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動須相應(동수상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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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선의 계획은 간단했지만 무모했다. 온전히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잡았으니, 설이도 진건도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오라버니, 이건 성공해도 위험합니다. 모두가 다 살 작전을 짜야지 어째서 자신을 희생하려는 겁니까?”
“설이 말이 백번 옳다. 이건 아니다. 차라리 내가 남겠다.”
물론 두 사람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이사형, 적사형을 버리실 작정입니까? 저를 믿어주세요. 목숨을 함부로 해서가 아닙니다. 승산이 있기에 해보려는 것이지요.”
“운선아.”
진건은 목이 메어 더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 어른이 되어서, 아우를 지켜주지는 못할망정 무거운 짐 덩이가 된 것 같았다. 무기력한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들은 오직 저와 교주님의 행방에 집중할 겁니다. 그게 명분이니까요. 하여 제가 유인책이 되는 동안 마치 먼저 떠난 것처럼 이곳에 숨어계시면 됩니다. 강가장은 원래 려국의 군사 거점이었다 들었습니다. 하여 경국인은 절대로 알 수 없는 비밀 장소가 많이 있지요. 이 동굴의 밑바닥에는 더 큰 밀실이 있습니다. 그곳에 몸을 숨겼다가 오대산검이 모두 떠나거든 황석산 초옥으로 가십시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절대로 못 찾을 겁니다.”
“좋아요. 십분 양보해서 그들이 우리의 흔적을 찾지 못해 성공한다 칩시다. 그럼 오라버니는요?”
설이의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하나뿐인 가족을 잃은 그녀에게 이제 의지할 데라고는 운선이 유일했다. 그를 잃을 바에는 차라리 쓸모없는 자신이 사라지는 게 나았다. 더는 소중한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절대로 죽거나 다치지 않을 테니까.”
운선은 차가운 설이의 손을 있는 힘껏 잡아주었다. 성곤이 죽은 지금, 그녀는 오롯이 그의 책임이었다. 이 가여운 아이를 평생 지켜줄 생각이었다.
“그들을 감쪽같이 속이고 유인할 방법이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당분간 몸을 숨길 곳을 찾아야겠지요. 다른 등잔 밑 말입니다. 물론 그 또한 생각해둔 곳이 있습니다.”
진건은 그의 말을 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 그의 의견이 예측대로 들어맞지 않은 적이 없었다. 운선의 안전만 보장된다면 해볼 만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럼 열쇠는 어쩔 작정이냐?”
진건은 현진의 유언을 떠올렸다. 가은에게 어미라고 속이면서까지 운선에게 전하겠다던 열쇠였다. 무공도 변변치 않은 가은이 가지고 있다가는 경국인들에게 뺏길 것이 자명했다.
“저는 오히려 가은에게 열쇠를 더 많이 줄 것입니다.”
“네? 어째서요?”
설이는 이번만큼은 운선의 의견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그녀가 가진 두 개를 뺏어오지는 못할망정, 더 얹어주겠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마지막 열쇠를 찾으려 할 것이다.”
마지막 열쇠의 장소는 오직 소소정만이 알고 있었다. 적대적 관계에 있는 운선보다 제자인 가은이 찾아내기 더 쉬운 건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찾고 싶도록 미끼를 던져놓아야 했다.
“그러다 그들이 열쇠를 모두 모아 그곳을 열어버리면요? 려국인의 보물을 뺏길 작정입니까?”
“그럴 리가. 만약을 대비하여 내가 한두 개는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운선의 대답을 듣고도 설이의 의혹은 가시지 않았다. 마지막 열쇠까지 찾아낸다면 그들은 적어도 다섯 개 이상을 갖게 되는 것이다. 가은이 갑자기 려국인의 핏줄이 당겨 우리에게 갖다 바치면 모를까, 열쇠를 뺏어오는 일은 절대로 수월하지 않을 터였다. 십분 양보하여 운선이 다시 뺏어올 능력이 된다손 치더라도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한 사람이 열쇠를 다 가지고 있으리란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오대산검의 고수들이 다섯 개를 나눠 가진다면 아무리 오라버니일지언정 불가능합니다.”
“그럴 일은 없다.”
운선은 설이를 위해 계획의 의도를 찬찬히 설명하였다. 이 모든 시작은 장은과 가은이 한패라는 가설에서 비롯되었음을.
