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47화 (147/209)

147화. 蜘蛛網(지주망)

드디어 몸을 빼낸 은률은 부리나케 가은에게로 달려왔다. 한쪽 손이 꽉 끼어 옴짝달싹 못 하는 모습이 퍽 애처로웠다. 당기고 밀어서 뺄 일이 아니었으므로 온몸으로 바닥을 부수기 시작했다. 다행히 습기 때문에 나무가 약해진 덕에 곧 팔을 빼낼 수 있었다.

“괜찮으냐?”

“네.”

은률이 걱정을 하거나 말거나, 가은은 오직 열쇠를 뺏긴 사실에 속이 상했다. 신교 놈들에게 속은 줄도 모르고 천서국 자객에게까지 쫓기게 되었으니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당장 붉은 옷의 여인과 사라진 열쇠를 두고 다퉈야 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망할 녀석, 잡으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리라.’

반면 은률은 완전히 다른 이유로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아무리 열쇠를 찾으려 했다지만 가은의 가슴 주변을 더듬은 찬영을 용서할 수 없었다. 비월을 훔쳐 간 것만도 원한이 쌓이기 충분한데 사랑하는 여인을 괴롭혔으니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았다.

“오라버니, 일단 이 자리를 피하지요. 여기서 시간을 끌다가 빠져나가지도 못할 거예요. 영락없이 그들의 덫에 걸렸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

자세히 설명할 여유가 없었다. 일단 이 위험천만한 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다짜고짜 은률의 손목을 잡고 초옥의 문을 세차게 열었다. 그러나,

“나랑 볼일은 보고 가야죠.”

어느새 돌아온 아란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조금 헐떡이기는 했지만,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반면 그녀의 뒤에는 정신을 잃은 영인이 세상 애처로운 꼴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천에 돌돌 쌓인 것을 보니 질질 끌고 온 모양이었다.

“그래, 물건은 찾았습니까? 아까 얘기한 대로 두고 가시지요. 아니면 단 한 발자국도 떠나지 못합니다.”

“찾지 못했습니다. 아니, 다른 이들에게 뺏겼어요.”

“하하.”

전혀 먹히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솔직하게 말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란은 가은을 경멸하듯이 노려보며 코웃음을 쳤다. 입만 열면 거짓을 나불대는 꼴이 아주 밉상이었다.

“아아, 그러신가요? 그럼 대신 당신이라도 잡아둬야지요.”

말을 마치자마자 아란의 하얀 손이 가은의 목덜미를 향했다. 단번에 혈을 제압하여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잡아두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가은의 뒤에는 은률이 있었다.

“이 못난 요녀야, 두 번은 안 당한다.”

왼손에서 뿜어져 나온 장력은 상대의 안면을 향해 곧바로 날아갔다. 급하게 출수했기에 고작 일 할의 내력도 담지 않았다. 그래도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에 이대로 맞으면 턱뼈가 부러질 정도의 위력이었다.

“귀찮아졌군.”

아란은 재빨리 몸을 앞으로 숙여 장력을 흘려보냈다. 꼴이 우스워 보이기는 했지만, 덕분에 초옥 안에 아무렇게나 엉켜 있는 자신의 편초가 보였다.

“강지(剛志)”

은률은 자세가 흐트러진 상대의 허점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준비 동작도 없이 검을 내뻗으니 아란은 미처 중심을 잡기도 전에 급하게 반대쪽으로 몸을 꺾어야만 했다. 매 초식이 매섭기 그지없었다. 아까의 설욕을 갚아주려는 그의 의지를 담은 공격이었다. 야리야리한 여인이라 얕잡아 보았을 뿐, 실력으로는 절대로 뒤지지 않았다. 하여, 합이 늘어날수록 무기가 없는 아란이 불리해졌다.

“그래봤자 한낱 조무래기일 뿐.”

자신만만한 태도와 달리 아란의 상황은 퍽 난감했다. 사방에서 찔러 들어오는 검날 때문에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지극히 협소했다. 그녀의 절기, 편초가 있다면 쉽게 빠져나갔겠지만, 고작 단검 하나로는 활로를 뚫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상처 입는 것을 감수하면서 돌진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난감하군.’

