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類類相從(유유상종)
병장기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설이곡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나섰다. 왼손에는 보검을, 오른손에는 최소한으로 챙긴 귀중품을 든 채였다.
“설마 여인을 죽이기야 하겠나? 그들의 목표는 오직 나일 테니 자네는 여기 남게.”
울부짖는 아내에게서 아이를 뺏어 안고는 그의 심복 일곱 중 둘에게 당부했다.
“나와 정반대로 움직여라. 목숨 걸고 아이를 지켜라.”
“예, 문주님!”
나머지 다섯을 데리고 설이곡은 동문 밖으로 나섰다. 예상대로 모든 병력을 연무장에 동원한 탓인지 적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자, 너희는 이대로 서쪽으로 간다. 연무장 근처를 빙 둘러 움직이되 되도록 얼굴은 보이지 말아라.”
그중 한 명에게는 자신의 옷과 장신구를 입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혈혈단신이 된 그는 정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대로 금당까지 간다. 두타공파의 관할까지만 가도 살 방도가 있을 것이다.’
두타공파를 고른 이유는 오직 백형진에 대한 신뢰였다. 평소 어진 성품으로 보아 결코 한 문파의 멸문을 모른체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었다.
그러나 설이곡은 뚱뚱한 몸 때문에 금세 지치고 말았다. 게다가 며칠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 체력도 한계에 도달했다. 고작 이십 리도 도망치지 못했는데, 이러다 잡히는 건 시간문제다 싶었다.
‘그래, 변장이 좋겠다.’
장원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객잔까지는 한참이었다. 적당한 민가를 찾아 대충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다 무너져가는 작은 초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사람이나 살까 모르겠네.’
설이곡은 조심조심 사립문을 열어보았다. 오직 폐가만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누구십니까?”
다행히 청아한 목소리가 그를 맞이하였다. 유달리 못생긴 여인이 따사로운 햇살을 등지고 바느질이 한창이었다. 의아한 표정이기는 했으나 그리 놀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 주변에 살면서 어찌 나를 모르는가? 아주 앙큼하긴 하나, 내 매우 급하니 긴말하지 않겠네. 허름한 아무 옷이나 가져와.”
“네? 다짜고짜 남의 집에 들어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립니까? 댁이 누군 줄 알고 옷을 내어준단 말입니까?”
“아니, 이…이!”
마음은 급한데 상대가 단호하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단계만 잘 넘어가면 될 것 같은데 뜻하지 않은 장애물을 만난 셈이었다.
“값을 치를 테니 잔말 말고 갖고 오란 말이야!”
횡포한 태도에도 여인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한층 더 심드렁한 말투로 비아냥댔다.
“얼마나 부자인지 모르겠으나 기본적인 예절도 못 배운 모양입니다. 사정이 딱한 것 같으니 이번만 도와드리지요.”
평소라면 여인의 머리채를 잡아챘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정신도 없었다. 설이곡은 발을 동동 구르며 사립문 밖을 살피는 데 급급했다.
“얼른 주워 입고 떠나십시오.”
한참이 지난 뒤에야 나온 여인은 옷 한 벌을 평상 위에 던졌다. 대충 보아도 누더기였다. 손가락 두 개로 간신히 들어 올린 옷가지는 생각보다 훨씬 처참했다. 때에 전 것도 모자라 쉰 냄새가 확 끼쳐왔다. 입기는커녕 만지기도 싫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따위 걸 어찌 입으라는 거야?”
참다 참다 터진 불만은 그칠 줄 몰랐다. 고래고래 고함을 치다 못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장검을 꺼내 들었다. 이리된 참에 여인을 죽여 화풀이라도 할 참이었다. 그때,
끼이익!
한여름에도 굳게 잠겨 있던 방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곧이어 웬 덩치 큰 사내가 크게 기지개를 켜며 밖으로 나와 앉는 것이 아닌가? 의외의 상황에 당황한 설이곡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이 돼지 멱따는 소리는 누구냐? 낮잠 잘 때는 방해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니?”
