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一手不退(일수불퇴)
오대산검의 완전한 철수는 그로부터 딱 이틀이 지난 뒤에 이루어졌다. 고된 여정에 지친 추격대 중 누구 하나 결정을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이 좁고 추운 강가장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다만,
“어째서 강운선을 찾지 않습니까? 시체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쥐새끼가 어디선가 또 기어 나오면 어쩌시렵니까? 이참에 숨통을 끊어놓아야 합니다.”
강가장을 떠나는 날 아침까지도 은률이 수십 번을 반발하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장은은 묵묵부답이었다. 이상한 것은 백형진도 마찬가지였다. 스승을 죽였다고 펄펄 뛸 때는 언제고 운선의 생사에는 전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애가 타는 건 오직 자기 자신밖에 없는 듯했다.
“살았다 해도 상관없다. 제아무리 천하제일이 된다 한들,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성곤과 그의 일당이 살아있는데 무슨 답답한 소립니까?”
장은은 새삼 미욱한 아우가 안타까워 혀를 끌끌 찼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나올 답을 구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꼴이 한심하기만 했다.
“아직 모르겠느냐? 성곤은 이미 죽었다. 아니 살았다고 해도 폐인일 것이다. 태을신교를 성곤도 없이 누가 아우를 수 있겠는가? 하물며 이서문도 없거늘.”
칠원성군 중 남은 이는 고작 셋이었다. 둘은 아예 생각할 가치도 없었으며, 그나마 마진건 정도가 감히 오대산검에 대적할 만한 고수였다. 그러나 그 역시 우두머리가 될 인물은 아니었다.
“강운선은 신교를 이끌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왕자에게 인생을 걸 사람이 누가 있을까? 왕실의 핏줄, 그는 정신적 대들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자다.”
안타깝게도 은률은 여전히 사형의 생각에 공감하지 못했다. 어찌 되었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없애버리는 게 맞았다. 게다가 성곤은 자신의 손으로 끝내야 했다. 죽었다면 그 시신을 꺼내서 다시 목을 분질러야 이 응어리가 풀릴 것이었다.
“조급하게 생각 말아라. 태봉으로 가는 길목을 다 막아놓았으니 곧 소식이 있겠지. 잔당을 처리하는 건 두타공파의 소관이다. 그보다 우리에게는 훨씬 중요한 일이 있단다.”
은률은 순간 가슴이 뜨끔하였다. 괜히 눈을 마주쳤다 속내를 들킬까 봐 바닥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리 중한 일이면 반드시 혼자 나설 텐데 우리라는 말을 고른 이유는 뻔했다.
‘또 나를 이용하려 드는구나.’
사형에 대한 신뢰는 이미 깨어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붙어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가은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 잔악무도한 냉혈한에게서 사랑하는 여인을 구해낼 수 있다면 어떤 위험도 감내할 자신이 있었다.
지난밤, 장은에게 맞은 장풍 때문에 만신창이가 된 가은을 보살피며 은률은 남몰래 눈물을 삼켰다. 이 약하고 어여쁜 소녀를 괴롭히는 사형에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 마음을 눈치챘는지 가은의 작고 따뜻한 손이 그의 거친 손을 감싸 안았다.
“오라버니, 저는 오라버니를 우습게 여기는 장문주를 혐오해요. 저까지 죽이려 하는 거, 보셨지요? 이용할 땐 언제고, 쓸모가 없다 느끼면 당장 내치는 심보가 어찌나 고약한지요. 하여 그를 넘어설 거예요. 기어코 큰 사람이 되어서 다시는 오라버니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내가 지켜줄게요.”
은률의 휑하니 텅 빈 마음에는 이제 한 여인이 가득 들어찼다. 핏줄이 터질 것처럼 불끈 솟았던 팔뚝에 스르륵 힘이 풀렸다.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던 맹수는 한 마리 순한 개가 되어 꼬리를 내렸다. 주인을 바꾼 들개는 더 강한 충성심을 약속했더랬다.
“화악산에서 백 리만 가면 옥천으로 빠져나가는 샛길이 있다. 선운검파와 합류하여 소문주의 지시를 따라라. 알다시피 너의 임무는 가은에게서 열쇠를 뺏어오는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한다.”
