구나. 그럼 오라버니는?’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의 뒤쪽으로 작은 수레 하나가 뒤따르고 있었다. 다리 네 개가 삐쭉 튀어나온 것을 보니 영인과 풍림의 시체가 틀림없었다.

‘저년을 반드시 죽여버리겠다.’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가은의 턱 밑으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두 사람 중 누구의 죽음이 더 슬픈지 모르겠으나 마음속에서 분노와 슬픔이 뒤엉켜 주체할 수 없었다. 계획이고 뭐고 뛰쳐나가 저들 가슴에 비수를 꽂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지, 아니야. 침착해야 한다. 그들이 객잔을 지나치면 나가자. 최대한 자연스럽게, 의심이 들지 않도록!’

동그란 눈을 더욱 크게 뜬 채로 두 사람을 주시했다. 그러나 막상 수레 밖에서 덜렁거리는 다리를 마주하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 탓에 객잔에 다다를 때까지도 밖으로 뛰쳐나올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나가자.’

막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객잔 밖으로 웬 덩치 큰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칠원성군을 만나본 적이 있는 가은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걸음걸이만 보아도 고수가 분명하건만, 신교의 누구도 닮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별 탈 없이 돌아왔구나. 다행이다.”

“사숙, 별걱정을 다 하세요. 봉언니가 와주셔서 수월하게 일을 마무리했답니다.”

“형권아, 보았니? 우리 란이를 지킨 건 다 내 공이다.”

“그래그래, 네 말이 다 맞다. 그런데 란아, 어찌 사숙에게 매번 봉언니라 부르는 게냐? 사부님이 아시면 불호령이 떨어진다.”

실은 물어보지 않아도 답을 알고 있었다. 저 떼쟁이 봉천이 언니라 불러 달라 졸랐겠지. 그러나 혹시나 곡사형이 애꿎은 아란을 혼낼까 봐 걱정이었다.

“금사숙, 제가 좋아서 부르는 거예요. 사부님 앞에서는 주의할 테니 걱정은 마세요.”

“그래, 네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사내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서로를 부르는 호칭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한패이며, 그토록 경계했던 천서국 자객들이 틀림없었다.

자신이 엄청난 착각을 했음을 깨달은 가은은 망연자실하여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렇다면 저들 손에 넘어간 은률과 영인의 시체도 찾기 어려울 터였다. 아니, 자신의 생사도 보장할 수 없으니 그야말로 진퇴유곡(進退維谷)이었다.

‘그림 그 미친놈은 어디로 사라진 거지? 설마 저들에게 잡혔나?’

그렇다면 윤찬영의 행방은 어찌 되었을까? 어차피 혼자서는 이 촘촘한 그물을 벗어나지 못할 듯싶었다. 그럴 바에는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여 적의 약점을 노리는 것도 방법이었다. 가은은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조금씩 객잔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객잔이 온통 나무숲에 둘러싸여 있어 숨을 공간이 많다는 것이었다.

“저놈이 계속 뒤를 따르던 녀석이구나. 실력이 어떠하더냐?”

“황석파의 무공을 익힌 자이더이다. 실력이 출중하였으나 가지고 있는 검이 부실하여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만약 비월검을 사용했거나 사숙이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면 제가 당했을 수도 있겠더군요.”

“흐음, 비월이라.”

곡해고는 턱에 붙은 까슬까슬한 수염을 연신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졌다. 아란의 말로 추측해 본다면 저 삐쩍 마른 황석파의 제자는 풍림 정은률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비월검을 가진 녀석이 정은률의 물건을 뺏었다는 말이었다.

‘설마 저 어린놈이 풍림보다 무공이 뛰어나다고?’

직접 겨뤄보지는 않았으나 정은률의 소문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유일한 제자 아란과 실력이 비등하다면 만만히 볼 인물은 아니었다. 헌데, 그에게서 검을 뺏었다? 어쩐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그나저나 물건은 찾았더냐?”

“죄송합니다. 사부님. 어린 선자 하나가 도망쳤는데 그이가 가졌을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혹 이 앞을 지났을 텐데 못 보셨습니까?”

“흥, 셋 중에 가장 교활하게 생긴 아이를 말하는구나. 아직은 지나가지 않았으니 좀 더 기다려 봐야겠다.”

곡해고의 못마땅한 한숨에 세 사람은 몸 둘 바를 몰랐다. 특히 제자인 아란은 죄책감에 고개도 들지 못했다.

“그런데 사형, 방안에 나뒹구는 저놈들은 누구랍니까?”

무거운 침묵을 깨고 봉천이 물었다. 분위기를 바꾸려는 의도도 있었으나 무엇보다 정체가 너무 궁금하여 보아 넘길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겠다. 다만 인제 보니 그저 운 나쁜 과객은 아닌 모양이구나.”

곡해고는 원래도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여 찬영과 서용을 그냥 놓아줄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일단 물건을 가지고 사라진 선자를 찾아 전후 사정을 파악한 다음 판단할 일이라 생각했다.

“사형, 이제 어찌할까요?”

“치수와 자홍의 연락이 없어 걱정이구나. 형권이 가서 확인해 보아라. 만약 태을신교가 개입되어 있다면 가차 없이 죽여도 좋다.”

“네, 사형.”

형권은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의 곁을 지키느라 이틀 밤을 꼬박 새웠지만 상관없었다. 사형에게 아직 쓰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그럼 저는 어찌합니까? 그 어린 년이 궁금해 죽겠는데 잡으러 가도 될까요?”

“어딨는 줄 알고.”

“온 길을 되돌아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봉천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호들갑을 떨었다.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아란의 이야기만으로도 흥미가 확 당겼다. 못된 성질머리에 얼굴까지 곱다니 꼭 상대해 보고 싶었다.

“아니다. 여기서 기다리자. 일행이 모두 잡혔으니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근처를 떠나지 못할 게 아니냐?”

그러나 아란이 크게 고개를 휘저었다. 평상시라면 사부의 말씀이 백번 옳았겠지만, 이번만큼은 틀릴 것이라 확신했다.

“사부님, 제가 살면서 그 아이처럼 모질고 이기적인 이는 처음 봅니다. 절대로 사형제들을 구하러 나타나지는 않을 겁니다. 되레 자신을 구하기 위한 방패로 쓰면 모를까. 하여 이곳에서 백날 기다려 봤자 소용없어요. 봉사숙을 보내 뒤쫓게 하시지요.”

“흐음, 네가 그렇다면 그러하겠지.”

아란은 고집이 세기는 했지만 사리 분별력이 뛰어나고 생각이 깊었다. 곡해는 현명한 제자의 의견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호호호, 내 그년을 만나면 얼굴 가죽을 벗겨 버려야지. 그래도 되지요?”

“마음대로 하렴. 단, 물건은 찾아와야 한다.”

간드러진 웃음을 남기고는 봉천이 객잔을 나섰다. 허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움직이면서도 보법이 얼마나 대단한지 금세 자취를 감춰 버렸다.

‘큰일이다. 잡히면 죽는다.’

가은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숨을 죽였다. 누구에게라도 잡히는 건 싫었지만 저 끔찍한 몰골의 여장남자에게만은 걸리고 싶지 않았다.

‘이제 어떡하지?’

어느새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자신을 도와줄 오라버니도, 반전을 일으킬 수단도 없으니 이제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 산진수궁(山盡水窮):

산이 다하고 물이 막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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