결국, 차선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요부를 찔러오는 검날을 피하고자 공중으로 크게 몸을 돌린 아란은 초옥 밖으로 한참 떨어져 나왔다. 바닥에 발이 닿는 동시에 쓰러진 영인에게로 다가가더니 그녀의 몸에 감긴 붉은 천의 끝자락을 잡아챘다.

휘익!

잡은 손을 앞으로 쭉 빼니 붉은 천이 뱀처럼 똬리를 틀며 아란의 소매 속으로 쏙 감겨 들어갔다. 그 탓에 영인의 몸은 데굴데굴 굴러 습지 한가운데까지 밀려 나갔다.

“흥! 멍청하기는.”

은률은 상대의 꼼수를 눈치채고 곧바로 진헌신장을 출수했다. 사방이 트인 곳을 향했기에 아까보다 위력이 몇 배에 달했다. 아란은 어렵게 천을 회수했지만, 상대의 공격을 막을 겨를이 없었다. 영인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되레 위기가 된 셈이었다.

쾅!

아란 역시 무작정 장력을 출수했다. 제대로 내력을 모으지 않은 터라 평소보다 현저히 위력이 떨어졌으나 자신을 덮치는 장력을 일부 튕겨낼 수 있었다. 또한, 몸을 틀어 좌측 어깨로 흘려보내니 은률의 회심의 일격은 견갑골을 스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구나.”

아란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걷혔다. 자신이 크게 다칠 뻔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은률의 공격이 조금만 빗나갔더라면, 혹은 자신이 오직 한 몸을 구하기 위해 이기적인 마음을 먹었다면, 영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었다. 사매를 구하려고 흔쾌히 목숨을 내놓았던 영인의 숭고한 마음을 생각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마음이 바뀌었어요. 악랄한 심보로 여럿 죽이기 전에 내가 당신들 목숨을 거두죠.”

“허세가 하늘을 찌르는구나. 그깟 실력으로 내 손가락 하나 자를 수 있을까?”

방금의 공격으로 자신감이 붙은 은률이 한껏 비아냥거렸다. 그러면서도 가은의 퇴로를 확보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은아, 내 걱정은 말고 떠나라. 그놈들 뒤를 쫓아.”

“오라버니, 몸조심해요.”

인사를 마치기도 전에 붉은 천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다. 꽤 먼 거리를 날아왔는데도 마치 단검처럼 빠르고 섬세한 움직임이었다.

툭, 툭, 툭, 툭.

상대의 허를 찌르는 기습이었으나 검을 상대하기에 천 쪼가리는 너무나 약했다. 은률이 몸을 돌리며 휘둘렀을 뿐인데도 붉은 천이 조각조각 잘려 꽃잎처럼 사방으로 흩날렸다.

“고작 이 정도 실력으로!”

“흥!”

그러나 아란의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은률이 천 조각과 씨름하는 동안 그녀의 몸은 상대의 다리 사이로 빠져나갔다. 천을 버리는 대신, 아직 나무에 감겨 있는 편초를 거두려는 꼼수였다.

“아뿔싸!”

“어디 이것도 한 번 잘라봐라.”

뒤늦게 눈치챈 은률이 서둘러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이미 검은 아가리를 벌린 편초가 그의 허리를 감아 돌고 있었다.

곧 부서질 것 같은 배였으나 십 리도 되지 않는 물길을 건너기에는 충분했다. 서용과 찬영은 게으름을 피울 시간이 없었다. 날이 밝기 전에 산을 넘지 못하면 누구에게라도 잡힐 것이 분명했다.

“벌써 인시(寅時)가 넘어가고 있어.”

서용은 불안한 마음에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 옷의 여인도 무서웠지만 봉씨 사내가 다시 나타날까 봐 걱정이었다. 한 사람도 버거울진대, 두 고수와 맞붙는다면 승산이 없었다.

“걱정하지 마, 정 안되면 맞서 싸워야지, 별수 있나? 혹시 알아? 그동안 내 실력이 대단해져서 그들을 다 때려눕힐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서용은 너스레를 떠는 찬영에게 날 선 핀잔을 주며 계속 발길을 재촉했다. 다행히 산등성이는 높지 않았으므로 두 시진 만에 연향 객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잠시 목이라도 축이고 출발하지. 밤새 걸었더니 배가 고파 뒤질 것 같아.”

“잠시만이야.”

