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漁父之利(어부지리)
은률은 약이 바짝 올라 숨까지 헐떡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단매에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나무에 묶인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욕을 퍼붓는 일밖에는.
“흐음, 우리 숙부님이 맡겨 놓은 열쇠도 내놓으셔야지.”
상대가 달아오를수록 더 짓궂게 놀리고 싶었다. 찬영은 부러 가은의 앞 저고리 쪽으로 손을 가져가며 가슴팍을 더듬는 시늉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은률은 목이 쉬어라, 소리를 질렀다.
“이 후레자식아! 네 살점을 잘근잘근 씹어 먹어 버리겠다.”
“에구, 무서워라!”
얼추 보아도 가은의 목에는 열쇠가 없었다. 애초에 뒤져볼 생각도 아니었지만, 괜히 도발해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이미 반쯤 몸이 빠져나온 은률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서야 손을 거둬들였다.
“어부지리(漁父之利)라더니만, 그 말이 딱 맞아떨어지지 뭐요? 덕분에 쉬이 열쇠를 얻었으니 저는 이만 가볼까 싶은데.”
옷깃을 툭툭 털며 일어난 그는 도망치려다 말고 은률을 돌아보았다.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아, 그리고 이제 비월은 포기하시오. 검이 아쉬우면 혼연일체(渾然一體)된 그 나뭇가지나 꺾어 쓰시든지. 큭큭.”
신나게 두 사람을 놀려 먹은 찬영은 어슬렁어슬렁 밖으로 걸어 나왔다. 사실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다. 우연히 형주를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나서는 마음이 바뀌었을 뿐. 아무리 그래도 한 형제이거늘 죽이는 과정에서 그 어떤 연민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먹이를 향한 집착. 가은은 꼭 거미와 같았다. 의리도, 도리도 모르는 그녀가 하도 괘씸하여 더럭 심술이 났다.
‘고모의 부탁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골탕을 먹였을 텐데.’
입맛을 쩝쩝 다시는 그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무려 두어 달을 뒤따르면서 가은의 실체를 속속들이 파악했기에 그만큼 혐오감도 더했다. 이 와중에 머저리같이 속는 정은률과 영인에게는 딱한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세상에 저런 여인만 있다면 자신은 평생 정인을 만들지 않으리라. 찬영에게 있어 가은은 가장 연을 맺고 싶지 않은 인간이었다.
“뭘 그리 꾸물거리나? 이러다 날이 밝겠어.”
“얄미운 것들 약 좀 올리느라 말이야.”
“혐오도 일종의 관심이거늘. 그러다 미운 정이 들겠어.”
“아유, 끔찍한 말 말아라.”
나루터에서 노를 잡고 기다리던 서용이 뭉그적거리는 찬영을 탓했다.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놀려먹는 모습은 영락없는 지기(知己) 같았다. 오랜 기간 함께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은밀한 유대가 생긴 터였다. 일종의 공생관계. 서로의 이익을 위해 상부상조하는 관계라고 보는 게 더 정확했다.
***
용문산에서 멀어질수록 서용의 마음은 무거웠다. 어쩌다 보니 찬영의 도움을 받기는 하였으나 그와는 갈 길이 달랐다.
“이제 어찌할 생각이냐?”
“글쎄.”
막상 질문을 받으니 더 막막해졌다. 천애 고아가 되어 입문한 후 평생 용문산 밖을 나가본 적 없는 그였다. 이제 와 사문을 벗어나 봤자 받아줄 곳도 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너는 어디로 가느냐?”
“혹 따라오려고? 아서라, 너처럼 무공의 武(무) 자도 모르는 놈과 다니다가는 되레 내가 위험해지지.”
손사래를 치는 찬영의 태도가 퍽 얄미웠다. 이래 봬도 오대산검 제자로서 십 년이었다. 몸에 익히지 못했을 뿐이지 무학(武學)으로는 강호에서 따라올 자가 없다고 자부했다.
“우물 안 개구리 같으니라고. 내가 아무렴 사파의 조무래기만 못할까. 웬만한 내공 심결과 검법을 나만큼 꿰고 있는 이도 없을걸.”
“흥, 그래봤자 용문파 무공이 전부 아니냐? 너희 장문 용가현이 그리 난다 긴다 해도 우리 강 숙부만 못하니 창피한 줄 알아라.”
자존심이 상한 서용이 큰소리를 쳐봤지만, 찬영은 비웃기만 했다. 으스대려는 마음에 운선을 숙부라 칭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흥, 그러니 네 세상이 우물 안이라는 것이다. 무릇 오대산검의 무공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무학을 깨우친다는 것은 전체의 이치를 깨닫는 것. 용문파뿐 아니라 오대산검의 모든 무공을 통달하였다. 또한 작고(作故)하신 전 용문파의 장문 묵안 선생님은 려국인이 아니었더냐? 너희 그 대단한 강뭐시기가 자랑하는 태을신공도 거슬러 올라가면 한 뿌리에서 비롯되었을 터.”
