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41화 (141/209)

141화. 難上之木勿仰(난상지목물앙)

적우는 마치 관전자처럼 두 사람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이쪽저쪽 번갈아 보며 표정을 관찰하는 양이 퍽 즐거워 보였다.

“음, 돼지 양반이 놀라는 꼴을 보니 아는 사이가 분명하구먼. 이보시오. 내가 헷갈려서 그러는데 당신이 용호문 장문 한철이 맞소?”

“…….”

한철은 차마 대답은 못 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무슨 말을 해도 지금은 자신에게 불리했다.

“내 정파의 집안싸움에 낄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지. 한철, 이 멸치같이 생긴 양반이 내 이름을 도용하지 않았나? 이대로 살려 보내주기에는 영 찝찝하구먼.”

“그건 일단 겨뤄봐야 아는 일! 잘난 척을 하려거든 우선 나를 죽인 다음에 해라.”

적우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부터 쉽지 않은 싸움이 되리라는 것은 예상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있었다. 적우는 오직 혼자이지만 그에게는 든든한 형제들이 함께였다.

“오호, 패기가 넘치는걸. 근데 이걸 어쩌나? 멸치 실력으로는 내 옷깃도 스치지 못할 텐데?”

적우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오른팔을 크게 휘둘렀다. 반 토막인 행덕이었지만, 위력은 웬만한 보검의 곱절이 넘었다.

쉭!

한철은 뒤로 크게 물러나며 손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그것을 신호로 초옥을 둘러싸고 있던 이십여 명의 가면인들이 모두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오호! 재밌군.”

적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들의 모습을 쓱 훑어보았다. 종류는 같은 검이었으나 검 자루의 인장이나 검날의 모양이 미묘하게 달랐다. 같은 문파의 제자들이 쓴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보검이었다.

팽팽한 대치 상태에서도 여유롭게 턱을 긁적거리는 적우의 모습에는 긴장감이라고는 없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더니만 뜬금없이 마당 중앙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설이곡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이봐, 돼지! 배신당한 설움을 갚아볼 테냐?”

“뭐라고?”

“혈도를 풀어줄 테니 저놈이랑 싸워보겠냐고?”

뜻밖의 제안이었지만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설이곡이 냉큼 고개를 끄덕이자 적우가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손에 잡힌 왼쪽 어깨부터 시원한 기운이 쭉 퍼져 내려왔다.

“한철, 이 짐승만도 못한 놈!”

발가락 끝까지 마비가 풀리자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사마귀 같은 갈고리 손을 뻗치는 설이곡의 얼굴에는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아침에 믿었던 친우에게서 일가족을 잃고 멸문을 당한 후였다. 그의 성난 울부짖음이 고요한 숲속에 가득 울려 퍼졌다.

“자, 그럼 나는 어느 놈을 골라 볼까나?”

행덕으로 한 사람씩 짚어가며 중얼거리던 적우는 맨 왼쪽, 유난히 안광을 빛내는 이 앞에서 손을 멈췄다. 입술이 서서히 올라가더니 기괴한 소리를 내며 킥킥거렸다.

“찾았다.”

두 발로 땅을 구르니 적우의 몸이 바닥에서 한 자 이상 떠올랐다. 허공을 크게 박차는 걸음 대로 앞으로 나아가자 고작 열 걸음 만에 목표한 상대의 앞까지 도달했다.

“오랜만이네, 늙은이!”

그러나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적우의 움직임을 미리 간파한 그는 이미 방어 태세를 완전히 갖춘 다음이었다. 행덕이 뿜어내는 기운을 피하면서도 보법을 펼쳐 두 발을 어지럽게 움직였다. 그 자리에서 움찔거리는 것처럼 보였으나 기실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 작업이었다.

캉!

둔탁한 격음과 함께, 묵직한 병장기의 충돌 사이에서 작은 불꽃이 튀었다. 행덕의 거대한 몸집이 상대적으로 가늘어 보이는 상대의 검을 덮친 모양새였으나 웬걸,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그리고,

“진헌신장!”

가면인이 칭명하는 순간, 푸른 빛의 검광이 짙게 변하더니 엄청난 기운으로 붙어 있는 행덕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야, 배움에는 끝이 없다더니. 늙은이 그새 늘었어?”