“네, 사형.”
은률은 행여 속내를 들킬까 봐, 굵고 짧게 대답하고 물러났다. 앞으로 어떤 위험이 닥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자신이 지킬 대상이 누구인지는 명확히 알고 있었다. 사형에 대한 원망도, 성곤에 대한 복수도 지금은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보다 강하지 않았다.
‘그 아이를 마음에 품은들 절대로 네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불쌍한 녀석.’
그러나 정작 장은은 아우의 속마음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가은이 그를 이용하여 뒤통수를 세게 칠 작정인 것도 예상했다. 아마도 그는 실컷 이용만 당하고 버려지겠지. 어쩌면 배은망덕하게도 정인을 구한답시고 자신을 해하려 들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을 함께 두는 이유는 간단했다.
‘일전쌍조(一箭雙鵰), 열쇠도 얻고 귀찮은 아이들도 해결하는 최선의 방책.’
그들이 가는 곳이 어딘가? 바로 천서국과의 국경 지역이었다. 말이 국경이지 사실상 천서국의 영토와 다름없는 곳에서 두 사람이 무사히 빠져나올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 장은에게 그들은 버리는 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므로.
“백의행이 신교도들을 추적하는 동안 우리는 황석산으로 돌아가 다음을 준비하겠습니다. 고사숙, 부상이 심하니 천천히 뒤따라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은률과의 대화를 마친 장은은 수레에 실려 오는 고유생을 살폈다. 운선을 잡아놓으랬더니 정작 엄한 사람과의 싸움으로 다친 꼴이 한심하기만 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미우나 고우나 그에게는 엄연한 사숙이었다.
“이깟 외상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 몸이 지치지만 않았더라도 그깟 계집 따위 단칼에 죽일 수 있었다. 앞으로는 다시 이 일을 언급하지 말아라.”
사실 그는 너무 부끄러워서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다. 명색이 황석파의 일인자라 자부했는데 나이도 한참 어린 주운에게 당했으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그 망할 년이 언제 그렇게 검의 고수가 되었는가? 이제 검선 이무영이라 해도 믿을 만한 실력이었다.’
강운선도 그렇고, 주운도 그렇고 고작 일 년도 채 안 된 사이에 어떻게 그리 큰 성취를 볼 수 있었는지 의문이었다. 려국인들에게는 대단한 무언가가 존재하는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검귀를 살려 보낸다면 이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게 아니냐? 황석산으로 돌아갈 게 아니라 태봉으로 뒤쫓아가야 한다고 본다. 뿐이냐? 여덟 글자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신교의 누구라도 붙잡아 물어봐야 한다.”
고유생은 신교도들의 추적을 오직 두타공파에게 맡긴 일이 영 마음에 걸렸다. 그 역시 검귀의 생존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시신을 확인한 게 아니므로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게다가 내내 백형진이 의심스러웠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은률이라도 그쪽으로 보내자꾸나.”
“사숙.”
여태 잠자코 듣던 장은이 드디어 입을 뗐다. 입술은 웃고 있었으나 눈에는 상대에 대한 경멸의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황석파의 장문은 접니다. 더는 분란을 만들지 마시고, 그만 쉬십시오.”
“너!”
고유생은 아픈 몸을 일으켜 앉아서는 고함을 빽 질렀다. 그러나 장은이 탄 말은 이미 수레에서 한참 멀어진 뒤였다. 후배와 제자들 앞에서 망신살이 뻗친 고유생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새빨개졌다. 까마득한 제자들조차도 소매를 가리고 킥킥대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정말로 황석파 내에서 그가 설 자리는 없었다.
‘내 반드시 먼저 그곳을 찾아내 황석파를 다시 얻으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빠른 쾌유가 먼저였다. 그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수레에 다시 누웠다. 운기조식을 해보니 뼈 마디마디 안 아픈 구석이 없었다.
