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43화 (143/209)

143화. 花容月態(화용월태)

검은 습지에 여인의 붉은 피가 스며들었다. 그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아서 가은은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저이는 어찌할까?”

참다못한 은률이 손가락을 들어 건너편을 가리켰다. 영인이 몸을 숨긴 갈대숲이었다.

“아니요. 두 사람 다 죽으면 사부님께 면목이 없지요.”

가은은 벌써 눈물을 뚝 그치고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앞의 시체가 영인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둘 중에 고르라면 애정이 덜 쌓인 그녀가 나았지만, 막상 죽이고 나니 생각보다 더 슬펐다. 만약 상대가 달랐더라면 대성통곡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가은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소매로 닦아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헌데, 저곳이 맞을까요?”

“소문주의 말과 서신의 내용이 같았다 하지 않았니? 그렇다면 맞지 않을까?”

은률의 생각에는 동의했지만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당나루, 초옥은 있으나 나무가 없으니 어디를 뒤져야 할지 막막했다.

“일단 초옥에 들어가 보면 단서가 있지 않을까?”

“그러지요.”

혹시나 돌발 상황이 생길지 몰라 이번에는 은률이 앞장을 섰다. 영인과는 한참이나 떨어져 있으니 의심받을 일은 없었다. 뒤따라오는 가은의 가녀린 숨소리를 들으며 은률은 왠지 우쭐해졌다. 그림자 노릇만 하다가 전면에 나서서 그녀를 지켜주게 되니 흡족한 마음이었다.

끼이익.

을씨년스러운 문소리가 들리고, 퀴퀴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부르기에 초옥이지 큰 창고와 다르지 않았다. 마루도 방의 구획이 없이 큰 공간이 하나였다. 보통 나루터 옆이면 나루터지기라도 살았을 법하건만, 살림살이 집기 하나 굴러다니는 게 없었다. 대신,

“설마, 나무라는 게 이거?”

두 사람은 진귀한 광경에 놀라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마주 보았다. 넓은 공간 한가운데에 거대한 두 그루의 노송(老松)이 팔을 뻗치고 서 있었다. 분명 뿌리가 다를진대 서로의 줄기를 감싸 안고 타고 올라간 모습이 장관이었다.

“연리지.”

가은은 순간 목적을 잃어버렸다. 큰 눈을 끔뻑거리며 한없이 나무를 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높이 솟아오른 그 끝을 바라보려니 고개가 절로 젖혀졌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은아? 은아?”

은률이 몇 번을 부른 뒤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화들짝 놀라 스스로 뺨을 세게 때려보았다. 자신도 왜 갑자기 넋을 놓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무 아래 있다 하였습니다. 찾아보지요.”

그러나 뿌리를 찾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바닥을 뚫고 습지에 깊게 내린 터라 위치를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저 검은 물 밑에 손을 집어넣기에는 더럭 겁이 났다.

“이를 어쩐다? 나무 아래, 나무 아래라.”

나무는 찾았으나 나무 아래가 없으니 당황스러웠다. 무작정 이곳에서 죽치고 있다고 방법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일단은 돌아가자. 날이 밝아야 뭐든 보이지 않겠니?”

‘설마 소소정 이 여우가 거짓말을? 아니면 숨겨진 의미가 있는 걸까?’

은률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지금 찾지 못한 것을 언제고 찾을 수 있겠는가? 분명 이유가 있을진대, 감도 오지 않았다.

“뭘 그렇게 찾아요? 내가 도와줄까요?”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텅 빈 집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청각이 몹시 예민한 은률도 눈치채지 못한 침입자였다. 그 이유가 방심해서인지, 상대의 출중한 내력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경계의 대상인 것만은 확실했다.

“누구냐?”

“나? 그건 내가 할 질문인데?”

은률은 소리가 들리는 쪽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면서도 혹시 가은이 다칠까 싶어 그녀를 등 뒤로 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애정이 퍽 깊은가 보오? 참으로 부럽소.”

