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35화 (135/209)

135화. 他生之緣(타생지연)

두 찌질이가 지나가고도 한참 뒤에야 찬영은 지붕 위에서 내려왔다. 원래는 계획대로 하산하여 몸을 숨겼다가 장은의 동선을 따라 움직일 작정이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자꾸 뒷골이 당겨왔다.

‘그 도사 놈이 잡혔나 본데. 구경이나 가볼까?’

엉뚱하게도 위험에 빠진 쪽은 운선이 아니라 일전에 만난 그 도사인 모양이었다. 아무리 적이라지만 잠깐이라도 인연이 닿아서인지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찬영은 융통성 없는 서용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나치게 예의와 격식을 차리는 성격도 보면 볼수록 진상이었다. 하여, 불쌍한 꼴을 구경이나 할 목적이었지 구할 생각은 정말 코딱지만큼도 없었다. 적어도 백형진과의 대화를 듣기 전까지는.

“당신의 하찮은 목숨으로 용문주님의 체면을 지키게 되었으니 대의를 위한 희생이라 여기십시오.”

찬영은 대의를 핑계 삼아 희생을 강요하는 형진의 말에 극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이 세상 그 누구의 목숨도 하찮지 않았다. 감히 사람을 평가질하는 백형진이 역겨웠고, 그 구역질 나는 상황 속에 놓인 서용이 불쌍했다. 하여, 아무도 구하지 말라는 설이의 당부를 무시하고 그를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를 왜 구하는 겁니까? 우리는 적입니다.”

“흐음.”

얼씨구나 좋다 따라나서지는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참으로 당황스러운 질문이었다. 이렇게 한가롭게 앉아 이유를 묻고 답할 때가 아니었다. 인제 보니, 융통성만 없는 게 아니라 머리가 좀 모자란 듯도 하였다.

“그냥 잔말 말고 따라오지? 이래 봬도 목숨 걸고 하는 짓인데?”

“그러니까 말입니다. 왜 나 따위에게 목숨을 거냔 말입니다.”

그제야 찬영은 상대의 눈을 보았다. 눈이 퉁퉁 부었지만 더는 울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굴욕적인 상황에서도 기개를 잃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조금 전까지 이유를 몰랐는데 방금 깨달았어.”

“네?”

“너는 왠지 구더기가 들끓는 수레 안에서도 강구처럼 살아남을 것 같아서.”

“네?”

찬영은 대답 대신 단검을 꺼내 그의 손발을 묶어둔 밧줄을 툭툭 끊어내었다. 오래 묶여 있던 탓에 서용의 손목과 발목이 멍으로 새카맸다. 그 자국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운 줄 알았던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귀에 벌레라도 들어간 것 같아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오랜만에 찾아온 이명과 두통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구해주었다 해서 신교도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지랄, 누가 받아 준다더냐?”

퉁명스럽게 툭 내뱉은 말이 끝이었다. 찬영은 올 때도 그랬던 것처럼 눈 깜짝할 새에 모습을 감췄다. 좁은 토실 안에는 상처투성이인 서용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마치 신기루 같구나.”

서용은 휑하게 비어 있는 토실 안팎을 둘러보았다. 바닥에 쓰러진 사형 외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죽음이라는 게, 서글프고 억울했다.

‘그래, 반드시 산다. 살아서 내 죽음을 확인하지 않은 일을 평생 후회하게 해주겠다.’

턱 밑까지 차오른 눈물을 삼키며 혼절한 동문의 몸뚱이를 넘어섰다. 강호로 내딛는 그의 첫발을, 지붕 위에 앉은 찬영이 지켜보고 있었다.

“타생지연(他生之緣)이라. 소매만 스쳐도 인연이라더니, 우리가 딱 그렇구나.”

소소정이 해쓱한 얼굴로 들어섰을 때, 전각 안은 적막함이 가득했다. 분위기만으로도 상황이 꽤 심각하다는 것을 눈치챌 정도였다. 저 요망한 아이가 또 무슨 짓을 했을지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졌다.

“장문주, 낮 동안 보이지도 않더니 왜 본파의 제자를 데려다 경을 치고 있는 겁니까?”

“글쎄요, 그 이유는 소문주님께서 더 잘 아시지 않겠습니까?”

“설마 저 아이도 그 용문파의 불쌍한 도사에게 했던 것처럼 누명을 씌울 생각입니까? 그렇다면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다만 모두의 앞에서 우리를 깎아내린다면 내 목숨 걸고 귀파를 물고 늘어지겠습니다.”