정파의 사람들이 완전히 빠져나간 뒤에야 서용은 길을 나섰다. 혹시라도 누구를 마주칠까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하산하니, 반나절이면 내려올 거리를 하루가 꼬박 걸렸다. 깜깜한 밤이 되었으나 잠을 청하지도 못했다. 불을 피우는 것도 두려워 담요 한 장으로 초봄의 추위를 견뎠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모습에 한숨이 저절로 났다.
‘이럴 거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어찌 이리 머저리 같으냐?’
마음 같아서는 절세 무공을 익혀, 누명을 씌우고 업신여겼던 이들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아니, 그보다는 모두의 선망을 받는 지위에 올라 누구에게도 무시 받고 싶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세상을 떠돌며 자기처럼 억울한 누명을 쓴 이들을 찾아 구원해주고 싶었다.
“실없는 생각만 늘어놓고 있구나. 이따위 실력으로 뭘 할 수 있겠는가?”
“내 말이 그 말이네.”
어디서 나타났는지 찬영이 킥킥대며 서용의 넋두리를 받았다. 어깨에 땔감을 잔뜩 짊어진 채였다.
“설마 정파 놈들이 쫓아올까 무서워 불도 안 피우는 건 아니겠지?”
“아니, 왜 또?”
서용이 난색을 보이거나 말거나, 찬영은 그 옆에 앉아 땔감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적당히 불길이 잡히자마자, 이번에는 봇짐에서 육포를 꺼내 질겅질겅 씹었다. 얼마나 맛나게 쩝쩝거리는지, 내내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서용도 군침이 돌았다.
“하나 주랴?”
“됐소.”
그래도 자존심이 있는지라, 배고픔 따위에 지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것은 사실이었으나, 어디까지나 불순한 의도가 있어 그랬으리라 추측했다. 하여, 절대로 이 앙큼한 적에게 잔정을 주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것이었다.
“쯧쯧, 하는 짓도 생긴 것과 똑같구나.”
“뭐요?”
“그렇잖은가? 그리 믿던 식구들한테 배신을 당해놓고도 어느 쪽이 적인지, 아군인지 모르는 꼴이 꼭 생긴 것처럼 맹꽁이 같지 않은가?”
“아니, 뭐라고?”
서용은 더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 그래도 우울해 죽겠는데 가시 돋친 말로 마음을 후벼 파니 얄밉기 그지없었다.
“지는 꼭 쥐똥만 한 밤송이처럼 생겨서는! 모자란 놈이 뭘 안다고 잘난 척이냐?”
“킥킥, 이제야 좀 사람답네.”
찬영은 욕을 들어놓고도 뭐가 그리 좋은지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그제야 서용은 자신이 난생처음 누군가를 향해 욕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작 욕이었지만 그에게는 커다란 발전이었다.
“이제 도사도 아닌데 뭘 그리 심각해? 말이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누가 한 말이냐가 더 중요한 거 아닌가? 같은 말이라도 주체에 따라 영향력이 달라지듯이 말이야.”
서용은 영 날라리인 줄 알았던 찬영에게 깊이 감동하였다. 행동이 경박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정작 껍데기에 현혹되어 알맹이를 보지 못한 이는 바로 자신이었다.
“봐, 받아들이고 나면 별 게 아니지? 불을 피우기 전에는 누가 볼까 두렵지만, 막상 불이 붙으니까 따뜻하잖아. 네가 겪은 일도 그런 거야. 겪고 나면 또, 그래 견딜 만한 정도였다.”
서용의 착한 눈동자에 붉은 불꽃이 아른거렸다. 불과 하루 전에 죽을 뻔했던 그였으나, 아주 오랜 과거처럼 느껴졌다. 정작 생각지도 못했던 이의 위로가 이후로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몇 살입니까?”
“나? 올해 열다섯. 근데 그건 왜 물어?”
찬영이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하면서 되물었다. 아닌 척해도 며칠 긴장했던 터라 온몸이 노곤했다. 의미 없는 대화를 멈추고 나니 졸음이 쏟아졌다. 어느덧 편해진 탓인지 경계심도 없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내가 두 살 많으니 이제 형님이라 부르십시오.”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모닥불이 외로운 두 소년을 따뜻하게 지켜주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