“사형, 진짜 내내 퍼 잘 거면 왜 따라온 겁니까? 혼자가 편하니 지금이라도 가버려요.”
여인은 사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모진 말을 쏟아냈다. 그런데도 사내는 서운해하기는커녕 능글맞게 대꾸했다.
“흥, 그랬다가는 이사형이 가만두지 않을 게 뻔하잖으냐? 하여튼 계집애가 성질이 포악해서는.”
“생명의 은인한테 이리 함부로 굴어도 되나요? 나중에 오라버니한테 다 일러줄래요.”
“아이고, 불쌍한 우리 아우님. 저 말전주꾼 왈가닥을 어찌 감당하누?”
“사형!”
검을 빼 들고 위협하는 외부인을 앞에 두고도 두 사람의 말다툼은 끝날 줄을 몰랐다. 처음에는 사뭇 당황했던 설이곡도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기껏해야 힘 꽤나 쓰는 촌부에 불과할 텐데, 검을 든 무인을 깔보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이렇게 된 김에 두 연놈을 죽이고 필요한 물건을 직접 찾는 게 낫겠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언제나처럼 못된 마음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사내 쪽이 덩치가 크니 먼저 제압하는 게 유리할 것 같았다. 설이곡은 기합 소리도 내지 않고 단번에 초옥의 마루 위로 뛰어올랐다.
“죽어라!”
사마귀의 앞발처럼 구부러진 검 끝이 정확히 사내의 정수리를 향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일격이었다. 그래도 강호인이 아닌 만큼 나름의 인정으로 고통 없이 죽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어라?”
“근데 너는 어째서 매번 그 흉측한 인피면구를 쓰는 것이냐? 미인은 아니어도 박색은 아니건만, 저리 자신이 없어서 어찌 시집을 가겠누?”
“흥! 사형은 제발 인피면구라도 쓰시오. 그 못생긴 얼굴을 어쩜 그리 뻔뻔하게 들고 다니시오?”
방금까지 사내의 머리를 겨누던 설이곡의 검은 하릴없이 내리꽂혀 마루에 박혀버렸다. 덕분에 무게중심이 무너진 검의 주인까지도 장지문에 이마를 크게 찧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내와 여인의 설왕설래는 계속되었다. 설이곡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인물들 같았다.
“네 이놈들을 그냥!”
설이곡이 낑낑거리며 뺀 검을 다시 사내에게 내리꽂았다. 아까보다 훨씬 더 빠르고 정확한 일검이었다. 상대의 얼굴에서 딱 반 치 앞에 칼날이 이르렀을 때, 불현듯 사내가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봐, 설돼지! 실력이 부족하면 머리라도 있어야지. 아직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는가?”
“아니, 너…, 너는?”
그제야 설이곡의 눈에 사내의 이목구비가 똑똑히 들어왔다. 짙고 숱이 많은 눈썹, 부리부리한 눈, 크고 시원한 입매까지. 그가 익히 알고 있는 대마두의 얼굴이 분명했다.
“적우!”
“그래, 이 눈치 없는 돼지야! 옷 줄 때 입고 떠나지, 바락바락 나쁜 짓을 하려니 이 사달이 나지. 하여튼 진상도 이런 진상이 없구먼.”
흘러내린 머리를 바짝 올려 묶는 적우 앞에서, 설이곡은 들어 올린 팔을 내리지도 못한 채로 서 있었다. 물론 자의가 아니었다. 팔이 저려 떨어져 나갈 것 같았지만 아무리 내리려고 힘을 주어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멍청하기는. 그냥 검을 놓으면 되잖아?”
설이곡의 검 끝을 야무지게 움켜쥔 적우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찼다. 워낙에 탐욕스러운 인간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머저리라고는 차마 생각지 못했다. 이런 놈을 장문이라고 모시고 있는 신계문의 제자들이 불쌍할 지경이었다.