“흥! 건방진 놈. 강구 새끼처럼 명줄은 길구나.”

두 인영이 얽히자 뿌옇게 모래바람이 불었다. 호각지세를 보이던 싸움은 백여 합이 지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양손을 자유자재로 쓰는 가면인의 기세는 점점 올랐으나, 행덕의 공격 반경은 극도로 좁아졌다.

“아무렴, 병신 되기 직전까지 갔던 놈이 고작 반년 만에 회복될 리가 없지.”

가면에 가려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동작이 점점 커지는 양이 퍽 흥분한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모든 초식은 정교하고 빨랐다. 힘만을 앞세운 적우의 도(刀)는 공격을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보였다.

“쯧쯧.”

적우의 필살 공격까지도 완전히 차단한 순간, 가면인은 돌연 손을 둥글게 접어 휘파람을 불었다. 동료를 부르는 그들만의 신호였다.

휘익!

여태 관람하듯,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던 가면인들이 바쁘게 보법을 펼쳤다. 궁지에 몰아넣은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다섯 명씩 네 겹으로 둘러싼 진은 아무리 적우일지라도 쉬이 빠져나가기 어려워 보였다.

“꼴값이군.”

뒤 편에 초옥을 끼고 있어 더는 도망갈 구석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적우의 얼굴에는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곁눈질로 보니, 설이곡과 한철의 개싸움도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네놈이 지금 누굴 걱정하느냐?”

가면인의 예리한 칼끝이 적우의 진중혈을 찌르는 순간이었다.

“설아!”

적우의 외침과 동시에 앵두 열매 크기의 환 수십 개가 초옥 밖으로 흩뿌려졌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그것들은 곧바로 뿌연 연기가 되어 가면인들의 시야를 가렸다.

“독이다!”

자신만만하던 가면인은 칼을 거두는 즉시 뒤로 한 장 정도 물러섰다. 진을 만들었던 그의 무리도 신속하게 후퇴했다.

“어?”

서로 문파가 다른 탓에 전열이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두 개의 인영이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날랜 동작이 마치 들짐승과 같아 가면인들은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어떡합니까?”

“글쎄요.”

이제 연기 속에는 싸움을 끝내지 못한 한철과 설이곡만이 남았다. 가면인들 모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안개가 걷히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이윽고 연기가 한층 묽어졌을 때, 마당에 피떡이 되어 널브러진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쯧쯧, 둘 다 저승길로 갔구먼.”

앞서 적우와 대적했던 가면인이 나서 두 사람의 상태를 살폈다. 가면에 시야가 가렸는지 결국 얼굴을 드러낸 상태였다. 하얀 머리를 바짝 올려 묶은 그는 황석파의 고유생이었다.

“쯧쯧. 한문주의 실력이 좀 더 나았으나 독을 품고 덤빈 설문주를 이겨낼 재간이 없었나 보군. 안타까운 일이야.”

두 사람의 숨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확인한 그는 각각의 품을 뒤져 무언가를 찾아냈다. 유지에 곱게 싸서 숨겨놓은 경전 일부분이었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게로군.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어차피 경전은 오대산검의 것이거늘, 깜냥도 안 되는 작은 문파가 욕심을 내었으니 인과응보이지요.”

“그렇고말고요. 본파에서 두 문파의 일은 잘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나저나 고선배님의 실력에 거듭 감탄하였습니다.”

뒤따라 가면을 벗고 나선 둘은 두타공파의 송암, 정암 장로였다. 적우의 퇴로를 막지 못한 것 때문에 민망하여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일부러 고유생을 치켜세우기도 하고 제자들을 시켜 시신을 정리하는 등, 바지런을 떨었다.

“고선배님, 그런데 우리 다섯의 것을 합쳐도 고작 반밖에 완성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누가 가져갔을까요? 과연 다 찾을 수는 있을까요?”

땀에 전 가면을 벗어던진 이는 선운검파의 장로 해윤이었다. 경전에 대한 욕심 때문에 고유생의 부름에 응하기는 했으나 가면을 쓰고 신교 흉내를 내는 게 영 마뜩잖았다. 게다가 독을 일부 마신 탓에 목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적우가 새삼 원망스러웠다.

