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44화 (144/209)

144화. 井底之蛙(정저지와)

습지에서 뜀박질은 쉽지 않았다. 한 걸음 뗄 때마다 발목이 쑥쑥 박혔다. 가까스로 형주의 시신 앞까지 도달하니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도망쳐야 한다. 잡히면 죽는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지만 가은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붉은 옷의 여인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은률과 비등하거나 그 이상의 고수임이 분명했다. 만약 천서국의 자객이라면 절대로 우호적인 관계가 될 리는 없을 터, 최선을 다해 도망쳐야 했다.

“으억!”

영인이 숨어 있는 갈대숲이 막 보이는 지점에서 무언가가 발목을 거세게 잡아당겼다. 안 그래도 힘이 다 빠진 가은은 하릴없이 주르륵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 탓에 얼굴이 온통 흙투성이가 되고 말았으니 세상 가엾은 몰골이었다.

“이런, 고운 얼굴 다 버리겠네.”

“어어?”

발목에 감긴 붉은 천을 풀어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당기면 당길수록 더 조여들어 뼈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 그 사이 코앞까지 당도한 여인은 그저 가은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정인을 두고 도망치려거든 멀리나 갈 것이지, 무공이 형편없군요. 참 딱하네요.”

“저, 저는 무공을 전혀 못 합니다. 제발 불쌍히 여기어 살려주세요.”

가은은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며 두 손을 마주 잡았다. 같은 여인이니 그리 매정하지 않으리라는 일말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당신의 정인은 목숨을 걸고 지켰는데 그의 생사는 궁금하지도 않습니까? 어찌 그리 의리가 없나요?”

여태 웃음기 가득했던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반달 같은 눈썹을 위로 치켜뜨니 순식간에 인상이 바뀌었다.

‘망했다.’

가은은 그제야 자신의 불쌍한 척하는 연기가 절대로 먹히지 않을 상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되레 성질만 돋우어 놨으니 큰일이었다.

“아무래도 이 꼴을 그냥 넘길 수는 없겠습니다. 살든 죽든 정인과 운명을 같이 하는 거로 하죠.”

“아, 아니에요. 그는 제 정인이 아닙니다.”

뒤늦게 소리를 질렀으나 이미 여인의 결심은 굳어졌다. 발목을 감고 있던 천이 스르륵 풀리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가은의 허리를 꽉 옭아매는 것이었다. 손으로 끊어내려 안간힘을 써봤으나 오히려 숨이 더 막혀왔다.

휘익!

툭!

“은아, 괜찮으냐?”

쇠심줄 같은 천을 끊어낸 이는 다름 아닌 영인이었다. 이쪽으로 오는 인영이 가은이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온 참이었다. 늦지 않게 사매를 구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오호, 이 어여쁜 선자는 누구신가?”

영인의 옷차림을 아래위로 훑어보던 여인은 단박에 그녀의 정체를 눈치챘다. 검 자루에 선명하게 수놓아진 선운검파의 표식 때문이었다. 단 한 초식이었으나 기본기가 탄탄하고 쾌검인 양이, 문파에서도 꽤 인정받는 제자가 틀림없었다.

“형주는 어디 있느냐?”

영인은 여인의 질문에는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우선 사매들의 안위를 살피는 게 먼저였다. 가은이 이리 쫓긴 것을 보니 형주가 혹시 다친 게 아닌가 싶어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오히려 잘 되었다.’

급변한 상황에도 가은의 머리는 재빠르게 굴러갔다. 영인의 개입이야말로 자신에게는 행운이었다. 여인보다는 실력이 부족하지만 도망갈 시간은 벌어줄 터였다. 혹여 그녀가 이 자리에서 죽더라도 사부님께 핑계가 되니, 어느 쪽이어도 좋았다.

“언니, 당나루 초옥에 도착하기도 전에 저 여인이 우리를 급습하였습니다. 무시무시한 채찍을 휘둘러 저는 감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쳤습니다. 형주 사저는 그런 저를 지키려다가 그만…….”

