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暗計(암계)
적우는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투덜거렸다. 설이의 반대가 아니었다면 고유생 그 늙은이의 목을 떼어 버리는 건데, 영 마음이 찜찜했다.
“우리의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일의 진상을 확인할 것, 우리의 생사를 확인시킬 것. 아닙니까?”
“그렇지만 황석파에 복수를 하고 싶었단 말이다.”
설이 역시 적우의 적개심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사형제들을 해하고, 신교를 반 토막 낸 황석파의 원흉을 눈앞에 두었으니 물러서기란 쉽지 않았을 터. 그러나 이 일은 개인의 복수가 아니었다. 숲 전체를 보고 지도에 정해진 길을 따라가야 했다.
“며칠 전, 찬영의 전갈이 왔습니다. 그의 말이 맞는다면 꾸물거릴 시간이 없어요. 우리끼리는 경국의 황실과 오대산검을 이겨낼 힘이 모자라요. 오라버니를 믿고 따라봅시다.”
“알았다. 알았어.”
입술을 툭 내미는 그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그렇다고 애먼 짓을 벌일 작정은 아니었지만 불편한 마음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계획이고 전략이고 다 필요 없었다. 온통 복수만이 그가 다시 살고자 한 이유였다.
“네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게 아니다. 허나, 너 하나 때문에 모두의 꿈이 무너진다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성곤과 사형제들의 죽음을 처음 들었을 때, 적우는 하늘이 무너진 것만 같았다. 행덕을 들고 홀로 용문산으로 되돌아가는 그를 막아선 이는 진건이었다. 창으로 목을 겨누고 선 사형의 얼굴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한 걸음만 더 움직이면 거침없이 베일 것이었다.
‘기다리겠다. 끝까지 참고 기다리겠다. 그러나 반드시 내 손으로 황석파를, 장은을 끝장내고 만다.’
꽉 쥔 적우의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기다림의 끝이 복수라면 참을 수 있었다. 다만 운선에 대한 믿음은 예전만 못했을 뿐이었다.
“신화정에 도착한 것은 달포 전이라 합니다. 정은률이 가은을 철저히 보호하고 있어 접근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아직 열쇠를 찾지 못했지만, 딱히 위험한 일은 없었다고 해요. 다만,”
“다만?”
“곡해고의 사람으로 보이는 이를 만난 듯합니다. 어쩌지요? 예상보다 너무 빠릅니다.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지도 모르겠어요.”
설이는 자신의 예감이 틀리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들이 끼어든다면 가은이 위험해질지도 몰랐으므로.
“그게 진짜라면 이럴 때가 아니다. 나도 가서 은이와 찬영을 구해야 하지 않을까?”
“아직은 기다려보죠.”
적우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천서국의 곡해고. 웬만한 적에게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던 그였다. 그러나 운평에서 만났던 천서국의 두 무사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선명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벌써 알았을까? 그들이 끼어들기를 바라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열쇠를 구한 다음이지 않았니?”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 말고도 천서국이 이 큰 싸움에 참전하기를 바라는 쪽이 있나 봐요. 그게 누굴까요?”
두 사람은 한참 동안 고민해 보았으나 답을 얻어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일단은 계획대로 움직이는 게 최선이었다.
“이다음은 무엇을 해야 하느냐?”
“오라버니의 전갈을 기다려야죠. 분명 찾아낼 겁니다.”
“하아.”
적우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쳤다. 기다림. 운선의 모든 작전은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그것이 득이 될지, 독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성질 급한 그에게는 괴롭기만 했다. 더는 잃을 것이 없는 그였다. 하여, 자신이 언제까지 운선의 신중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일지 스스로 알지 못했다.
선운검파의 제자들은 달포가 넘는 긴 여정에 모두 지쳐 버렸다. 게다가 어딜 가든 감시의 시선이 따라다니니, 너무 불편했다. 특히 성격이 괄괄한 형주로서는 이 상황이 불합리하고 못마땅했다.
“영인 사저, 도대체 풍림 대협은 우리를 돕는 겁니까? 괴롭히는 겁니까? 정말 짜증이 납니다.”
“그래도 저분이 있어 마음이 든든하구나. 우리 셋이 덤벼도 그 하나만 못하니 아군일 때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지.”
영인은 툴툴거리는 형주를 애써 가라앉혔다. 기실 그녀도 불만이 쌓였지만, 사부님의 언질이 있었기에 억지로 참는 중이었다.
