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盤外八目(반외팔목)
축시(丑時)가 다 되어가는 한밤중인데도 신계문은 한낮처럼 밝았다. 집안의 장명등을 모두 켜 불을 밝히니, 공포심이 한결 누그러지는 것도 같았다.
“한문주는 아직 연락이 없느냐? 제대로 파발을 보낸 게 맞아?”
“이미 엊그제 당도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오지 않을 듯합니다.”
큰아들 기욱의 말에 설이곡은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고작 이 정도 우정이었던가? 절망감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한철, 네 이놈! 내 반드시 살아남아 네놈 목을 비틀어 버릴 테다!”
“상공, 이제 어찌합니까?”
그러나 현실은 끔찍했다. 갓 돌이 지난 어린 아들을 품에 안은 부인이 발을 동동 굴렀다. 무공도 할 줄 모르는 여인들이라도 내보내면 좋으련만, 문밖만 나갔다 하면 시체로 돌아오는 통에 차마 위험을 무릅쓸 수도 없었다.
‘제자들을 다 합치면 백여 명. 나를 비롯하여 내로라하는 고수도 열은 된다. 아무리 미치광이 적우라 해도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설이곡은 애써 긍정적인 예측을 해보았다. 그러나 자꾸 불길한 생각이 불쑥불쑥 솟아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그였다. 신교를 쫓던 추격대가 해산하고 품속에 ‘해심밀경소’ 석 장을 숨기고 돌아왔을 때는 세상을 통째로 얻은 기분이었다.
심지어 달포 뒤에는 태봉 근처에서 태을신교의 잔당 이십여 명을 몰살했다는 승전고까지 들었다. 비록 칠원성군과 교주는 행방이 묘연했으나 고작 멀쩡한 이는 마진건 한 명이니 별로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뿐인가? 절벽에서 떨어졌다는 강운선은 진짜 땅으로 꺼진 것처럼 자취를 감춰버렸다. 하등 마음에 걸리는 일이 없으니 편하게 다음 계획을 세웠던 것이었다.
‘백형진이 불 속에 경전 조각을 버리라 했을 때, 나온 이들은 총 열 명. 그중에 유명 문파는 우리와 한철의 용호문을 포함하여 일곱이었다. 분명 대부분이 버리는 시늉만 했을 터, 작은 문파부터 하나씩 쳐내면 경전을 다시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오직 방해되는 이는 한철이었다. 용호문의 무공이야 신계문과 크게 다를 바 없었지만, 장원의 규모와 제자가 곱절이 넘었다. 아무래도 정당하게 붙었다가는 열세일 게 뻔했다.
‘비겁하더라도 꼼수가 필요하다. 굳이 싸우지 않고 얻으려면 방법은 하나, 반외팔목(盤外八目)!’
설이곡은 처음부터 전면에 나설 생각이 없었다. 한철의 옆에서 훈수나 두면서 제 문파끼리 싸움을 붙일 생각이었다. 그 사이, 몰래 집을 만들면 무조건 판을 흔들 수 있으리라.
처음에는 꽤 흥미로운 흐름이었다. 몰이꾼을 통해 흘린 거짓 정보가 송현장과 강선방의 전면전을 부추겼을 때는 완벽한 작전의 승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의 인물이 등장함에 따라, 판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하루아침에 송현장 전원이 몰살된 소식을 전해 들은 설이곡은 하마터면 심장이 멈출 뻔하였다. 커다란 도에 무참히 잘려 나간 시체, 벽에 남은 피 묻은 글자 ‘雨(우)’. 그 기술과 글씨는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적우만의 서명이었다.
‘지금이라도 그만두어야 한다.’
두타공파 임시 장문 백형진에게 서신을 보낸 것은 강선방의 주요 제자 스물이 당한 다음이었다. 그가 소문으로 퍼뜨린 일곱 개의 문파가 순서대로 표적이 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소문의 근원을 찾을 것은 당연한 일. 그전에 정파를 규합하여 안전을 지켜야 했다.
“출타 중이시라 누구도 뵙지 못했습니다.”