정작 서용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무학에 대한 화제가 나오자 신이 났다. 그는 나라, 문파를 떠나 각각의 무공에 대한 숭고함과 위대함에는 편견이 없었다. 선입견을 지우니 용문파의 소요공과 태을신공의 유사한 부분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었다.
“그게 사실이냐?”
“뭐가 말이냐?”
서용의 장황한 설명 끝에 찬영이 물었다. 안광(眼光)을 빛내며 다가오는 모습이 꽤 음흉한 속셈이 있는 듯싶었다.
“오대산검의 내공 심법과 검법을 거의 다 깨우쳤다는 말. 그 얘기는 검보만 있으면 웬만한 심결은 풀어낼 수 있단 말이렷다?”
“뭐, 심결만 안다면 해석은 가능하지. 허나, 내전 무공의 검보를 어찌 쉽게 구하겠느냐?”
찬영은 어리둥절한 서용을 가운데 두고 한 바퀴를 빙 돌았다. 잔뜩 흥분해서는 키득거리는 모습이 살짝 광인(狂人) 같아 보였다.
“이렇게 하자. 나에게 비월검을 완벽하게 해석해주어라. 그럼 그동안에는 너를 지켜주겠다. 서로 이득만 쏙쏙 취하자는 뜻이지.”
“허나, 검보가 없지 않으냐?”
찬영은 품속에서 손바닥만 한 책자를 꺼내 들었다. 설이가 손수 필사한 비월검법과 진헌신장의 심결이 적힌 비급이었다.
“와아.”
책자를 넘겨보는 서용의 동공이 점점 커졌다. 불과 며칠 전이라면 도둑질이라 펄쩍 뛸 테지만 지금은 완전히 사정이 달랐다. 흥분한 쪽은 오히려 서용이었다.
“어디까지나 우리는 협력하는 관계인 것이다. 그 외에는 아무 감정도 없는.”
“내가 바라는 바다.”
손을 마주 잡은 두 사람의 얼굴에 해맑은 미소가 번졌다. 모진 고생을 한 그들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순수한 소년의 모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생각보다 서용과의 동행은 찬영에게 큰 이득이었다. 남을 속일 줄이나 알았지 강호의 예법이나 규칙을 전혀 모르는 찬영은 어디에 가나 사고뭉치였다. 마음 내키는 대로 지껄이고 행동하니 싸움이 날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러다가는 미행은커녕 운선의 은밀한 계획이 다 들통날 지경이었다. 하여, 보다 못한 서용이 나서기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이제는 신교를 도와주는 꼴이 되어버렸다.
‘용아, 용아. 참으로 딱하게 되었구나. 어째서 신교의 끄나풀이 되었느냐?’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그렇다고 동맹을 그만두기에는 비월검의 검보가 너무 탐이 났다. 매일 밤 혼자 무공 심결을 연구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기쁨이었다. 오대산검의 다채로운 무공이 오묘하게 섞이는 부분에서는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뿐인가? 설이가 적어준 다른 문파의 무공 심결 역시 찬영이 아낌없이 보여주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었다.
“너는 어찌 이리 똑똑한데 무공 실력이 그 수준이냐?”
“타고난 몸치라 그러하다.”
말은 늘 퉁명스러웠지만, 찬영은 서용이 점점 마음에 들었다. 쪼잔하고 꽉 막힌 성격이었으나 거짓이 없고 믿음직스러웠다. 하여 이후에 헤어지더라도 자생할 수 있기를 바랐다. 적어도 제 몸을 지킬 수 있는 외공을 가르쳐 보려 몇 번을 시도했다. 그런데 웬걸? 그는 내공만 탄탄할 뿐, 외공은 형편없었다.
“그럼 저들을 어찌 미행한다? 너 때문에 들키면 무슨 면목으로 고모를 만난단 말이냐?”
“흐음.”
정작 들킬 짓을 하고 다니는 찬영에게 핀잔을 들으니 퍽 억울하였지만,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선운산 밑에서 기다린 지 달포 만에 선자 셋이 길을 떠났으나 함부로 미행할 수 없었다. 경공에 꽤 능한 찬영도 미행은 쉽지 않은데, 서용은 해보지 않아도 뻔했다. 무작정 따라가다가 정체를 들킨다면 모든 계획이 허사였다. 이쪽도 대책이 필요했다.
“뒤따르는 것은 불가능하니, 차라리 앞서가자.”
“응? 어떻게 그리한단 말이냐?”
“저 어린 선자는 네 얼굴을 알지?”
“아주 가까이서 마주했으니 알지. 뿐이냐? 약고 못된 여자라 허투루 다가가서는 크게 당한다.”
“흐음, 나에게 기찬 생각이 있다.”
서용의 계획은 이러했다. 그동안 선운검파를 몰래 염탐하며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목적지는 신화정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뒤를 따를 게 아니라 앞서서 가 기다리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다만 열쇠가 숨겨진 최종 장소는 알 수 없으니 그 전에 구체적인 위치를 알아내겠다는 계획이었다.
“그걸 어찌 알아내?”