“저희는 예전에 이곳에 놓고 온 물건이 있어 찾으러 왔을 뿐입니다. 부러 침입한 게 아니니 노여움을 푸세요.”

가은은 한껏 공손한 태도로 상대를 안심시키려 했다. 경계심을 푼 틈에 은률이 나선다면 충분히 상대를 제압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벌써 십수 년간, 이곳은 우리 집이었는데 무슨 소리요? 낭자는 아무리 많이 봐도 열대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는걸요?”

까르르 웃는 태도가 여간 짜증 나지 않았지만 가은은 애써 예의를 지키며 대답했다.

“아주 오래전에 사부님이 두고 가신 것을 찾으러 왔어요. 부디 사정을 봐주시어 찾도록 도와주세요.”

“도와 드리지요. 다만 내 집을 함부로 뒤지게 둘 수는 없지 않겠어요? 물건이 무엇인지 알려주면 대신 찾아볼게요.”

“그건…….”

가은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은밀히 은률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어지간히 꼭꼭 숨은 모양인지 옷자락조차 찾지 못했다. 그때, 나무 아래로 검은 형체가 툭 하고 떨어졌다. 워낙 캄캄하여 정체를 확인하지는 못하였으나 사람인 것만은 확실했다.

쉬익!

은률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단검을 날렸다. 방향이 정확하고 워낙에 쾌검이었으므로 웬만한 고수가 아니고서야 피하기 어려운 일격이었다.

“저런, 참으로 앞뒤가 다른 분들이시군요.”

여인의 볼멘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주변이 낮처럼 환해졌다. 어둠에 익숙했던 두 사람은 순간 눈이 부셔 눈을 뜨기가 어려웠다. 이윽고 빛에 익숙해졌을 때야 비로소 여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누구지?’

가은은 낯선 얼굴에 화들짝 놀랐다. 말투와 태도는 한참 선배 같았는데 막상 마주한 그녀는 기껏해야 약관을 넘었을까 싶을 만큼 젊었다. 또한, 놀랄 정도로 피부가 하얗고 입술이 붉어 한눈에 반할 수밖에 없는 빼어난 미인이었다.

“낭자, 주의를 돌려 공격을 유도한 것은 좋았으나 상대를 보아가며 해야지요. 덕분에 도와줄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답니다.”

은률이 던진 단검은 여인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잡혀 있었다. 말을 하는 도중에도 연신 검을 상하로 흔들며 조롱 섞인 미소를 짓는 양이 퍽 얄미웠다.

‘저 정도 실력을 지닌 자를 내가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서이국의 자객이구나.’

은률은 재빨리 가은의 앞을 막아섰다. 암기를 받아낸 실력만으로 가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과 호각세를 이루리라는 판단이었다.

“이리 서로를 아끼니 하마터면 감동할 뻔하였습니다. 허나, 제가 하릴없이 밖을 내어보다가 끔찍한 장면을 보았지 뭡니까?”

“싸움이 시작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라. 네 사저에게 가!”

은률의 비장한 표정을 본 가은은 금세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지금은 열쇠가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목숨을 구해야 그다음도 있었다.

“저는 말입니다. 의리가 없는 인간이 제일 싫습니다. 기습하여 사형제를 죽이다니, 부끄럽지 않습니까?”

여인은 자신의 이야기에 심취한 듯, 수다를 이어나갔다. 그 사이 은률은 조심스럽게 내력을 끌어올려 공격을 준비했다.

“가!”

은률은 방 가운데의 나무를 끼고 돌며, 반대편 문 쪽으로 가은의 등을 세차게 밀었다. 몸이 가벼운 그녀가 종잇장처럼 펄럭이며 날아가더니 정확하게 문 앞까지 당도했다.

“비월강지(飛越剛志)”

두 그루의 나무가 얽힌 틈은 성인 한 명이 드나들기에 충분했다. 망설이지 않고 몸을 날리니 여인의 지척까지 한달음에 다가갔다. 덕분에 그의 장검은 이미 상대의 명치 끝에 닿아 있었다.

“아주 대단한 실력이군요.”

