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脣亡齒寒(순망치한)
용가현은 이름도 모르는 까마득한 항렬의 제자를 배려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운선과 신교를 놓친 일이 원통했고, 이 많은 강호인 앞에서 의심받는 현실이 수치스러웠다. 그러니 그의 결론은 단 하나였다.
“감히 용문파에 숨어들어 도의를 거스르고 형제들을 기만하다니. 네놈을 살려둘 수 없다.”
그깟 제자 하나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 아이 목숨값으로 신뢰를 회복한다면야 몇십 번도 가능했다. 주먹을 그러쥐는 용가현의 모습에서 누구도 그의 결백함을 모를 리 없었다.
“죽어라!”
“용문주님!”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참극을 가로막은 이는 백형진이었다.
“진정 이 도사가 세작이라면 알아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일단 고정하십시오.”
성급하게 결론 낼 일이 아니었다. 세작 여부를 떠나, 그가 강운선과 강가장에서 만났다면 분명 주워들은 정보가 있을 터였다. 꽤 영특해 보이는 서용을 이용해서 뜻하지 않은 이득을 볼지도 몰랐다.
“백대협, 이건 우리 집안일이니 끼어들지 마시오.”
“네. 그 마음 잘 이해합니다. 허나, 저에게 강운선에 대한 일이 얼마나 중한지 아시지 않습니까? 실례를 무릅쓰고 부탁드립니다. 이 자를 철저히 조사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용가현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차차 가라앉았다. 어차피 이 지경까지 왔으니 형진의 부탁을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하여 바닥에 엎드려 벌벌 떨고 있는 서용을 내려다보며 냉정하게 꾸짖었다.
“너는 이제 용문파의 제자가 아닌, 한낱 죄인에 불과하다. 그 구차한 목숨이라도 건지고 싶거든 아는 것을 모두 털어놓아야 할 것이다.”
“…….”
서용은 그 자리 그대로 꼼짝하지 않고 엎어져 있었다. 어깨가 들썩이는 양이 남들이 볼 때는 꼭 경련을 일으킨 것 같았다. 그러나 기실 그는 우는 것이 아니라 웃는 중이었다.
‘고작 자신들의 명예를 위해 누군가의 목숨 따위 쉽게 짓밟는구나. 참으로 대단한 의협이다.’
포박되어 끌려가는 그를 보면서, 한철과 설이곡은 입맛을 쩝쩝 다셨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는 죽이는 게 최선이었건만, 막판에 어그러진 것이 영 찝찝하였다. 형진에게 괜한 소리를 나불거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하긴 이제 저놈의 세 치 혀를 누가 믿겠는가? 게다가 경전 일부를 얻었으니 되었다.’
한철은 가슴 속에 숨겨놓은 진짜를 생각하니 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백형진이 경전을 불 속에 집어넣자고 했을 때, 그는 기가 막힌 꼼수를 생각해냈다. 거짓으로 아무 종이나 쑤셔 넣고 진짜는 품속에 빼돌리는 작전이었다.
‘아마도 누군가는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테지. 적어도 설이곡 저 교활한 돼지 새끼는 따로 챙겼을 것이다.’
그럼 이제 할 일은 뻔했다. 흩어진 진짜를 모으는 것. 오대산검을 제외한다면 그 아래는 실력이나 규모나 다 고만고만했다.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벌레보다 못한 것들.’
멀어지는 제 문파의 장문들을 바라보며 형진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역시 불쏘시개가 되어버린 종이 쪼가리들이 거의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하나로 만들어질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속임수일 뿐이었다.
‘이제 온전한 한 권은 나에게만 있다. 운선을 이길 수 있는 이는 오직 나밖에 없다.’