파발이 실망스러운 소식을 가져왔을 때까지만 해도 살아날 길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적어도 황석파 장문의 서신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무릇 결자해지(結者解之)란 말이 있습니다. 적우의 생사는 확인된 바 없고 소문의 진원은 신계문이 분명하니, 황석파는 감히 끼어들기 어렵겠습니다. 부디 원만하게 해결하시길 바랍니다.”
“장은, 이 근본도 없는 천한 놈이!”
서신을 북북 찢으며 울화통을 터뜨리는 설이곡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러면서도 체면이 있어 한철에게는 도움을 청하지 못하였다. 엿새 전 저녁까지만 해도 그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아버지, 큰일 났습니다.”
큰아들 기욱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뛰쳐 들어왔다. 벌써 약관의 나이에 이르렀건만, 경망스러운 면이 늘 못마땅했다.
“조반이 한창이거늘, 여태 무엇하다가 이제야 기어들어 오느냐? 잔소리 말고 자리에 앉아라!”
“아버지,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기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품속에서 하얀 천 쪼가리를 꺼내 들었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저 붉은 글씨로 ‘雨(우)’자가 적혀 있을 뿐이었다.
“어디서 난 거냐?”
“현문 앞에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이 천을 떼어낸 삼사형이 즉사하였습니다.”
“뭐라고?”
설이곡은 후다닥 자리에서 뛰쳐나갔다. 현문 앞에는 그의 셋째 제자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누워 있었다. 가슴에는 세 치 정도 길이의 단도가 박혔는데 정확하게 기문을 꿰뚫었다.
‘고수다. 설마 적우가 진짜로 살아있는가?’
이제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설이곡은 형제의 인연을 맺은 주변 문파에 파발을 보내는 한편, 가장 든든한 아군인 한철에게도 서신을 썼다. 만약 진짜로 적우가 나타난 것이라면 경전이 문제가 아니었다. 멸문이었다.
“당신은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도망치게. 당장 짐을 싸, 당장!”
설이곡은 둘째 부인의 행장에 가보와 금덩이를 꼭꼭 숨겨 넣고 마차를 출발시켰다. 호위는 그의 두 아들이었다. 여의치 않으면 자신의 식솔만이라도 몸을 빼내 살아남을 작정이었다. 목숨만 붙어 있다면 문파는 다시 일으키면 될 일. 그 자금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최선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 이제 어떡합니까? 다 틀렸습니다.”
현문을 나선 지 일각도 지나지 않아 마차가 되돌아왔다. 기욱은 피투성이가 된 아우를 품에 안고 처절하게 울어 젖혔다.
“아아, 이게 무슨 일이냐?”
둘째 아들의 기문에도 같은 모양의 단도가 박혀 있었다. 충격으로 혼절한 아내를 다시 집안으로 들이며 설이곡은 극도의 좌절감을 느꼈다. 이제 남은 일은 평생을 가꿔온 장원 안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꼬박 사흘 밤을 새우고 나흘째 새벽이 되었다. 다행히 더 이상의 암습은 없었지만, 의형제들의 답신도 없었다. 특히 한철에게로 간 파발은 돌아오지도 않았다.
“혹, 겁만 주려던 건 아니었을까요? 벌써 사흘째인데 별일이 없지 않습니까?”
“입방정 떨지 마라. 신교의 교활함을 모르느냐? 끝까지 경계해야 한다.”
말은 그리하였으나 기실 지치기는 설이곡이 가장 심했다. 며칠째 장을 보지 못하니 고기를 먹지 못한 지 사흘이었다. 반들반들했던 피부가 벌써 푸석푸석해졌다.
‘하긴, 신계문이 어디인가? 그래도 경국에서 알아주는 명문정파가 아닌가? 암, 막상 일을 벌이자니 두려운 게지.’
드디어 일이 터진 것은, 지친 그들에게 근거 없는 자신감이 솟아오를 때쯤이었다.
새벽 연습을 나온 제자들이 막 연무장에 들어서는 순간, 두 개의 출입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안개를 뚫고 거무스름한 무언가가 연무장 벽 위로 둥실둥실 떠 올랐다.