완전히 찔렀다고 생각했으나 여인은 그곳에 없었다. 목표물을 잃은 은률의 검은 허공을 향해 허우적거렸다. 빠르게 몸을 굴려 중심을 잡지 않았더라면 크게 고꾸라졌을 뻔했다.

“심재(心齋)”

나무 위로 올라간 상대의 인영을 따라 검이 허공을 갈랐다. 파르르 떨리는 검신은 진헌신장의 기운을 담아 푸른 빛을 내뿜었다. 여인의 경공이 신묘하여 몸에 닿지는 못했으나 끝내 장포 끝자락을 한 움큼 잘라내었다.

“과연 비월 검법이로구나.”

여인은 당황하기는커녕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기습 공격을 피하느라 한 명을 놓치기는 했지만 상관없었다. 다시 잡아다 놓으면 그뿐.

“양행”

왼손에서 쏟아지는 장력은 진헌신장이었다. 사백 고유생보다는 못했으나 어릴 적부터 익혀온 터라 기본기가 탄탄했다. 특히 오른손으로 비월검을 사용했을 때에는 그 위력이 배가 되니 감히 강호에 견줄 자가 없었다.

휘익!

그러나 은률의 자신감은 과한 착각이었다. 미처 장력을 출수하기도 전에 여인이 뻗은 발이 손목을 강타했다. 그 탓에 손바닥이 빗나가 나무의 굵은 줄기에 콱 박혀버렸다.

“제기랄.”

그가 몸을 돌려 다음 공격을 준비하기도 전이었다. 이번에는 여인의 소매에서 뻗어 나온 채찍이 은률의 검을 둘둘 휘감았다. 넝쿨처럼 검신을 타고 오르더니 어느덧 손목까지 위협하는 것이었다.

“어림없다.”

은률은 왼손으로 채찍을 내리치는 동시에 몸을 뒤로 크게 젖혔다. 팔이 함께 꺾이며 채찍의 반경을 벗어났다고 안심했을 무렵, 손목이 시큰하게 저렸다. 집요한 그것이 끈질기게 따라가 기어코 손목에 매달렸기 때문이었다. 은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채찍의 끄트머리를 부여잡았다. 이대로 나무 위로 끌려간다면 오른팔이 통째로 뜯겨나갈지 몰랐다.

“아직 젊은데 내력이 이 정도라니. 정말 대단하군요.”

여인은 칭찬인지 조롱인지 모를 말투로 연신 감탄을 했다. 그러면서도 채찍에 내력을 흘려보내 은률의 팔뚝을 단단히 그러쥐었다. 벌써 팔꿈치까지 파고든 채찍 때문에 온 팔의 감각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탐욕스러운 뱀이 먹이를 감아쥔 꼴이었다.

“너, 너는 누구냐?”

사실 상대의 정체가 궁금하지도 않았다. 다만 가은이 도망갈 시간을 벌려고 일부러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대로 팔이 뜯겨나가더라도 가은을 살릴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저 여인도 당신의 애틋한 마음을 안답니까? 뻔히 정인이 위태로울 것을 알면서도 뒤도 안 돌아보고 가는 여인이 뭐가 그리 좋은 겁니까?”

“헛소리 말고 정체를 밝혀라.”

그러나 붉은 옷의 여인은 혀를 끌끌 차며 계속 험담을 이어갔다.

“용모가 아름답다 해도 마음이 곱지 않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참으로 답답하십니다. 하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너무 불공평합니다. 저 낭자를 잡아 와 마음을 확실히 물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뭐?”

오른팔을 당기던 억센 힘이 풀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온몸을 휘감아 들었다. 힘겨루기쯤은 몇 시진이고 가능하다 여겼던 은률이었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여인의 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거대한 악력으로 순식간에 은률을 나무에 꽁꽁 묶어 버린 것이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곧 다시 데려올 테니.”

“아니다. 안돼!”

뭐가 그리 신났는지 여인은 붉은 옷자락을 휘날리며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검은 습지 위를 하늘하늘 날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화려한 모란 꽃잎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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