“그럼 설마 그 아이가 죽었단 말이냐?”

영인의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우는 가은의 모습은 한없이 애처로웠다. 눈앞에서 무기력하게 사저의 죽음을 보았으니 얼마나 무서웠을까? 영인의 눈에도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궁금하지 않습니다. 다만, 선운검파의 제자를 죽였으니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군요.”

여인은 공격 태세를 갖춘 영인을 바라보며 크게 헛웃음을 쳤다. 뻔뻔하게 거짓을 고하는 가은보다도 곧이곧대로 믿는 영인의 태도가 더 어이가 없었다.

‘어찌 사람이 저리 어리숙할 수 있단 말인가? 나무에 묶어놓은 사내도 그렇고, 저 아이의 수완이 퍽 대단하구나.’

여인은 상대의 오해를 풀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분노로 이글거리는 영인을 상대할 마음도 없었다. 자신의 실력이 월등히 낫다손 치더라도 상대는 선운검파의 제자였다. 까다로운 그녀와 겨루는 와중에 저 고약한 소녀가 도망갈 것은 자명했다.

“당신과는 싸울 마음이 없으니 비켜서세요. 어차피 십여 합도 버티지 못할 겁니다.”

“그것은 겨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인은 자존심이 상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바로 앵화검의 방어 자세를 갖추는 한편, 사매에게 은밀히 말을 전했다.

“이대로 뛰어가 정대협을 찾아가렴. 최선을 다해 막아보마. 저 여인의 인상착의를 기억했다가 사부님께 꼭 전해야 한다.”

“언니…….”

울먹이는 가은의 얼굴은 마치 어미 잃은 새끼강아지 같았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영인은 부러 미소를 지었다.

“너라도 꼭 살아남아야 한다.”

전후 상황을 알 리 없는 영인은 곧 정은률이 나타나 가은을 도와주리라 짐작했다. 하여 자신이 온 힘을 다해 시간을 벌어줄 생각이었다.

“쯧쯧. 저런 한심한.”

여인의 표정에는 슬슬 짜증이 묻어나왔다. 이도 저도 귀찮으니 아예 둘 다 죽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소(泥沼)”

여인의 붉은 옷자락이 애틋한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오른손으로 영인의 쾌검을 막는 동시에 왼손으로는 가은의 멱살을 잡아챘다. 아예 도망갈 틈을 주지 않으려는 의지가 담긴 공격이었다.

“가라!”

그러나 예상했던 것보다도 영인은 만만치 않은 실력의 소유자였다. 물론 은률에 비한다면 한참 하수이지만 고지식한 초식 덕분에 약점이 없었다. 상대에게 유효한 공격을 가하지는 못했으나 그렇다고 쉬이 떨쳐버리기도 힘들었다. 하여 양손을 나누어 공격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운이 좋군요.”

결국, 여인은 자신의 손에서 발버둥 치는 가은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말았다. 차라리 영인을 빨리 처리하고 다음 목표물을 따라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어차피 이럴 바엔 열쇠를 찾겠다.’

눈치 빠른 가은은 여인의 표정만으로도 다음 수를 알아차렸다. 하여 마음을 바꿔 나루터 쪽으로 다시 냅다 뛰었다. 온몸에 타박상을 입어 이곳저곳 쑤시지 않는 곳이 없었지만,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아뿔싸!’

누구보다 당황한 이는 붉은 옷의 여인이었다. 기껏 도망쳐봐야 마을을 빠져나가지 못하리라 생각했건만, 되레 되돌아가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는 정은률이 남아 있었다. 채찍으로 묶어두었을 뿐, 딱히 다친 구석이 없는 상태였다. 두 명의 고수를 상대하기에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

‘사내를 구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여인의 동작이 변하는 양을 지켜보던 영인은 그 의도를 단박에 깨달았다. 한껏 여유를 부리던 방금과 달리 초식에서 초조함이 느껴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은의 돌발 행동과 연관이 있으리라.

