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自繩自縛(자승자박)
드디어 대나무숲으로 접어든 사내는 벅찬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은 피와 땀으로 범벅이었으나 어디가 아픈 줄도 몰랐다. 오직 가슴에 품은 그것만이 그의 목숨줄이었다.
‘두타산까지만, 제발!’
마지막 순간에도 오직 문파의 재건을 바라던 아버지. 복부에 뚫린 구멍으로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기어이 눈을 감지 못한 그를 떠올리자 가슴이 저릿해 왔다.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장원에서 도망친 지도 꼬박 열흘이었다. 이쯤 되면 아무리 그들이라도 포기하리라. 사내의 얼굴에 옅은 희망의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고작 여기냐? 하긴, 무덤 하나 만들기로는 나쁘지 않구나.”
“헉.”
사내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따라잡힌 이상 목숨을 구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괜히 대들다가 험한 꼴 보지 말고 자결할까? 혹시 모르니 다 내어놓고 차라리 빌어볼까? 어느 쪽이든 비굴하고 처참한 결정이었지만 그나마도 갈등이 들었다.
“다 드리겠습니다. 대신, 이 몸뚱이만 살려주십시오. 어디 산속이라도 들어가 이름 모를 촌부로 살겠습니다. 제발.”
그는 아버지와 달랐다. 사문의 부흥? 명예? 그런 게 무슨 소용이랴? 그저 배곯지 않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삶이면 충분히 행복했다.
“이런, 어쩌지? 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마음이 바뀌었지 뭐람? 네가 여기까지 오는 바람에 짜증이 이만저만 아니거든. 당주님도 네 목이 꼭 필요하다 하셨단다.”
“헉, 제발 살려…….”
그러나 사내는 마지막 애소(哀訴)도 끝내지 못했다. 자신의 머리가 베어진 줄도 모르고 차마 눈을 감지 못한 그의 얼굴은 아버지와 똑 닮아 있었다.
“부당주님, 고생하셨습니다.”
“느려터져서는. 됐고 잘 수습하여라.”
뒤늦게 도착한 수하들이 헐레벌떡 사내의 시체를 처리했다. 이곳은 두타산과 고작 이백 리 떨어져 있어 주의가 필요했다. 원용당의 흔적이라도 남겼다가는 오대산검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될지도 몰랐다.
“이로써 여섯 장이 모였군.”
허윤은 사내의 품속에서 꺼낸 것을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해심밀경소’, 이 대단한 비급을 모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던가? 태을신교와 성곤이 사라진 지금이야말로 강호의 판도를 바꿀 절호의 기회였다.
‘드디어 우리 원용당도 정파 놈들의 텃세에 주눅 들지 않고 무림의 한 축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운선이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반년간, 수많은 정파의 협객들이 비급을 갖기 위해 서로를 음해하고 다투기 바빴다. 종국에는 적우를 빙자한 놈들까지 나타나 죽고 죽이니 그야말로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그러나 원용당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기였다.
“형님, 제가 직접 나서서 비급을 회수하겠습니다. 실력으로 보나 저희 원용당을 당할 문파가 몇 개나 되겠습니까? 기껏해야 용호문 정도 아닙니까?”
“허나 신계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동맹으로 맺어진 그들이 함께 맞서면 아무리 약소한 문파라도 허투루 볼 수 없다.”
당주 허죽의 신중한 태도에 일견 동의하면서도 허윤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신이 나서 목소리를 한층 높였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신계문의 문주 설이곡이 머리를 쓴답시고 비급을 가져간 이들의 명단을 작성하지 않았습니까? 딴에는 자중지란을 일으킬 속셈이었겠지만 덕분에 득을 본 쪽은 우리입니다. 작은 문파끼리 싸울 때, 지척에 있다가 물건만 낚아챈다면 힘도 들이지 않고 고기를 낚는 겁니다.”
“물론 그들끼리 싸울 일도 있겠지. 허나 소문으로 듣자 하니 얼마 전 멸문한 송현장은 적우의 소행이라 하더구나. 신교가 정말로 다시 나타났다면 큰일 아니냐?”