“하하, 그럴 리가요. 이 앙큼한 계집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고자 모셔온 것을요.”

한동안 두 사람의 섬뜩한 대화가 오고 갔다. 소소정은 조금도 자신의 제자를 살릴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가은은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이편이 나았다. 만약 소소정이 예상외로 자신을 감쌌더라면 마음이 약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사부님, 제가 장문주님께 큰 죄를 지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꼭 전해야 할 일이 있어 힘든 걸음 오시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네가 무슨 해괴한 짓거리를 했다 한들, 온전히 네 책임이다. 하여 내가 감싸지 않았다 원망은 말아라.”

“그럴 리가요. 저는 충분히 오해받을 만하였습니다. 강운선을 만났고 그에게 거짓으로 려국인인 척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대 오대산검의 신념을 거스른 행동이었지요. 인정합니다.”

가은의 장황한 말을 듣다 보니 자연스레 눈살이 찌푸려졌다. 신세 한탄 같기도 하고 자신에 대한 비아냥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소소정의 심기를 건드린 것만은 분명했다.

“려국인 흉내는 일전에 내본 일이 있던 터라 강운선이 홀딱 넘어가더군요. 네, 기억하시죠? 그 덕에 소백화에게 네 글자를 알아냈지요. 활짝 웃으시던 사부님의 표정이 생생합니다. 하여 이번에도 목숨을 걸고 신교를 쫓았습니다. 소녀 신이한 능력이라도 있는지 강가장을 주목하였는데 그것이 딱 들어맞은 게지요. 덕분에 뒤의 네 글자까지도 알아냈습니다. 사부님도 기쁘시지요? 죽기 전에 사부님의 미소를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망할 년.’

소소정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목구멍으로 욕설을 삼켰다. 장은의 앞에서 소백화를 건드린 사실이 까발려졌으니 도저히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늘 웃는 낯이던 장은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맹수의 그것이었다.

“소백화에게 글자를 알아내었다? 그 얘기는 네 스승이 너를 시켜 그녀를 만나게 했단 말이냐?”

“더는 숨겨 무엇하겠습니까? 아까 강운선이 어째서 저를 믿었냐 하셨지요? 네, 제가 려국인임을 증명하는 징표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소백화에게서 얻은 열쇠 말입니다.”

“너……, 너!”

새파래진 소소정의 안색을 보며 가은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 고명만 얹으면 완벽한 한 그릇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영악하다 자부하는 두 사람을 세 치 혀로 좌지우지하는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네, 바로 려국인의 보물이 있는 그곳의 열쇠 말입니다. 그리고, ”

“그리고?”

“그만!”

소소정이 황급히 외쳤으나 이미 그녀의 입을 막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가은은 세상 가련한 얼굴로, 그러나 어느 때보다 또박또박하게 대답했다.

“제가 가진 것 외에도 열쇠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이 있는 곳은 오직 사부님만 아시고요. 네? 제 말이 맞지요?”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장은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한참을 나불거린 가은의 말들이 과연 어디까지 진실인지 가늠할 수 없었으나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소소정의 찡그린 낯이 그 증거였다.

“열쇠를 찾아오면 진짜인지 거짓인지 알게 되겠지. 네 말을 증명하려면 반드시 직접 찾아와야 할 거야.”

“틀림없습니다.”

가은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 깡다구가 기특하여 이번에는 진심으로 믿어주고 싶기도 했다. 그렇다고 단번에 신뢰를 보일 수는 없었다. 이미 연대를 약속했으나 열쇠를 들고 튀어버리면 그뿐. 하여 절대 배신하지 않을 감시를 붙일 생각이었다.

“무공이 변변치 않으니 혼자서는 무리겠지. 아우야, 아주 약은 아이니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봐야 한다. 허튼짓을 하거든, 죽여도 상관없다.”

“그곳이 어딘 줄 알고 직접 보낸단 말입니까? 차라리 무공이 고강한 자들로 조를 꾸리는 게 맞습니다.”

은률의 반대에도 장은은 계획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가 가은을 감쌀수록 더더욱 둘을 묶어 사지로 보내고 싶어졌다.

“절대 그럴 수 없지. 저 아이가 직접 가지 않으면 소문주님께서 장소를 알려주기나 하겠느냐? 또한, 이 중한 일에 선운검파를 제외할 수는 없지 않으냐? 아니 그렇습니까?”