“낙화(洛花)”

마치 떨어지는 꽃잎처럼 검기가 어지럽게 펼쳐졌다. 초식이 너무 빨라 눈에 담지 못할 뿐, 찌르는 곳곳이 모두 요혈이었다. 그 탓에 몸을 빼내려던 여인은 퇴로가 완전히 막히고 말았다.

“분연(紛衍)”

여인은 급한 대로 붉은 천을 채찍처럼 사용했다. 본래 상대를 묶거나 기습할 때 임시방편으로 쓰는 것이나 편초가 없는 지금은 별수 없었다. 날아오는 쾌검을 쫓아가며 요혈을 보호하니 긴 천 자락이 갈기갈기 찢겨버렸다. 영인의 하얀 옷과 여인의 붉은 천이 뒤엉켜 움직이니,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들에게는 목숨을 담보로 한 싸움이었다.

“오라버니!”

문을 버럭 열고 들어서자 나무에 꽁꽁 묶인 은률이 보였다. 얼마나 단단히 묶였는지 벌써 한참을 꿈틀거렸지만, 채찍은 풀릴 기미가 없었다. 이참에 가은이 나타났으니 너무 반가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은아, 이 끝을 찾아 풀어야 한다.”

가은은 한달음에 달려가 나무에 매달렸다. 손이 야무진 덕에 수차례의 시도 끝에 채찍이 헐거워졌다. 완전히 다 풀어내지는 못했으나 웬만한 아이의 몸을 빼내기에는 충분한 틈이 생겼다.

“일단 너는 열쇠를 찾아라. 내 여기서부터는 혼자서 해보마.”

“네 오라버니, 아무래도 나무 사이에 열쇠가 있는 것 같아요. 줄기가 얽히는 시작점에 손을 넣을 테니, 뒤를 봐주세요.”

“걱정하지 마라.”

좁은 틈으로 몸을 비집고 나오면서도 은률의 시선은 문을 향해 있었다. 언제든 다시 여인이 쫓아왔을 때 적절히 대처하기 위함이었다. 아까와 같은 어리석은 실수는 절대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첨벙.

가은은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줄기의 시작점은 뚫고 올라온 바닥의 밑쪽이었다. 강물 위에 지어진 가옥이었기에 손을 담그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라면 보이지도 않는 검은 물속에 손을 넣는 것이 영 꺼림칙했지만, 지금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단 하나, 가은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은 오직 열쇠였다.

“으으.”

끈적끈적한 진흙 사이를 휘젓는 동안 손가락 틈새로 온갖 벌레가 만져졌다. 그러나 정작 찾고 있는 그것은 도무지 걸리지 않았다. 영인이 벌어줄 수 있는 시간에는 한계가 있었다. 초조한 생각이 드니 손이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그때,

“혹시 이걸 찾나?”

바닥에 엎어져 있던 가은의 눈앞에 그 영롱한 빛깔의 구슬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있는 대상은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었다.

“다…, 당신은?”

가은의 동공이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으로 점점 커졌다. 비월을 훔친 주제에 마치 자신의 것인 양 휘두르던 정체불명의 려국인. 윤찬영, 그가 틀림없었다.

‘아니, 이 사람이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설마 이 모든 게 강운선의 덫이었나?’

그 짧은 순간에도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머리가 뒤죽박죽이었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했다. 강운선에게 완전히 속았다는 것.

내내 반대 방향만 보고 있던 은률은 그제야 낯선 이의 등장을 눈치챘다. 고개를 겨우 빼내 그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끌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이 빌어먹을 도둑놈아!”

“아하하.”

그러거나 말거나, 찬영은 미처 팔을 빼내지 못해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엎드린 가은 앞에 쪼그려 앉았다. 수치심으로 새빨개진 그녀의 얼굴을 가리키며 통쾌하게 웃어 젖혔다.

“세상 똑똑한 척은 다 하더니, 이거 원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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