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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무십일홍-133화 (133/209)

133화. 毋望之人(무망지인)

횃불 아래에서 마주한 백형진의 얼굴은 그 누구보다 냉정했다. 입가에는 미소가 여전했으나 눈빛은 살벌했다.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결과는 같았다. 서용은 오늘이 자신의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딱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정직하게 대답한다면 목숨을 살려 드릴 수도 있습니다.”

“…….”

불쑥 반항심이 솟아올랐다. 손끝, 발끝이 모두 피투성이였다. 고작 반나절 만에 모진 고문으로 폐인처럼 만들어놓고는 세상 자비로운 척하는 꼴이 역겨웠다. 그러나 욱하는 마음을 뱉어낼 용기는 없었다.

“자, 기억을 잘 떠올려 보십시오. 그날, 강가장에서 강운선을 만난 날 말입니다. 그곳에 누구누구 있었습니까?”

뜻밖의 질문이었다. 그의 행적, 그들의 대화, 목적지를 알게 된 과정 등을 물으리라 예상했던 서용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니, 다시 묻겠습니다. 그곳에서 검귀 성곤을 보았습니까?”

“……?”

순간 머릿속에서 그날의 장면이 펼쳐졌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괴짜 소년, 마치 거인 같았던 마진건, 소년이 고모라 부르던 여인, 그리고 강운선. 그 외의 누구도 본 적이 없었다.

서용은 눈을 부릅뜨고 상대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절대로 협조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러나 형진은 그의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답을 얻었다.

“아, 역시.”

대답은 만족스러웠다. 애초에 운선은 성곤을 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이미 검귀 성곤은 죽었으니까.

“사실 당신의 재능이 아깝긴 합니다. 물론 강운선에게 놀아나 두타산으로 시선을 돌리는 데 일조한 것은 과실이지요. 허나, 그마저도 알아채지 못하고 허튼짓만 해댄 늙은이들보다는 월등히 뛰어나니까요. 그렇지만 말입니다.”

형진은 한쪽 무릎을 대고 쭈그려 앉았다. 아무 뒷배도 없는 불쌍한 소년의 팔자가 측은하여 이유라도 알려주고자 함이었다.

“당신이 죽지 않으면 용문파의 명예가 실추되니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고작 그 정도 수준의 인물들일지언정 용문파는 맞서 반박할 힘이 없으니까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대신 당신의 하찮은 목숨으로 용문주님의 체면을 지키게 되었으니 대의를 위한 희생이라 여기십시오.”

“하아.”

서용은 이제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십수 년간 정의라고 믿어왔던 신념은 깨어진 지 오래였다. 일말의 희망이었다면 누구라도 좋으니 진심으로 사과해주길 바랐다. 대의니, 희생이니, 씨도 안 먹힐 개소리 말고. 네 잘못이 아니다. 그저 재수가 없었다, 구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 정도 위로여도 충분했다. 그러나,

“대의? 하하하하하.”

실성한 듯 웃어 젖히는 서용을 내버려 두고 형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자신의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하찮은 자라서가 아니라 밑바닥에 손톱만큼 남은 죄책감 때문이었다.

“최대한 덜 고통스럽게 끝내주게.”

그의 뒤에 서 있던 용문파의 도사에게 신신당부하고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래도 동문에게 목숨을 맡기는 것이 보기 좋은 마무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백형진! 내 여기서 천운으로 살아남는다면 반드시 당신의 끝을 지켜보겠다. 당신이 지껄인 대의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보여주겠다.’

서용의 처절한 웃음은 그칠 줄 몰랐다. 살아날 가능성은 아예 없었지만 이렇게라도 원망을, 저주를 쏟아내고 싶었다.

“언젠가 네놈이 일을 크게 칠 줄 알았다. 다 네가 자초한 일이니, 원망은 말아라.”

공교롭게도 그의 생사를 거머쥔 이는 대사형이었다. 입문 때부터 줄곧 선진으로 있으면서 은밀히 괴롭히곤 했더랬다. 그 악연이 결국 이런 식으로 마무리된다는 게 웃기면서도 슬펐다.

