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37화 (137/209)

137화. 弗畏入畏(불외입외)

한여름 무더위에도 고대봉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올해로 구십 팔 세가 되는 백천은 이번이 그가 겪어낼 마지막 여름이어도 좋다 생각했다. 근래 몇 개월이야말로 그의 생애에서 가장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여덟 살에 입문하여 일평생을 고대산에서 보냈으나 자신이 쓸모 있다고 느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까마득한 후배 매월 신양선이 강호에서 이름을 떨칠 때도 그는 무명 소졸에 불과했다. 덕분에 수년 전, 고대산파가 멸문 문턱에 이르렀을 때도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삶은 죄책감, 그 자체였다.

‘내가 좀 더 적극적으로 매월을 말렸다면 달라졌을까? 아니, 끝까지 함께 싸웠더라면 이리 욕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백천은 목숨을 이어갔다. 고대산파를 재건하려는 욕심까지도 아니었다. 그저 고군분투하는 인경을 지키고 싶었고 저 아이 때문에라도 살아야 한다 다짐했다. 그러나 의지만으로는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았다. 제자들을 양성할 체력과 열정이 부족했고, 망해가는 고대산파를 도와줄 오대산검의 수장들과 친분도 없었다. 그저 쓸모없는 늙은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

“어르신, 부디 저를 받아 주십시오.”

하여, 운선이 자신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도움을 구했을 때는 조롱이라고 생각했다. 강호를 벌벌 떨게 하는 고수가 고대산 기슭에 숨어 사는 늙은이에게 배움을 구하다니, 지나가던 개가 비웃을 일이었다.

“귀파와 신교의 원한을 모르지 않습니다. 저를 미워하셔도, 이해하고 받아 주지 않는다고 해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백천이 멀뚱히 서서 내려다보고만 있자, 운선은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었다. 비록 인경의 도움으로 이곳까지 무사히 도망 왔지만, 허락 없이 머물 생각은 아니었다. 두 번 더 길게 읍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경에게 약속한 것만 전하고 하산할 작정이었다. 두 문파 간에 더 이상의 원한은 없어야 했다.

“아닙니다. 강대협. 이미 우리 사이의 원한은 끝났습니다. 물론 제 동기와 후배의 죽음을 묵인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저 또한 그날의 비극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다만 악연의 시작에 책임이 있고, 천추 이서문이 십 대 항렬 이후의 제자들은 모두 살렸으니 이쯤에서 피의 복수는 마무리 짓고 싶습니다. 게다가 당시 강대협은 오히려 오대산검의 소속이 아니었습니까? 일말의 죄책감도 느낄 이유가 없으니 이곳에서 상처를 치유하십시오. 저는 기쁜 마음으로 대협을 맞이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아니 선배님.”

운선은 백천의 넓은 아량과 배포에 진심으로 감명을 받았다. 그간 만나왔던 정파인들에게 외면만 당해왔기에 그의 환영은 더욱더 값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무공으로는 회자 되지 못할지라도 의협심으로는 오대산검에서 제일이었다.

“선배님, 한 가지 청이 더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운선은 옆에 선 인경을 돌아보았다. 이미 사전에 했던 말이 있었기에 인경은 대답 대신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제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그는 틈틈이 만들어놓은 검보를 꺼내 백천에게 건넸다. 매월검법의 원문. 백천은 떨리는 손으로 책자를 펼쳤다. 백여 년 전 소실되었다던 그것의 완전한 검보를 마주한 그의 눈에 굵은 눈물방울이 맺혔다.

“이것은……. 아아, 내 평생 이걸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우연히 얻은 것입니다. 고대산파, 황석파, 선운검파가 하나의 뿌리라는 사실도 벽서를 보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물론 이 검보는 귀파의 보물이며 저 또한 탐낼 생각이 없습니다. 헌데, 궁금증이 생겨 감히 선배님의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부디 가르침을 주십시오.”

백천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벽서를 얻은 것은 온전히 그의 운이며, 외운 것이야말로 그의 능력이었다. 고대산파에 전하지 않으면 그뿐, 이를 돌려준다니 은인도 이런 은인이 없었다. 보답을 바란다면 목숨이라도 달게 내어줄 판이었다.

“뭐든 말씀하십시오.”

“매월검법의 심결은 너무나 심오하여 미욱한 저는 반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중 제가 이미 깨우친 내용이 있었습니다. 매월검과 수월심검의 심결이 어찌 닮아 있는 것입니까?”

“그게 사실입니까?”

백천은 전혀 예상치 못한 운선의 물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수월심검이라 하면, 려국의 무공일진대, 어째서 경국의 검법과 유사할 수 있단 말인가?

“강대협, 제가 제안을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네, 얼마든지요.”

“상처가 깊어 치료하시려면 반년은 족히 걸릴 것입니다. 그 사이 저와 고장문에게 수월심검을 가르쳐 주십시오. 대신 저는 강대협께 매월 검법의 심결을 풀어드리겠습니다.”

“네?”

화들짝 놀라는 운선과 달리 정작 인경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이 파격적인 제안은 백천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는 무학에 누구보다 진심이었으며 그것이 어느 문파의 것이든 간에 제대로 평가할 줄 알았다.

“각 문파의 내전 무공을 나누는 일이 얼마나 파격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허나, 어차피 매월검법을 완전히 풀어내고 습득할 인물은 현 무림에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꼭꼭 숨겨두고 제자들을 가르친다면 선대의 유산을 땅에 묻어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강대협, 두 검법이 정말로 닮았다면, 서로 상생하는 무공일 가능성이 큽니다. 후대를 위해서, 우리 고대산파의 재건을 위해서 큰 결심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

운선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눈동자만 도로록 굴렸다. 백천의 말은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옳았다. 문파와 국적을 가려 무엇하며, 규율에 얽매이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짓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혼자 결정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강대협. 우리의 인연 또한 이와 같습니다. 문파도 나라도 다르지만 저는 대협의 인품을 존경합니다. 나아가야 할 방향이 반대일지라도 우정은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릇 팔마 마장문님과 신교의 교주가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무학 역시 사람이 만든 것일진대 다르겠습니까? 저는 태사백님의 말씀이 백번 옳다고 생각합니다.”