“가은이 물건을 찾거든, 반드시 풍림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직접 확인시킨 뒤 열쇠를 빼내렴. 하니, 그와 함께 다니는 게 힘들더라도 의심받지 않도록 잘 대해주어라.”
“하지만 어떻게 따돌립니까? 그는 우리보다 실력이 월등합니다.”
“그것은 가은이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소소정의 당부를 떠올리던 영인은 한층 말수가 적어진 가은을 흘긋 쳐다보았다. 달포 만에 볼이 수척해진 모습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저 어린애가 얼마나 심적 부담이 클까? 우리가 잘 보살펴야 한다.”
자신이 미덥지 못해 가은이 대신 고생하는지도 몰랐다. 게다가 입문한 뒤로 이런저런 시끄러운 일 때문에 제대로 수련한 적도 없으니 본인도 꽤 답답할 것 같았다. 그런 마음이 들수록 더 잘해줘야겠다 다짐해 보았다.
“본인 몸이나 챙기세요. 사저는 우리 선운검파의 얼굴 아닙니까? 아우들 보살피느라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으니 걱정입니다. 가은이야 풍림이 주야장천 지키고 있으니 별일 없겠지요.”
영인의 마음을 눈치챈 형주가 팔을 쿡 찌르며 이죽거렸다. 착하기만 한 그녀의 사저는 사부가 무슨 생각으로 원정대를 꾸렸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자신이 아니라면 저 교활한 가은에게 눈 뜨고 코 베일 성품이었다.
“형주야, 이번 일에 네 역할이 매우 크구나.”
원정대가 출발하기 하루 전이었다. 소소정은 은밀히 형주를 불러 은밀한 계획을 일러주었다.
“일이 다 끝나거든, 반드시 가은을 죽여라.”
“네?”
형주는 깜짝 놀랐으나 그렇다고 명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 일에 투입되었을 때, 자신에게 남다른 역할이 있으리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황석파의 개입 없이 열쇠를 가지려면 풍림 앞에서 빼돌려야 한다. 그러나 그는 만만한 이가 아니다. 최대한 시선을 뺏을 사건이 필요하지. 그게 바로 가은의 죽음이다.”
“풍림 대협이 가은에게 유독 관심을 보인다고 느꼈는데 사실인가 보군요? 그렇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가 정신없는 사이에 물건을 빼돌려 선운산으로 돌아오겠습니다.”
형주의 야무진 태도에 소소정은 아주 흡족하였다. 이런 점이 그녀를 영인과 함께 보내는 이유였다. 절대로 가은을 해칠 리 없는, 아니 오히려 보호하고도 남을 영인이었으므로.
“너희 둘은 선운검파에서 가장 뛰어난 제자이며, 우리의 앞날이다. 하여 너는 장문이 될 영인을 평생 보좌하고 문파를 지켜야 한다.”
“네.”
형주는 다시금 사부의 당부를 되새기며 마음을 다잡았다. 물론 누군가의 목숨을 앗는 일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선운검파를 위한 것이라면, 친자매와 같은 영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칼을 휘두를 수 있었다.
그렇게 달포를 걸려 내려온 목적지는 신화정의 당나루였다. 어째서 사부가 그 멀리까지 와서 숨겨두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은밀한 장소임은 틀림없었다. 천서국과 경국의 국경 지대였으므로 군사들 외, 민간인은 거의 살지 않았다. 게다가 당나루는 국경을 넘어가는 샛길에 있는 나루터였다. 깊숙한 숲길에 인적도 드물었다.
“언니, 우리가 모두 움직이면 위험합니다. 저 혼자 다녀올 테니, 묘시까지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일이 잘못된 것입니다.”
신화정에 도착한 이틀째 밤, 가은은 굳은 표정으로 영인에게 의견을 전했다. 광나루가 아무리 한적한 곳에 있다고 해도 강 하나를 끼고 천서국을 바라보는 위치였다. 혹여 들키기라도 한다면 매우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 있었다. 차라리 여인 혼자라면 이유를 둘러대기에 더 좋을 듯싶었다.
“은아, 그리할 수는 없다. 한 사문의 자매면 친자매와도 같은데 어찌 너만 위험하게 두겠니? 같이 가자꾸나.”
그러나 영인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녀는 어린 사매를 위험한 곳에 몰아넣고 모르쇠 할 만큼 모질지 못했다. 차라리 열쇠를 찾지 못할지언정 목숨을 담보로 행동할 생각은 없었다. 반면 형주는 완전히 다른 이유로 은이의 의견에 반대했다.