“죽어라.”

서용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저 정도 하찮은 인간에게 죽는다는 게 억울하고 분했다. 차라리 존경했던 용가현의 칼이었다면 좀 나았을까?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마지막 순간을 기다렸다.

퍽!

“윽!”

단말마의 비명은 서용의 것이 아니었다. 어리둥절하여 눈을 떴을 때는 아주 익숙한 얼굴이 그를 향해 비실비실 웃고 있었다. 윤찬영이었다.

“어이! 못생긴 도사 놈아. 신파 그만 떨고 나랑 같이 가자. 응?”

“으어어엉.”

그제야 참고 참았던 눈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평생을 존경했던 이들에게 버림받은 그 날은, 그가 가장 경멸하던 이들에게 구원받은 날이기도 했다. 참으로 괴이한 인연이었다.

장은의 발밑에 꿇어앉은 가은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머리채를 잡힌 채로 끌려온 터라 온몸이 흙투성이였다. 앞섬이 뜯어진 저고리는 이리저리 찢기고 더럽혀져 입지 않으니만 못했다. 가은은 아프기보다 수치스러웠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거짓을 고했겠습니까?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마두에게 려국인이라 거짓을 말하니 믿어주었습니다. 그뿐입니다.”

“흐음.”

눈을 가늘게 치켜뜨고 바라보는 장은의 얼굴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처음부터 그는 영악한 계집애의 말 따위는 믿지 않았다. 쓰임이 있으리라 생각해서 이용했을 뿐, 아무런 연대의식도 없었다. 그러니 모진 고문을 하다가 죽인들, 뭔 상관이 있겠는가?

“그럼 네가 강운선의 목에서 떼어낸 물건이 무엇이냐?”

가은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서 들통나면 모든 것이 수포가 되는 것이다. 태연하게 둘러대어 이 위기를 넘겨야 했다.

“차라리 저를 죽이세요.”

“뭐?”

“이걸 얘기하면 사문과 스승님께 큰 죄가 됩니다. 차라리 죽이세요.”

“이런 깜찍한 년.”

장은은 마지막까지 살기 위해 발악하는 가은이 가소로웠다. 고작 소소정을 끌어들여 어찌어찌 넘어가려나 본데 어림없었다.

“너를 죽일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구나. 나는 깜냥도 안되면서 잔머리 쓰는 것들을 제일 혐오하거든.”

“잔머리 아니에요. 그럼 스승님을 만나게 해주세요. 그분께 여쭤보고 말씀드리지요.”

초조해진 가은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과연 먹힐까? 아예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장은의 뒤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는 은률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끌려오기 직전, 그는 남몰래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그게 뭐든, 절대로 다 털어놓지 마. 사형은 필요 없는 사람은 쉽게 버린다. 뭐라도 궁금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 거라면 자신 있었다. 평생을 거짓말로 살아왔으니 그럴싸하게 둘러대는 건 일도 아니었다. 다만, 은률의 조언이 먹혀들어야 가능했다.

“됐다. 질질 끄는 꼴이 보기 싫다. 그만두자. 은률아, 그래도 그간의 정이 있으니 네가 아프지 않게 끝내주려무나.”

“좋습니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신 그에 걸맞은 대가를 받고 싶습니다.”

‘이것 봐라?’

죽기 직전의 발악이라기에는 너무도 당당한 가은의 모습이 꽤 흥미로웠다. 자신을 죽이겠다는 사람과 거래를 제안하다니, 대범하다 못해 멍청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만큼 가치 있는 이야기인가?”

“물론이지요. 그러나 문주님께 말씀드리는 순간, 저는 사문과 사부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여기서 살아나간다 해도 결국 사부님의 손에 죽겠지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소소정이 가은을 이용하여 몰래 무슨 짓을 꾸미고 있었다면 지금, 이 고발은 배신과 다름없었다. 장은의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럼 네 안위를 보장해주는 조건이면 되는 것이냐?”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제게 선운검파의 차기 장문 자리를 주십시오.”