마세풍의 이름이 나오자 운선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제자를 거두는 데 오직 자질과 인품만 보았다. 자신의 문파에 독이 됨을 알면서도 운선에게 영명권을 전수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수많은 이유가 있었겠으나 그중 가장 큰 것은 무학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아니었을까?

“선배님의 가르침을 받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윽고 결정을 내린 운선은 무릎을 꿇고 백천에게 절을 올렸다. 이에 인경도 그와 나란히 앉아 두 사람에 대한 예를 다했다.

봄은 아름다운 만큼 짧은 계절이었다. 그 사이, 세 사람의 무공은 큰 성취를 보았다. 운선은 매월검의 정수를 깨달았으며, 인경은 드디어 팔 할의 경지에 올랐다. 아버지 고근남이 깨우치지 못한 단계까지 나아갔으니 매월 신양선 이후 최고의 성과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달라진 이는 백천이었다. 그는 드디어 매월검과 수월심검의 뿌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하니,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이로구나.”

금강경의 구절을 읊는 백천의 모습은 그 옛날 신양선과 같았다. 다만 세상을 손에 넣지 못한 회한이 아닌, 진정한 깨달음이었다.

‘空(공). 이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바로 고대산파의 정신이었다. 수월심, 잔잔한 물에 비친 달, 마음의 평정심, 달의 이지러짐과 충만함, 매월이 모두 일맥상통하니 정신의 뿌리가 하나였다.

‘두 무공이 한 뿌리였듯이, 려국과 경국 시작은 하나였구나. 핏줄을 나누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죽고 죽이는 처참한 지옥도는 누가 그린 것인가? 한낱 부처님 손바닥 위에 미물인 것을.’

고대봉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한낱 희구와 같았다. 손을 움찔거리면 뭉개버릴 수도 있는 미물들의 세상. 그리고 지금도 그곳에서는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르는 싸움이 한창이었다.

매월검법의 마지막 심결을 풀어낸 그 날 밤, 백천은 운선과 인경을 고대봉 꼭대기로 불러 앉혔다. 한밤중이었음에도 두 사람의 얼굴에는 은은한 광채가 비쳤다. 마치 열반에 든 보살과 같았다.

“강대협. 지난달 보름 금당 송현장 식솔 백이십 명이 몰살당하였습니다. 신평의 강선방 방주 및 제자 이십, 합천 가야당 당주 노상학 역시 유명을 달리했다고 합니다. 이리될 줄 알고 하신 일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의도했든 아니든, 이제 강호는 당신의 손바닥 위에 있습니다. 만족하십니까?”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던진 것일 뿐.”

백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계략이 아니었기에 더 무서운 선택이었다. 그리고 이제 운선을 떠나보내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강대협.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듯합니다.”

“네. 그래야겠지요.”

백천의 결정이 얼마나 오랜 숙고 끝에 나온 것인지 잘 알았다. 하여 조금도 서운함이 없었다. 되레 먼저 떠나겠다고 말하지 못한 일이 못내 죄송했다.

“사백님, 아직 강대협의 상처가 다 나은 것이 아닙니다. 허니, 더위가 지나고 선선해질 때까지만 기다려주심이 어떠실까요?”

“아닙니다. 충분히 쉬었고 더는 폐를 끼칠 수 없지요. 덕분에 일신의 안녕을 얻었으니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없을 것입니다.”

운선은 만류하는 인경을 막아섰다. 그의 우정에 크게 감명받았으나, 그러므로 더더욱 떠나야 했다.

“부디 강녕하시길 바랍니다.”

크게 절하는 운선을 바라보는 백천의 눈시울이 붉게 부풀어 올랐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몇 달이었다. 그 기억을 주고 가는 상대에게 더 큰 우산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었다.

“사백님, 복수심이 빚이 되었으니 어찌합니까?”

멀어지는 운선의 등을 보며 인경이 나직이 웅얼거렸다. 오랜 지기를 잃어버린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휑했다. 그러나 그런 그 역시 백천의 선택이 옳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온 세상이 한 사람을 쫓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가 한 선택이니 우리가 끼어들 여지가 없구나.”

“그렇지요. 헌데, 사백님.”

백천을 올려다보는 인경의 눈동자가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났다. 이제 완연한 성인이 된 청년의 눈빛은 한층 깊어졌다.

“그는 무엇을 바라고 경전을 찢었을까요? 진정 계략이 아니었을까요?”

“글쎄, 아마도 시험이 아니었을까?”

“시험이요?”

까마득한 제자를 바라보는 백천의 얼굴에 자비로운 미소가 번졌다. 백 살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이만큼 훌륭한 청년을 만난 적이 없던 그였다. 그리고 그 공은 오롯이 강운선에게 있었다.

“그는 우리를 시험한 것이다. 그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미물들에게 자격이 없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인경아, 강운선은 부처가 아니다. 그저 하나의 인간일 뿐이지. 하여 가장 강운선다운 방법으로 복수를 하려는 것이다. 이 세상 누구도 그의 선택을 비난할 자격이 없지 않겠느냐?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꾸나.”

둥실 떠오른 보름달이 고대봉 봉우리 끝에 걸터앉았다. 마치 이 순간이 영원할 것처럼.

*** 불외입외(弗畏入畏):

참다운 두려움을 모른다면 진짜 두려움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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