“장은은 아마도 가은을 이용하여 나머지 열쇠를 찾을 거야. 그의 성정을 고려했을 때, 결단코 열쇠를 나눠 가질 리가 없다. 되레 가은이 계속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무공 실력이 변변치 않으니 그 누가 의심을 하겠느냐? 차라리 풍림과 같은 고수를 곁에 붙여두는 편이 훨씬 안전하겠지.”
“가은이 열쇠를 가지고 있다 칩시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가져옵니까?”
“가져올 수 있다면 좋겠으나 아니더라도 괜찮다 나머지를 가지고 그곳에서 기다릴 생각이니까. 열쇠가 스스로 걸어오게 되는 셈이지.”
불안해하는 설이와 달리 운선은 여유만만이었다. 마치 모든 일이 다 자신의 예측대로 되리라는 확신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오라버니. 어떤 변수가 있지 않겠어요? 항상 제 이의 제 삼의 계책을 준비하는 분이 왜 이리 근거 없는 자신감을 보이시는 겁니까?”
“우리에게는 장은만큼 영특하고, 정은률과 대적할 만한 무공을 지닌 인재가 있지 않으냐?”
“네? 누구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찬영이 말이다.”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설이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운선은 묵묵히 앉아 있는 진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 계획의 중심은 가은이었다. 그 아이를 속이고 이용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진건에게는 면목이 없었다.
“이사형께는 죄송할 따름입니다.”
“…….”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기실 진건은 사과를 받는 게 더 부끄러웠다. 가은이 번지르르한 말로 우리를 속인 것도, 오대산검을 불러들인 일도. 심지어 신교를,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므로.
“양해를 구할 일이 아니다. 나는 신경 쓰지 말아라. 그 아이와의 인연은 이미 끊어진 지 오래다. 오히려 부끄럽구나. 내 여식이 너를 죽이려 하는 이들 중 하나라니, 면목이 없다.”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누군가가 이유 없이 던지는 돌에 머리를 맞은 것입니다. 모두 천의일 뿐,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누구의 희생도 아닙니다.”
세 사람은 그저 서로를 바라보는 것으로, 고마움과 미안함을 대신했다. 죄책감 따위의 쓸데없는 감정을 쏟아붓기에는 여유가 없었다. 하루 이틀이면 그들이 도착할 터였다. 게다가 이 은밀한 계획을 절대로 먼저 들켜서는 아니 되었다.
“꼭 살아서 보자.”
“무운을 빕니다.”
적우를 등에 업기 직전, 진건은 운선을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이 포옹이 그들의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사형, 반드시 다치지 않고 오대산검으로 돌려보내겠습니다. 그 아이 걱정은 마십시오.”
“…….”
차마 고맙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식에게 아비라 밝히지도 못하는 주제에 지키겠다 나서는 것은 모순이었다. 쓰린 마음을 감추고 묵묵히 사라지는 일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오라버니, 꼭 다시 만나요.”
“그래.”
짤막한 인사였지만 모든 감정이 담겨 있었다. 오랜 시간 쌓여온 서로에 대한 신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미소만으로도 애틋한 마음을 다 읽어내는 두 사람이었다.
***
더 깊이깊이 들어간 진건 일행은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구석에서 꼬박 사흘을 보냈다. 진건은 아직 낫지 않은 내상을 치료했고, 설이는 적우를 보살폈다. 그리고 찬영은 설이가 만들어준 비월검의 검보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고모, 이제 움직일 때가 온 것 같아요. 무작정 기다리다가 되레 때를 놓칠지도 모르니까요.”
“정말 혼자서 괜찮겠니?”
영특하고 몸이 날랜 아이니, 웬만한 위기 상황 정도는 스스로 헤쳐 나가리라. 설이는 찬영을 믿으면서도 걱정을 놓을 수 없었다. 운선이 말한 계획안에서 찬영의 역할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더라면, 함부로 밖에 내보내지 못했을 것이었다.
변수를 행운으로 만들 변수. 운선이 찬영에게 내린 평가였다. 고작 며칠밖에 보지 못했지만, 이 계획의 적임자는 오직 찬영이라 생각했다. 내공을 깊이 배우지는 못하였으나 외공 만큼은 웬만한 강호의 고수에 뒤지지 않았으며, 꾀가 많고 임기응변에 능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 일을 그르칠 염려도 없었다.