마주 보는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각자의 눈동자 속에 서로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이목구비는 달랐으나 표정은 판박이처럼 똑 닮아 있었다.

“얼마나 대단한 음모인지 일단 들어보자. 그래, 숨기고 있는 사실이 무엇이냐?”

“사부님이 저를 소백화에게 보낸 걸 알고 계십니까?”

“뭐?”

여태 감정의 동요가 없던 장은이었다. 그런데 현진의 이름이 튀어나오자마자 대번에 눈썹이 꿈틀거렸다. 언제나 그녀가 약점이었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

어느새 성큼 다가온 장은이 가은의 멱살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가냘픈 목이 똑 하고 부러질지도 몰랐다.

“거, 건네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현진의 이름이 나왔으므로 이제는 그 뒷얘기를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은이 잡은 멱살을 놓으니, 가은이 한참 동안 숨이 넘어갈 정도로 기침을 해댔다.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이의 이름을 올렸으니 그 대가를 치러야 할 터.”

“무섭지 않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장은은 당장이라도 죽일 듯이 가은을 노려보았다. 상대에 대한 자비심이라고는 한 톨도 없었다. 그러나 뻔뻔하게도 그녀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말해라.”

웃음기 없는 장은의 얼굴은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싸늘한 시선에 온몸이 얼어붙을 것 같았지만, 가은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소소정의 서신과 그 내용, 그리고 현진에게 알아내라고 한 여덟 글자에 대한 것까지도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소백화는 제가 려국인이라 거짓을 말하자 반드시 강운선에게 전하라 하면서 이것을 주었습니다.”

가은은 품속 깊이 넣어둔 열쇠 네 개를 꺼내 들었다. 영롱한 빛깔의 구슬에는 각각, 雷, 霜, 雨, 雪의 글자가 반듯하게 적혀 있었다.

“이것이 비밀의 그곳을 여는 열쇠라 들었습니다.”

“그렇군.”

그동안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의 해답을 모두 찾아낸 느낌이었다. 조양이 왜 순순히 그곳이 있는 장소를 말해주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어차피 열쇠가 없으면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었군. 우영은 이 중 하나를 가지고 있었을 테고. 그랬기에 강운선이 위험을 무릅쓰고 두타산에 갔던 게야.’

무엇 하나 어긋남이 없이 딱 들어맞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가은이 내건 거래의 조건이 너무 가볍다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여기 네 개, 강운선에게 뺏긴 게 둘, 그리고 소소정이 숨긴 게 하나란 말이구나.”

“네, 그런 셈이지요.”

장은의 머릿속에는 이미 앞으로의 계획이 다 세워졌다. 일곱 개의 열쇠를 모두 찾는 것. 강운선이 가져간 것은 그대로 두어도 상관없었다. 나머지를 모두 모아 그곳으로 갔을 때, 운선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 하여 남은 하나를 찾는 것이 순서였다.

“소문주를 모셔와라.”

단호한 사형의 명령에 뒤에 서 있던 은률이 뛰쳐나갔다. 이제 가은의 목숨은 안전했다. 그것만으로도 사형에 대한 원망이 옅어지는 기분이었다.

장은은 은률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이윽고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옆으로 은밀히 다가왔다. 그리고는 끈적끈적하게 피가 늘어 붙은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은아,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라.”

가은을 부르는 목소리는 마치 친 오라비처럼 다정했다. 방금까지도 목을 비틀어 죽이려 했던 그 사람이 맞나 싶었다.

“나는 소소정을 이용하여 열쇠가 있는 장소를 알아낼 작정이다. 그리고 그 열쇠를 직접 찾아오는 사람은 반드시 너여야 한다. 열쇠를 손에 넣은 그 사람이 바로 선운검파의 차기 장문이 될 테니까 말이다.”

*** 무망지인(毋望之人):

급한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뜻밖의 도움을 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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