서용에게 물어볼 말은 하나였다. 그 질문에 답을 들은 연후에 두말할 것 없이 목숨을 거둘 생각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용문파는 오대산검에서 다시는 목소리를 내지 못할 것이다. 고대산파가 강호에서 저문 지는 이미 오래, 선운검파는 애초에 비견될 주제도 못 되었다. 남은 건 황석파 하나.
‘스승님, 진정한 맹주가 무엇인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는 두타공파를 만들겠습니다. 바로 제 손으로 말입니다.’
수십 번 다짐하는 형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스승의 주검 앞에서 흘렸던 것과 달리, 그의 진심이 담긴 첫울음이었다.
인경은 벌써 한 식경이 넘도록 주변의 덩굴 식물로 밧줄을 엮는 중이었다. 얼마나 열심인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분명히 살아있다.’
가은의 뒤를 쫓아 동굴로 들어왔을 때, 그 어둠 속에서도 똑똑히 보았다. 가은과 정은률의 현란한 연기력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운선의 눈빛을.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까지도 그가 놓아둔 덫이 분명했다. 장은은 자신의 승리라 여겼겠지만 인경의 생각은 달랐다. 심지어 가은의 검에 찔리는 찰나에도 운선의 표정은 평화로웠다.
‘성곤과 사형제들에게 시간을 벌어주었구나. 매번 미끼가 되어 그들을 구하는구나.’
그런 그가 한없이 존경스러우면서도 부러웠다. 늘 사문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정작 위험이 닥치면 두려워하는 정파의 인물들과 너무나 대비되었다. 고작 종이 쪼가리에 형제의 목숨을 앗는 그들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용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에게는 신념이 없었다.
“강대협!”
줄기로 엮은 밧줄을 말아쥐고 낭떠러지로 다가갔다. 워낙 가파르고 바람이 강해 자칫 발을 헛디디면 그대로 추락이었다. 인경은 배를 깔고 납작 엎드렸다.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데에 체면은 아무 의미 없었다.
“강대협!”
“고인경?”
여러 차례 부름에서야 반가운 목소리가 응답했다. 인경은 재빨리 절벽 아래로 밧줄을 내렸다. 크게 다친 그가 과연 가파른 벽을 오르는 것이 가능할까 싶었지만 일단 시도라도 해보자는 심정이었다.
“줄이 닿습니까? 올라오실 수 있겠습니까?” “고문주님, 움직일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내려오시지요.”
“네?”
인경은 잠시 망설였다. 운선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과연 자신의 실력으로 이 가파른 절벽을 내려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수월합니다.”
마치 그의 생각을 들여다보듯, 운선의 다정한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어차피 내려갈 거라면 더 망설이기도 민망한 상황이었다.
줄기의 한쪽을 나무에 묶고 다른 한쪽을 허리에 맨 채로 조심히 발을 떼었다. 바람은 거셌지만, 생각보다 벽이 울퉁불퉁하여 발을 디딜 곳이 많았다. 걱정과 달리 곧 운선이 있는 절벽 중턱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어?”
인경은 앞에 펼쳐진 풍경에 당황하여 두 눈을 세차게 비벼댔다. 그곳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따뜻한 햇볕을 가득 받은 봄꽃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도원경이 실재한다면 여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곳은 어린 시절 사형과 저의 비밀 장소입니다.”
아늑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종현은 무공을 연마하고 그는 책을 읽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하루하루가 오늘 같던 시절이었다. 이곳에 사형의 수월을 들고 다시 찾아올 줄이야. 운선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뭉클한 감정이 잔잔하게 움직였다.
“언제부터 제가 따라온 걸 아신 겁니까?”
“동굴에서부터?”
운선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문파도 국적도, 심지어 철학도 달랐으나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적어도 나를 해하는 적이 되지는 않으리라는 믿음.
“장문주의 계획을 눈치챈 겁니까?”
“다는 아니고, 일부는요.”
“그럼 가은 낭자는요?”
“음.”