이미 해가 완전히 떠서 바닥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날이 덥기도 더웠지만 오랜 잠복으로 두 사람 모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마침 객잔이 보이니 더는 본능적인 욕구를 견디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 객잔이 어디인가? 이미 주인과 짧은 인연이 있었기에 일견 안심이 되었다.

“아니, 이게 누구요? 덕분에 며칠 장사한 값을 받았으니 오늘은 공짜요.”

주인 영감은 단번에 서용을 알아보고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기다렸다는 듯, 곧 만두를 쪄서 내어 오니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고모에게 보낸 서신은 이미 도착했겠지? 천서국과는 되도록 부딪치지 말라고 했으니 아직은 성공이야.”

“그래도 안심하기는 이르지. 만약 그 여인과 싸워 풍림이 이기기라도 하면 당장 우리 뒤를 쫓아올 걸세.”

“흐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가슴이 먹먹하면서 체증이 느껴졌다. 이리 불안에 떠느니 차라리 빨리 움직이는 게 나을 듯싶었다. 그러나 세상 태평한 찬영은 만두를 게걸스럽게 두 접시나 비우더니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함.”

“지금 하품을 할 때가 아니네. 얼른 일어나세.”

세상 평온하게 입을 쩍 벌리는 찬영을 바라보며 서용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범한 건지, 무지한 건지, 가끔 그의 철없는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앞으로도 이 천둥벌거숭이와 같이 다닐 생각을 하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

초조해진 서용은 찬영을 깨울 심산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허리를 다 펴기도 전에 눈앞이 어질어질하였다. 구역질이 나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차, 찬영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있는 힘을 쥐어짜서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이 기가 막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진작에 잠이 든 것 같았다. 자신이라도 정신줄을 잡기 위해 손톱으로 손등을 무참히 긁어보았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만두다. 만두에 독을 탄 것이다. 헌데, 누구지? 누가…….’

거기까지가 의식의 끝이었다. 끝까지 안간힘을 쓰던 서용은 결국 바닥에 널브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쯧쯧, 제 꾀에 제가 속아 넘어갔구먼.”

두 사내를 내려다보는 주인 영감은 뭐가 그리 안타까운지 혀를 끌끌 찼다. 미약을 먹인 당사자이면서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드는 모양이었다.

“곡사형, 이 두 놈은 왜 잡은 겁니까?”

여태 주방 안에 숨어 있던 사내가 머리를 불쑥 내밀며 물었다. 건장한 체구의 그는 윗옷으로 조끼 하나만을 걸친 채였다. 허리춤에 매단 철퇴는 한 대 맞으면 뼈와 살이 분리될 것처럼 살벌했다.

“저들이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이 일에 방해꾼인 것만은 분명하다. 선운검파의 제자들을 속여 목적지를 알아냈던 것으로 보면 우리와 같은 이유가 아니겠느냐? 게다가,”

영감은 찬영의 등 뒤에 낡은 천으로 둘둘 감아놓은 검을 가리켰다. 아무리 낡고 보잘것없이 보여도 그의 예리한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비월을 들고 다니는 놈을 그냥 보내면 안 되지.”

비실비실 웃는 그의 입술 사이로 삐죽하게 난 덧니가 드러났다. 가뜩이나 못생긴 얼굴이 더 혐오스러워 보였다.

“그럼 이제 어찌합니까? 란이를 지원하러 갈까요? 왔어도 벌써 왔을 아이가 소식이 없으니 걱정됩니다.”

형권은 두 사내를 어깨에 하나씩 들쳐메고는 사형에게 물었다. 그는 평생 스스로 판단한 적이 없었다. 그의 대사형의 명에 따르는 것이 숙명이었다.

“란이의 실력이라면 걱정 없다. 혹시 문제가 생겨도 그 아이를 지키는 호위가 몇이더냐? 우리는 여기 편안히 앉아 도망 나오는 쥐새끼나 잡자꾸나.”

“네, 사형.”

“아아, 오늘은 비가 오려나?”

영감은 쭉 폈던 허리를 다시 구부리더니 지저분해진 탁자 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객잔을 지켜왔던 진짜 주인처럼 위화감이 전혀 없었다. 연신 허리를 두드리는 그는 천서국의 대국사(大國寺)이자 사왕천(四王天)의 다문천왕(多聞天王) 곡해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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