“하루 이틀 내에 오대산검은 철수한다. 그러나 장은은 따로 조를 꾸려 열쇠를 찾으러 보낼 것이다. 그럼 너는 그들의 뒤를 밟아 열쇠를 회수해야 한다. 만약 여의치 않다면 무리하지는 말되, 열쇠의 행방을 주시하여라.”
“걱정하지 마세요.”
찬영은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의 신임을 받아본 게 처음이기도 했거니와, 임무 자체가 퍽 흥미로웠기 때문이었다.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의 삶도 매력적이지만 은밀한 사명을 지니고 적진에 뛰어드는 일이야말로 사내의 멋이었다. 시작도 하기 전에 마음이 설레어 심장이 쿵쾅거렸다.
“대신 명심해야 한다. 그 누구도 구하거나 해치면 안 된다. 너의 흔적을 들켜서도 안 된다. 만약 실패하더라도 약속한 장소로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 할 수 있겠니?”
“흐음. 노력해 볼게요.”
설이는 얼른 나가서 설치고 싶은 마음에 안절부절못하는 찬영을 굳이 반나절이나 더 동굴에 앉혀두었다. 몇 가지 방어 동작, 경공의 상위 운공법을 배운 뒤에야 비로소 고모의 곁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아, 이제 좀 살겠다.”
동굴 밖을 나오니 달도 보이지 않는 한밤중이었다. 펄쩍 뛰어 지붕 위에 올라 어둠에 숨었다. 다행히 경비가 삼엄하지 않아 들킬 염려는 없어 보였다.
“강운선은 어디에도 없다. 역시 잡히지 않은 모양이군.”
강가장이 워낙 좁다 보니 한 바퀴를 도는 데에 고작 반 시진도 걸리지 않았다. 그사이에 발견되지 않았다면 계획대로 착착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아무리 낙천적인 찬영이었지만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때, 어둠 속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두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찬영은 지붕 위에 납작 엎드리고 숨을 죽였다.
“백형진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단칼에 죽이는 건데.”
“어쩔 수 없지. 두타공파의 오지랖은 선대부터 내려오지 않았나? 당장은 아니겠으나 곧 맹주의 자리를 두고 경쟁하려 들 테니 우리 같은 소 문파의 인물들이야 죽으로 따를 수밖에.”
목소리만으로도 두 사람의 정체를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귀신이 나타나자 제자들은 나 몰라라 하고 도망쳤던 두 장문 놈들이었다. 오랫동안 동굴에서 사람을 못 만난 탓인지, 그들마저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놈이 혹시라도 백형진에게 고하는 건 아니겠지?”
“하더라도 믿어주겠나? 이미 간자라 오해받고 있으니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걸세.”
“하긴, 사문에서 버렸으니 말 다 했지.”
“근데 참 예상치 못했지 뭔가? 의리라면, 형제라면 팔딱팔딱 뛰는 심장도 내어줄 것 같은 호걸이 용문주 아닌가? 전후 사정도 들어보지 않고 다짜고짜 몰아붙이니 오히려 도사 놈이 딱해 보이더라니까?”
설이곡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한철에게로 다가와 나직이 속삭였다.
“용가 형제 중 이제 남은 건 용가현 혼자네. 용문파의 추락은 불 보듯 뻔하지. 자네 혹시 눈치채지 못했나? 용가현은 아우들의 죽음 때문에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더군.”
“흐음.”
한철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오대산검, 강호의 기둥이 흔들리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그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드디어 용호문이 대 문파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 그러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경전을 확보해야 했다.
“그래, 강운선은?”
“장문주 말에 따르면 절벽에서 떨어졌다는데 또 아나? 절벽에서 떨어진 것만 벌써 세 번째네. 매번 살아 돌아오니 누가 믿겠나?”
“하긴 이번에도 어디서 또 불쑥 나타나겠지. 신교 놈들 아주 귀신놀음에 재미가 들린 것 같네.”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던 찬영은 하마터면 크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며칠 전 자신을 귀신으로 착각해서 꽁지 빠지게 뛰던 두 늙은 장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떠올랐던 탓이었다. 그때도 느꼈지만 참으로 허접한 놈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