인경이 그녀를 안다는 사실에 잠깐 멈칫했지만, 그렇다고 세세한 이야기까지 늘어놓을 수는 없었다.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얼렁뚱땅 넘겼다. 대답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인경은 좀 더 진지한 주제를 꺼냈다.
“상처는 어떠십니까? 제가 도울 정도입니까?”
운선은 이번에도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사실 가은이 자신을 찌른 일은 계획에 없었다. 동굴로 유인하여 절벽에서 사라지기까지의 과정은 거의 완벽했다. 이 모든 일이 가은이 장은에게 전서구를 날린 사실을 진작에 눈치챘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설마 그녀가 그리 모질고 잔인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좀 다쳤습니다. 아니 사실 심각합니다. 하여, 염치 불고하고 문주님께 도움을 청하려고 합니다. 매번 부탁만 드려 죄송합니다.”
만약 부상이 아니었다면 기척을 낼 생각이 전연 없었던 운선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정도로 위기였다. 골절은 그리 심하지 않았으나 좌 요부의 부상은 꽤 깊었다. 절망적 상황에서 구원자처럼 나타났으니 인경의 등장은 실로 감동이었다.
“제가 무엇을 도와야 합니까?”
“저를 숨겨주십시오.”
“네?”
“절대로 그들이 생각지도 못할 곳에 숨겨주십시오.”
“강대협……, 설마?”
눈치가 빠른 인경이기에 그의 의도를 단박에 알아챘다. 생각지도 못할 곳. 자신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곳이면 단 한 군데밖에 없었다. 다만 선뜻 수락하기 어려울 뿐이었다.
“압니다. 고대산파와 신교의 원한을요. 얼마나 염치가 없는 부탁인지 알고 있습니다.”
“네. 염치없으십니다.”
인경은 부인하지 않았다. 적우와 이서문이 나타난 그 날, 태사부님이 봉우리에 자신을 가둬둔 그 날. 그 함박눈을 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하필 그때의 원흉인 신교의 마두를 어찌 성역에 들여놓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강운선이라도 안될 말이었다.
“대신 거래를 하지요.”
“네? 그게 무슨.”
운선의 고요한 얼굴에 결연함이 들어찼다. 이 거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으나 지금으로서는 최선이었다.
“일전에 황석파에 묶인 적이 있습니다. 문주님의 도움으로 지인을 구하러 갔지요. 기억이 나십니까? 그러나 저는 어리석게도 함정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하마터면 소중한 이를 잃을 뻔하였고요.”
“아…….”
황석파의 장문 취임식, 그리고 하산하여 묵었던 객잔에서 운선을 도왔던 일이 떠올랐다. 그 이후로 반년 넘게 그가 사라져 의문이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곳에서 운명처럼 벽서(壁書)를 보았습니다. 네, 황석파 내전 무공 비월검법과 진헌신장이었지요. 그리고,”
운선은 잠시 말을 끊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무조건 그의 도움을 얻어내야 했다. 지금으로선 고대산만큼 안전한 도피처는 없었다. 피가 겨우 그치기는 했으나 통증이 상당했다. 이대로는 도망은커녕 십 리도 가기 전에 행적을 들킬 터였다. 어떻게 해야 인경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을지 계속 머리를 굴리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오대산검의 기원을 들었습니다. 고대산파, 선운검파, 황석파의 시초를 말입니다. 하여 그곳에 적힌 검법은 비단 비월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경의 심장이 팔딱팔딱 뛰었다. 현존하는 누구도 완벽한 검보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 존경하던 태사부 매월 신양선조차 검법의 팔 할만을 익혔다고 했다. 정말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고대산파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었다.
“네, 그곳에는 매월검법의 원문이 적혀 있었습니다. 백여 년 전에 소실된 원문 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모두 외웠습니다. 만약 저를 도와주신다면 검보(劍譜)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아아…….”
인경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토록 갈망하던 고대산파 재건의 꿈이 눈앞에 선명한 형체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