“내 당장이라도 당신을 죽이고 싶지만, 그 전에 확인해볼 게 있어서 말이지. 얌전히 내 말을 따라주면 지금은 죽이지 않을게. 어때?”
“알았네.”
설이곡은 변덕스러운 상대가 마음을 바꿀까 봐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적우가 혈도를 누르는데도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섣불리 대항하기보다는 기회를 엿보는 것이 낫다.’
적당히 자기 합리화도 하면서, 순순히 마당 한가운데에 인질이 되어주었다. 어쨌든 목숨을 구했다는 안도감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휴, 난 또 욱해서 사형이 사고 칠까 봐 마음 졸였어요.”
“내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어찌 우리 교주님 되실 분의 말을 거역하겠느냐?”
적우는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옴짝달싹 못 하는 인질에게 다가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라. 일이 끝나면 내가 손수 죽여줄 테니.”
설이곡은 서늘한 그의 목소리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여름 태양 빛에 땀을 주룩주룩 쏟으면서도 공포심은 별개인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영 꼴불견이라 설이는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온다. 설이야 준비하자.”
적우의 예민한 귀가 눈보다 먼저 침입자를 알아보았다. 마당에는 오직 설이곡만 남겨 두고 두 사람은 서둘러 몸을 숨겼다. 아니나 다를까, 일각도 지나지 않아 한 무리의 가면을 쓴 이들이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나타났다. 마당에 앉은 설이곡을 당장에 알아보고 신속하게 초옥 주변을 빙 둘러서는 것이었다.
‘뭐지? 같은 편인데 왜 대치하지?’
워낙 거대한 적을 만난 뒤여서인지 오히려 공포심은 훨씬 덜했다. 오히려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해지니, 스멀스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설문주, 오늘로써 신계문은 멸문이오.”
무리의 맨 앞에 선 이가 점잖게 일갈했다. 가면에 새겨진 이목구비가 조롱을 가득 담은 탓에 설이곡의 수치심이 한층 더해졌다.
“누군지 정체를 밝혀라. 이왕 죽는 김에 궁금한 거라도 해결하자꾸나.”
“죽는 주제에 알아서 뭐하겠다는 거냐?”
“이 나쁜 놈들, 천하에 죽일 놈들!”
그는 상대의 욕지거리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오직 한 발, 한 발 전진할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어? 근데 왜 피하지를 않는 것이냐? 혹 누구한테 혈도가 찍힌 것이냐?”
가면을 쓴 이는 그제야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을 알았다. 애써 다가온 거리를 다시금 물러서며 빠르게 방어 자세로 바꾸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거대한 적우의 그림자가 설이곡의 몸뚱이 위로 겹쳐졌다.
“이미 늦었어.”
쉬익!
재빨리 검을 휘둘러 적우의 일격을 막았으나 소용없었다. 아차 싶은 순간, 이미 상대의 도(刀)가 불쑥 다가왔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칼날은 가면을 반으로 갈라내었다.
“허허, 이거 재밌게 됐네.”
미처 가리기도 전에 가면 안에 꼭꼭 숨겨 둔 그의 얼굴이 온 천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땀으로 범벅이 되었지만, 정체를 알아보는 데는 조금도 무리가 없었다. 설이곡은 너무 어이가 없어 눈을 비비고 또 비벼보았다. 아무리 다시 보아도 앞에 선 이의 얼굴은 바뀌지 않았다.
“자…, 자네가 어떻게…….”
말을 더듬다 못해 울먹이기까지 하는 설이곡의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그런 친우를 차마 당당히 볼 수 없어 가면인은 고개를 바닥으로 툭 떨구었다.
신계문의 제자들을 도륙하고, 신교의 적우임을 자처한 자. 오직 설이곡이 지닌 해심밀경소의 필사본 몇 장을 위해 수십 년의 우정을 져버린 자. 그는 용호문의 장문 한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