“어? 어?”
안 그래도 겁에 질려 있던 그들은 극도의 공포심에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서른 명 남짓의 제자들은 서로 등을 맞대고 둥글게 섰다.
“누, 누구냐?”
기욱은 용기를 내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검은 형체를 향해 일갈하자 어쩐지 별일 아닌 듯싶기도 했다. 그렇다면 장차 신계문의 차기 장문으로서 동기들에게 체면을 세울 기회일지도 몰랐다.
“감히 신계문을 위협하다니, 마교의 잔당은 앞으로 나와라.”
“흐흐흐흐.”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음산한 웃음과 함께 검은 형체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안개가 걷히자 적의 이목구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서, 서…, 설마 태을신교?”
축 처진 눈, 쭉 찢어진 입,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모를 미묘한 표정의 가면이 기욱과 신계문의 제자들을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십수 개의 같은 모양의 얼굴들이 담벼락 위로, 하나둘 떠올랐다.
“태을신교! 태을신교가 나타났다!”
누군가의 외침으로 처참한 살육이 시작되었다. 가면의 무리는 불과 열댓 명이었으나, 연무장을 검게 물들이며 곳곳을 누볐다. 이미 가면을 마주한 순간부터 전의를 잃은 신계문의 제자들은 싸운다기보다 도망에 가까웠다.
“으악!”
“억!”
귀를 파고드는 비명 속에서 기욱은 어차피 자신이 살 가능성은 거의 없음을 깨달았다. 사지가 잘리고, 심장이 꿰뚫리는 동기들의 모습을 보면서 공포에 무감각해졌다. 그의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했다.
‘아버지라도 살려야 한다.’
출입구는 이미 봉쇄되었으니 방법은 벽을 타는 것뿐. 기욱은 가장 한가한 구석을 찾기 위해 사방을 훑었다. 수십이 뒤엉켜 싸우는 현장은 발 디딜 틈도 없었다. 바닥을 구르며, 옆 사람을 밀치며, 최대한 경계선으로 나아갔다. 그때 천운처럼, 쌓인 시신 더미 주변이 잠시 소강상태인 것을 확인했다. 서로를 밟고 올라서려는 두 명의 제자가 차례로 썰려 나간 그곳은 아버지의 처소가 위치한 동쪽이었다.
캉! 캉!
이래 봬도 기욱은 설이곡의 장남이었다. 자질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누구보다 성실한 그는 기본기가 아주 탄탄한 편이었다. 하여 기를 쓰고 움직이니 목표한 그쪽까지는 큰 방해 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사람 수가 줄어들수록 이곳을 벗어날 가능성이 작아진다. 단번에 담을 넘는다.’
방금까지도 함께 떠들던 형제들의 시체를 밟는 일이 영 꺼림칙했으나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기욱은 옆으로 밀고 들어오는 복면인의 검을 피하는 동시에 왼발을 크게 굴렀다. 붕 떠오른 몸을 한 바퀴 굴리자 곧 담벼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어 오른발을 뻗으니 한 장 앞에 널브러져 있는 두 명의 동기가 밟혔다.
“되었다.”
푹!
그러나 기욱의 운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던 가면인이 이미 그가 뛰어오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하극유에 장검이 꽂히는 찰나, 기욱은 몸의 중심을 잃었다. 뒤이어 두 개의 격수혈로 또 다른 복면인의 쌍검이 동시에 꽂혔다. 더는 버티지 못한 그의 몸은 그대로 고꾸라지며 담벼락에 얼굴을 세게 박았다. 코뼈가 부러지고 입술이 뭉개졌는데도 기욱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이미 절명이었다.
“가자!”
한 식경이나 지났을까? 수장 격의 일인이 일갈하자, 검은 가면인들은 일사불란하게 담벼락을 넘었다. 마지막 한 명까지 자취를 감추자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적막만이 남았다. 이제 연무장에는 숨이 붙어 있는 존재라고는 그 무엇도 없었다.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이 온통 피바다였다.
*** 반외팔목(盤外八目):
바둑을 직접 두는 사람보다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이 여덟 집 정도 유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