“절대로 개인행동은 아니 된다. 모두 함께 움직이되 우리가 망을 보는 게 어떠니?”
“아, 그게 좋겠구나.”
“그럼 그러지요.”
두 사저의 의견을 받아들인 가은은 옅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착한 마음을 먹으려 해도 주변에서 도와주지 않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그 또한 자신의 모진 팔자 때문인가 싶었다.
축시(丑時)를 알리는 타종을 들으며, 세 사람은 은밀히 나루터로 향했다. 숲길을 한참 돌아 들어갈수록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남쪽 지방의 여름은 습하고 덥기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입술까지 시릴 때쯤, 드디어 저 멀리 검은 강물이 출렁이는 나루터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긴가 봅니다.”
“아, 다행이다.”
안 그래도 슬슬 무서워지던 차에 목적지가 보이니, 두 선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다 쓰러져가는 초옥에 발을 들여놓기가 꺼림칙했지만 그건 나중 문제였다.
‘唐津草屋木下(당진초옥목하). 어째서 나무 아래라고 했지?’
가은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눈으로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나루터 옆에는 초옥이 있었으나 어느 쪽을 보아도 나무는 없었다.
“정말 대단하구나. 네가 길잡이를 하여 잘 찾은 것이다.”
그런 가은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인은 사매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형주와 함께 폐가에 진입할 방법을 의논했다.
“은이를 혼자 들여보내는 것은 위험하니, 나와 함께 가겠다. 형주는 뒤에 남아 주변을 살피되, 이각이 넘어도 나올 기미가 없거든 풍림 대협을 찾아라.”
“아니에요. 사저. 제가 은이와 함께 들어가겠어요.”
형주는 자신의 역할을 잘 숙지하고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사부의 명을 수행할 절호의 기회였다. 영인이 함께라면 일을 처리하기 어려우니 되도록 둘이 있을 짬이 필요했다.
“네, 그리하겠습니다. 언니, 형주 사저는 무공 실력이 뛰어나니 저를 잘 지켜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두 사매가 극구 말리니, 영인은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외부에서 훨씬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사매들을 지키는 것이 그녀의 목적이었으므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찾기 어려우면 일단 물러나자. 언제든 다시 기회를 노리면 될 일이니 말이다.”
“네, 사저.”
가은은 몸을 한껏 낮추고 나루터로 향했다. 어스름한 달빛이 비치는 강은 물귀신이라도 나올 것처럼 음산했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형주였다. 이미 예상했지만, 등을 내어주고 있다 보니 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저, 어째서 저를 그리 미워하십니까?”
영인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 가은은 뒤를 돌아보았다. 짐짓 침착한 태도를 보였으나 가슴이 섬뜩했다. 이미 검으로 자신의 심장을 겨누고 있는 사저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잔말 말고 걸어가렴. 이왕이면 나루터 근처가 좋겠구나.”
“아니요. 저는 여기가 좋아요. 죽을 자리 정도는 스스로 정해도 되지 않겠어요? 그러니, 말씀해 주세요. 저 또한 동문인데 어찌 그리 싫으신 거예요?”
가은은 공포심을 꾹 누르고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이유는 듣고 끝내고 싶었다.
“하아, 이런 점이 싫었다. 눈치가 너무 빠르니 귀엽지 않았다. 분명 화가 날 텐데도 미소를 짓는 네가 무섭구나. 뿐이냐? 하늘 같은 대 사저를 감히 언니라 부르는 네 변죽도 꼴 보기 싫단다. 무엇보다,”
형주는 단칼에 죽일 생각으로 검을 짧게 잡았다. 그나마 동문의 예를 다해 고통을 줄여주고 싶었다.
“너니까 싫은 것이다. 애초에 네 존재 자체가 싫었다.” “아아.”
가은의 반달 같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면서도 미소는 잃지 않았다.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상대의 말이 비수처럼 꽂혀 가슴에 피가 철철 나는데도 아프지 않았다.
“사저, 그런데도 저는 당신이 싫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미안해하지는 않을래요.”
“뭐?”
뜬금없는 가은의 말을 이해하기도 전이었다. 형주의 하얀 장포가 가슴부터 붉게 물들어갔다. 표독스러웠던 눈동자가 초점을 잃더니 종이 인형처럼 바닥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형주는 미처 고통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것이 가은이 동문으로서 그녀에게 베푼 최소한의 예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