허죽은 여전히 망설여졌다. 아우는 영특하고 무공도 뛰어나지만, 성질이 급한 게 흠이었다. 머리로는 완벽한 계획도 막상 실행하면 변수가 많았다. 좀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할 때라 생각했다.
“형님, 송현장의 식구들을 몰살한 이는 절대로 적우가 아닙니다. 강운선이 비급을 뿌린 이유가 뭐겠습니까? 정파끼리 싸우라 던진 미끼이거늘 스스로 나서 거두어들일 리가 있겠습니까?”
“허면?”
허윤은 누가 들을까 봐 형님에게 바짝 다가섰다. 심증이 아닌 확신이었지만, 감히 입에 담기에는 아무리 그여도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
“설마, 그럴 리가!”
“두고 보십시오. 제가 증명해 보이지요.”
허윤은 자신만만하게 내당을 나왔다. 애초에 허죽의 동의는 필요치 않았다. 더는 세를 확장하고픈 마음이 없는 형님은 이미 여러 해 전에 당주의 권한을 내려놓았다. 원용당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음에도 허락을 받으려 한 이유는 오직 예우였다.
‘원용당을 무시할 수 없게 해주마.’
일부러 설이곡이 낭설을 퍼뜨린 덕분에 비급을 가져간 인물들의 명단을 얻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해당 문파를 추려내니 이십여 개, 그중에 이미 풍비박산이 난 곳이 두 곳, 그리고 건드리기 부담스러운 중급 이상 규모의 문파가 다섯 곳이었다.
‘북쪽부터 훑어 내려온다.’
경국 최남단 운평이 근거지인 그들이기에 시작점은 최북단 고대산 관할지부터였다. 우명당 당주 마륜이라면 한 손으로 겨뤄도 이길 만큼 만만한 상대였다.
“내놓아라. 네 놈 따위가 탐낼 물건이 아니다.”
“허윤, 이 뻔뻔하고 극악한 놈아. 내 평생 남의 것을 탐낸 적이 없거늘, 어째서 더러운 누명을 씌우는 것이냐? 원통하고 분하구나.”
표사들의 시체 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마륜의 모습은 사뭇 당황스러웠다. 심지어 어디를 뒤져도 비급이 나오지 않으니 큰 낭패였다.
‘거짓 정보였던 모양이구나. 뭐, 어쩔 수 없지.’
그러나 허윤에게는 죄책감이 없었다. 단 한 가지 목표에 사로잡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니 그 이후로도 무고한 무림인들이 수십 명 죽어 나갔다.
‘고대산부터 용문산까지 훑었으나 고작 여섯 장. 허나, 두타산이 지키는 동쪽은 감히 깝치지 못하겠구나. 일단 돌아가 전열을 가다듬고 서쪽으로 가야겠다.’
떠났을 때보다 의기양양하여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러나 우명당의 장남을 죽인 그날 밤부터 악몽이 시작되었다.
“부당주님, 덕이가 사라졌습니다.”
“뭐라? 어디서 술이나 푸지게 마시고 있겠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수하로 데려온 열둘 중에 셋이 사라지고 나서야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죽었으면 시체라도 있을 게 아니냐?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이냐? 땅으로 꺼지기라도 했단 말이야?”
매일 밤 몇 명씩 사라지니 엿새째부터는 잠도 잘 수 없었다. 다행히 꼬박 새운 날에는 무사히 넘어가기도 했다.
‘허나, 운평까지 앞으로 보름이 남았다. 이렇게는 이동이 불가하다.’
허윤은 겁에 질린 수하들을 데리고, 부러 사방이 막힌 골짜기로 들어섰다. 고작 여섯 남은 수하들을 빙 둘러 앉혀놓고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자신은 근처에 가장 높은 나무 위로 기어 올라앉았다. 시뻘게진 눈으로 주변을 휘둘러 보니, 시야에 들어오는 건 오직 빽빽한 노송뿐이었다.
‘두고 봐라. 반드시 잡는다.’
인시(寅時)쯤 되었을까? 목덜미를 타고 오르는 스멀스멀한 기운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흘을 꼬박 새운 탓에 자신도 모르게 졸고 있던 것이었다. 허윤은 벌써 턱 밑까지 다다른 거미를 짓이겨 죽이며 나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웬걸? 여섯 명의 수하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뿔싸!”