“자, 날 보면 딱 뭐 하는 사람으로 보이나?”
고개를 갸우뚱하는 찬영의 앞에서 서용이 빙그르르 한 바퀴를 돌았다. 도복을 벗고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모습이 영락없는 서생이었다.
“동네에 흔히 굴러다니는 가난한 서생?”
“그렇지.”
원하는 답을 얻어낸 서용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망설일 것 없이 당장 계획을 실행했다. 먼저 연향에 도착한 그들은 길목에 하나뿐인 객잔에 숨어들었다. 어디에 가나 튀는 찬영을 방안에 꽁꽁 묶어둔 뒤, 서용은 선자들을 속일 변장을 끝마쳤다. 물론 객잔 주인을 매수하여 말을 맞춰두는 일도 잊지 않았다. 꼬박 사흘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선운검파의 제자들이 연향에 모습을 드러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맞다. 아무리 인적이 드물다 해도 신화정은 국경이다. 게다가 그곳은 아예 서이국의 강과 맞닿아 있으니 경계해야 한다.”
“아아, 근방에 거주하는 누구라도 만나면 좋으련만.”
영인은 답답한 마음에 객잔 안을 둘러보았으나 늙은 주인 영감 외에는 사람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마저도 연향에서 평생을 살았다 하니 신화정의 사정은 알 리 만무했다. 하긴 워낙에 이 근방은 위험 지역이었다. 심지어 길목에 있는 연향 부근조차도 사람이 거주하지 않으니 그저 영인의 허튼 바람이었다.
그때였다. 삿갓을 쓰고 도롱이를 입은 웬 사내가 어슬렁어슬렁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딱 보아도 가난한 어부 행색이니 별로 경계심이 들지 않았다.
“아니, 얘야. 비도 안 오는데, 왜 삿갓을 쓰고 도롱이를 둘렀느냐?”
“영감님, 저쪽 산 아래는 며칠째 비랍니다. 요새는 강물이 불어 손님도 없으니 돈벌이가 시원치 않아요.”
한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하는 사내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형주는 무릎을 치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제가 일전에 듣기로 국경을 은밀히 오가는 나루터지기가 있다 합니다. 저 사내가 아닐까요? 이야기를 엿듣자니 산 아래 어쩌고 하는데 여기서 산을 넘으면 신화정이 아닙니까? 참으로 기막힌 우연이지요. 제가 당장 가서 물어보겠습니다.”
“하지만 저 사람이 서이국의 첩자이거나 다른 꿍꿍이가 있는 자라면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형주를 가은이 더럭 붙잡았다. 안 그래도 은밀한 일이건만, 신원이 명확하지 않은 상대에게 떠벌리다가 변수가 생기면 곤란했다. 게다가 우연치고는 너무 딱 들어맞는 상황에 의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은아, 이건 사매 말이 백번 옳다. 연향에 들어서서는 사람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저 객잔 주인이 유일한 현지인이 아니냐? 게다가 저 사내는 걸음걸이로 보나 호흡하는 걸 보나, 무공을 할 줄 모르는 이가 분명하다. 고작 촌부일 뿐이니 경계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이대로 아무 정보 없이 갔다가 헤매느니 물어보는 게 낫겠다.”
영인의 말이 논리적이라 더는 말릴 수 없었다. 가은이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손을 내려놓자 형주가 표독스럽게 덧붙였다.
“모두가 너처럼 의심이 많다면 어디 세상 무서워 살겠느냐?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참으로 갑갑하게 사는구나. 앞으로는 마음 씀씀이를 넓게 가지렴.”
형주는 거침없이 일어나 사내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런 줄도 모르고 삿갓을 쓴 사내는 객잔 주인과 살갑게 대화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한참을 기다리던 형주가 어깨를 툭툭 치고 나서야, 뒤에 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의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그만 바닥에 볼썽사납게 나뒹굴고 말았다.
“아, 선녀님. 무슨 볼일이라도.”
말까지 더듬는 사내의 낯에는 조금도 음흉한 빛이 없었다. 형주는 그나마 있던 작은 의심까지도 스르륵 풀렸다.
“혹 신화정에서 넘어오시는 길입니까?”
“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아니요. 그저 궁금한 게 있어 여쭤보려는 참입니다.”
“뭐든 물어보십시오.”
사내는 검을 든 선자들이 두려웠는지 몸을 잔뜩 움츠린 채로 대답했다. 형주는 신화정의 상황에 대한 것은 물론 당나루의 위치와 초옥에 관한 것까지 상세히 물어보았다. 다행히 사내가 워낙에 지리에 밝고 주변 사정을 잘 아는 덕분에 꽤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영인이 일어나 사내에게 거듭 감사하며 넉넉한 사례비까지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선녀님들.”
허리를 굽신거리는 사내의 얼굴에 아주 잠깐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발걸음도 가볍게 객잔을 나서면서 나지막이 휘파람도 불어 보았다. 원하는 바도 알아내고 돈도 벌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一石二鳥)였다. 이제 그들이 할 일은 먼저 가서 편안히 기다리는 일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