“선자님, 그 당시 백의행 대협이 경전을 태우자 했을 때 나선 문파의 장문이 총 열입니다. 그중에 우리가 해결한 이는 겨우 넷이지요. 아예 없는 척 연기한 이들까지 고려한다면 아직도 남은 문파가 십수 개는 족히 될 것입니다.”

여태 나서지 않고 점잔을 빼고 있던 이는 다름 아닌 용문파 장문 용가현의 조카 용봉명이었다. 그는 경전 회수 작전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강호의 질서를 흐리는 설이곡을 단죄하려는 취지였으나 그 방식과 과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각 관할의 열두 문파의 장문을 모아 협조를 구하는 게 낫겠습니다. 경전을 모두 회수하면 설이곡이나 한철과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겠지요.”

봉명의 말에 고유생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리 융통성이 없어 앞으로 용문파를 어떻게 이어받을지 걱정이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겠나? 강운선은 부러 강호의 질서를 어지럽히기 위해 경전을 뿌렸지, 신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 방금까지도 우리는 적우의 생사를 모르지 않았나? 무릇 강운선의 의도에 걸려든 것이 아니면 뭔가? 정파끼리 싸움을 붙이고 신교를 다시 규합하려는 것!”

정암, 송암 장로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들은 고유생의 의견에 누구보다 공감하는 편이었다.

“설이곡은 경전이 탐나 부러 같은 문파끼리 싸움을 붙였네. 실제로 몇몇은 그 거미줄에 걸려들었고. 한철 역시 마찬가지. 우리에게 설이곡의 만행을 고발하는 듯하였지만 결국 자신도 강선방 방주를 해치지 않았는가? 하여 우리는 더 큰 그림을 그려내야 한단 말이야.”

정파 간 다툼이 극에 달하자 고유생을 비롯한 오대산검의 대표들이 나서게 되었다. 일단은 경전 회수가 목적이었지만 또 다른 하나, 숨어 있는 신교의 잔당을 불러낼 목표도 세웠다. 하여, 멸문을 당한 문파나, 죽은 장문의 시신에 적우의 표식을 남겼던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적우가 스스로 실체를 드러냈으니 그야말로 작전의 성공이었다.

“다 된 밥에 재 뿌리기라고, 지금 정파들을 모아 경전을 회수한다면 적우는 또 꼬리를 감출 것이라네. 이대로 강호의 물을 흐리는 문파를 색출하여 벌을 주고 경전을 회수하다 보면 자연스레 신교 놈들도 잡을 수 있지 않겠나?”

얼핏 들으면 고유생의 말은 꽤 논리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놓치고 있었다.

“고대협, 그럼 그 과정에서 무모하게 죽어 나가는 정파 형제들의 목숨은 버리실 작정입니까? 우리의 작전이 아무리 성공한다 해도 당분간 무참한 학살과 비극은 계속될 것입니다. 결과가 아무리 좋은들, 뭐합니까? 피바다 위에 쌓아 올린 모래성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흥분한 봉명은 그동안의 불만을 다 쏟아내었다. 그 역시 설이곡과 한철의 만행에 화가 났고 벌을 주고 싶었다. 문파의 제자를 세작으로 몰아 용문파를 욕보인 그들이 아니었던가? 허나,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고유생이 설이곡의 장남 기영을 때려죽였을 때, 잠깐 놓아버렸던 이성의 끈을 다시 꽉 잡은 것이었다. 너무 늦기는 했지만, 지금이라도 그릇된 방식을 바꾸고 싶었다.

“용형제, 내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건만.”

고유생이 팔짱을 낀 채로 한 걸음씩 다가왔다. 거만한 표정에는 상대를 향한 조롱도 가득 담겨 있었다.

“이 대단한 계획이 내 머릿속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나? 이번 일로 강호의 질서를 수립하고, 무분별하게 설치는 문파를 정리하는 것. 또한, 신교를 몰아내고 오대산검의 위신을 바로 세울 것. 이 모든 것이 위대하신 황제 폐하의 뜻이란 말이네.”

봉명은 그만 아연실색하여 말문이 막혀 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대 황제 폐하의 뜻을 어찌 거스를 수 있겠는가? 감히 의심하고 반하려 한 죄를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 난상지목물앙(難上之木勿仰):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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