허윤은 혼비백산하여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들이 거기에 있었다는 흔적은 오직 타다 남은 불씨밖에 없었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나와라! 이 비겁한 놈들아! 이런다고 내가 눈 하나 꿈쩍할 것 같으냐?”
그러나 돌아오는 소리라고는 분에 찬 자신의 목소리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허윤은 혼자서 골짜기를 빠져나왔다. 어이없고 허탈했으나, 그보다 두려움이 컸다. 정체를 알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미지의 적을 상대하기에는 몸도 마음도 지친 터였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본당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형님, 저 왔습니다.”
가까스로 운평에 도착한 그는 부리나케 원용당으로 뛰어갔다. 어딘지 모르게 적막한 장원으로 발을 들여놓았을 때, 허윤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하였다. 늘 아름답게 정돈되어 있던 마당과 대청은 아수라장이었다. 제자들의 처참한 시신이 이리저리 찢기고 베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늘 맑은 물이 흐르던 정원의 개울은 시뻘건 핏물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기가 막혀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멍하니 곳곳을 돌아다니는 그의 몸뚱이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태을신교?”
내당에 들어선 허윤의 눈앞에 익숙한 가면이 나타났다. 아직 갈무리를 끝내지 못한 자객이 사뭇 놀라 한발 물러섰다. 그러나 이미 그의 매정한 검 끝이 허죽의 심장을 막 뚫고 나간 참이었다.
“으아아아악!”
다짜고짜 내지르는 허윤의 일검에는 초식도 없었다. 분노와 공포, 후회와 절망이라는 진득한 감정만이 묻어 있는 일격이었다. 당연히 막강한 상대에게는 위협이 되지 못했다.
“어리석기는.”
가면의 자객은 유연하게 몸을 돌리더니 그대로 일 장을 뻗었다. 뭉글한 기운이 거침없이 허윤의 명치에 내리꽂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들고 있던 검에 비켜 맞아 장풍은 아랫배를 스쳐 지나갔다. 그 탓에 허리가 앞으로 푹 꺾이더니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고작 원용당 주제에.”
자객은 성큼성큼 다가와 허윤의 저고리를 열어젖혔다. 품속에 고이 간직해 둔 비급을 가져가는 적을 보면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저 간절한 눈빛으로 이미 생명을 잃은 허죽의 시체만 바라볼밖에.
“많이도 모았구나. 그럼 이만.”
그는 다시금 오른손에 장력을 모았다. 이번에는 이마를 내리쳐 단박에 목숨을 거둘 작정이었다. 괜히 시간을 끌어봤자 좋을 게 없었다.
“진헌신장!”
“뭐?”
퍽!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허윤의 눈앞에 하얀 도포 자락이 아른거렸다. 은은한 향내, 차분한 목소리. 분명히 자신이 아는 누군가의 자취였다.
“어르신, 그만하십시오.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하얀 옷의 사내가 뽑아 든 검에서 푸른 검기가 뻗어 나왔다. 가늘면서도 예리한 칼날, 휘어지는 듯하다가도 묵직한 소리를 내는 그 검은 누가 보아도 고대산의 보물 하현검이었다.
“흥! 건방진!”
자객은 퍽 곤란한지, 공격을 이어가지 못하고 망설였다. 이 뜬금없이 튀어나온 고대산의 고수를 상대하다가는 자신의 정체가 들킬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하여, 물건을 얻은 것에 만족하고 물러나기로 마음먹었다.
휘익!
하얀 도포의 사내는 사라지는 자객을 쫓지는 않았다. 대신 크게 부상을 입고 넘어져 있는 허윤에게로 다가왔다.
“인과응보, 당신이 마대협에게 저지른 죄의 대가이니 너무 억울해 마십시오.”
“너, 너는…….”
사내는 여전히 뉘우치지 못하는 상대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나서서 구해줬나 후회도 되었다. 과한 오지랖인지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니 병인 양도 싶었다.
“저를 기억하실는지요. 고대산파의 장문, 고인경이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