장은은 부러 호탕하게 웃으며 이번에는 소소정을 조롱했다. 어린 제자를 보내 현진을 살해하려던 것도 모자라 열쇠의 존재를 감쪽같이 속였다. 동맹, 규합 따위로 신뢰를 가장했던 그동안의 행동이 괘씸하기만 했다. 그나마 이제라도 밝혀졌으니 다행이었다. 교활한 여우가 제가 놓은 덫에 걸린 셈이었다.

“모두 제 불찰이니 겸허히 모욕을 감내하겠습니다. 네, 선운검파가 중심이 되어 열쇠를 회수하러 가겠습니다. 다만 제자 아이와 독대를 해도 되겠습니까? 워낙 위험한 곳이니 당부할 말이 있습니다.”

굳이 방해할 이유는 없었다. 아무리 영악한 아이라지만, 선운검파의 장문 자리를 놓고 거래를 한 만큼 가은이 자신을 배신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두 사람만 남겨 두고 퇴장하는 발걸음이 가볍기만 했다. 금황자와 약속한 기일보다 훨씬 빨리 성과를 얻을 것 같았다. 심지어 생각지도 못한 열쇠의 존재까지 알아냈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많이 다쳤느냐?”

소소정의 높낮이 없는 억양은 건조하고 매정했다. 제자의 돌발 행동에 화가 났을 텐데도 침착하기만 했다. 도통 감정을 읽기 어려웠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하아, 네가 장문주를 끌어들일 줄은 몰랐다. 나를 해하기 위함이냐?”

“그럴 리가요. 소녀는 그저 비천한 목숨 구할 생각이었습니다. 열쇠에 대한 일을 털어놓은 이유는 강운선을 마주했을 때 이미 비밀을 들켰기 때문입니다. 추호도 다른 마음을 먹은 적이 없습니다.”

가은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눈물로 호소했다. 어차피 장은의 비호를 받는 한, 소소정이 자신을 쉬이 죽이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차선책이 필요한 법. 그와의 거래만 믿고 움직이다가 낭패를 볼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소정과의 관계에도 여지를 남겨 두어야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었을 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강운선을 속여 열쇠 네 개를 가졌습니다. 또한, 여덟 글자를 모두 알아내었으니 수수께끼를 풀어내면 장소를 찾을 수 있습니다.”

두 사람만의 공간이었지만 가은은 스승의 귀에 바짝 다가갔다. 나머지 네 개의 글자를 알려주자 소정의 굳은 얼굴이 조금 풀어지는 듯도 하였다.

“흐음. 이제 열쇠만 구하면 되겠구나.”

“네, 그렇습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가은이 자신을 팔아 장은에게 목숨을 구걸한 것은 괘씸했다. 덕분에 장문으로서의 체면을 구겼으니 마음 같아서는 단매에 때려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소소정은 그리 무모하고 멍청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선배 둘을 붙여줄 테니 열쇠는 네가 직접 찾아와야 할 것이다.”

“네, 반드시 찾아오겠습니다.”

“어차피 하나라도 없으면 나머지는 무용지물. 강운선이 너의 존재를 아니, 나머지 두 개는 굳이 찾아다니지 않아도 그가 직접 찾아오겠지. 하여, 열쇠를 찾으면 바로 그 장소로 가서 기다리면 될 것이다.”

“사부님께서 그곳을 처음으로 열게 된다면, 선운검파가 오대산검 제일의 문파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장은은 분명 풍림을 네 곁에 붙여 감시하려 들 것이다. 그를 따돌리고 열쇠를 가져올 수 있겠느냐?”

“물론이지요. 풍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두고 보세요.”

소정은 더는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꺼림칙했지만, 공을 세운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에 적절한 보상이 있어야 더 불나방처럼 달려들 테지.

“만약 성공한다면, 선운검파의 미래는 너다.”

“네? 그 말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가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정은 다시 한번 다짐해 주었다.

“차기 장문이 너라는 말이다.”

“목숨 바쳐 성공하겠습니다.”

은밀한 거래를 끝으로, 소정은 미련 없이 제자에게서 등을 돌렸다.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진심도 아니었다. 가은이 장문으로서 넘치는 인재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욕망이 득실득실한 이를 중용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모자람이 넘침보다 낫다.”

그 옛날 언니 소금정을 장문에 앉히며 스승이 얼버무린 변명이었다. 당시에는 가소로웠던 그 말이 이제는 다 이해가 되었다. 가은은 모든 것이 과거의 자신과 똑같았다. 하여, 하극상이 일어나기 전에 위협이 되는 잡초는 뿌리까지 완전히 뽑아버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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