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陋名(누명)
가은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위기 상황에서 늘 그렇듯, 큰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진심으로 두렵다는 것이었다.
“문주님, 목숨을 걸고 연기하지 않았습니까? 이리 애원할게요. 저를 좀 믿어주세요.”
“흐음.”
그러고 보니, 조양이 너무 쉽게 그곳의 장소를 말해준 것도 의심스러웠다.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갈 일이지, 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뭉그적거렸을까? 고유생의 목격담도 괴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조양은 몰래 우영을 수배하여 두타산에 가둬놓았다. 비록 실물은 보지 못했지만, 틀림없이 우영이 고문당했던 흔적을 보았다고 했다.
‘좌영이 죽은 후에는 폐인이 되어버린 그를 굳이 왜 잡아두었을까? 행여 우영이 그곳에 실재했다고 해도 강운선이 굳이 그 병신을 구하러 두타산까지 왔다는 말인가? 조양과 대결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 구할 가치가 있었다고? 아!’
그제야 모든 칠교 조각이 다 맞아떨어졌다. 조양과 강운선의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들, 뜬금없이 조양의 목숨값을 들먹였던 금황자,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흑접쌍살까지.
“그곳을 찾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었어. 문을 여는 또 다른 비밀이 있구나?”
“아아.”
우려가 현실이 되자, 가은은 눈물만 주룩주룩 흘렸다. 이 사람 앞에서는 그 어떤 거짓말도 들키고 만다. 무력감이 거듭되자 이제는 두려움이 되어버렸다.
“아는 대로 말하렴. 그럼 안 아프게 죽여주마. 아니면, 네 고운 얼굴을 조금씩 무너뜨려 주지.”
장은은 소매 속에서 손바닥 크기의 단도를 꺼냈다. 운선의 허리를 찌른 것과 완전히 같은 모양이었다. 한쪽 날이 시퍼런 그것은 살에 닿기만 해도 뭉툭 썰려 나갈 듯이 날카로웠다.
“제발, 살려주세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가은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덜덜 떨었다. 장은의 바짓가랑이를 얼마나 꽉 잡았는지 손톱이 들려 그 사이로 피가 배어 나왔다. 손이 온통 피범벅이 되어도 상관없었다. 이것마저 놓치면 이대로 끝이었다.
“나도 너처럼 예쁜 애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난 아름다운 걸 좋아하거든. 근데 또 거짓말은 지극히 혐오해. 넌 다 좋은데, 요 입이 방정이야.”
“으윽.”
단도의 등으로 입을 툭툭 칠 때마다 이가 부러질 듯 아팠지만, 비명도 지를 수 없었다. 언제고 칼을 뒤집어 입술을 썰어낼까 봐 숨도 내쉬지 못했다.
“사형, 내려놓으십시오.”
“이런.”
또 다른 칼이 쓱 다가와 장은의 목덜미를 쿡 찔렀다. 여태 끼어들 틈을 보고 있던 은률이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닙니다. 게다가 이 아이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선운검파와 척을 지게 됩니다. 문파의 제자를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것은, 오대산검의 암묵적 규율이 아닙니까?”
위협할 의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부탁이었다. 은률의 힘으로는 도저히 사형의 결정을 막을 수 없었다. 최대한 설득하다가 실패하면 몸으로라도 막아 가은이 도망갈 틈을 만들어줄 심산이었다.
“아하! 하하하.”
“사형.”
갑자기 장은이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엔 어깨가 들썩들썩하더니, 점점 배를 감싸 쥐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얘야, 아주 대단한 걸 훔쳤구나. 저 얼음덩어리 같은 놈의 마음을 가졌으니 말이다. 정말 깜찍한 재주가 아니더냐? 아하하.”
어리둥절 어쩔 줄 모르는 은률과 달리, 가은의 얼굴에는 수치심이 가득했다. 어느새 장은의 발목을 놓은 손으로는 바닥의 흙을 가득 움켜잡았다.
‘이 굴욕을 절대로 잊지 않으리라. 무슨 일이 있어도 천하를 손에 넣으리라.’
어린 여인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누군가를 향한 절대적인 미움이 쌓여가고 있었다.
어느덧 내려앉은 노을이 강가장을 붉게 물들였다. 아수라장과 같았던 마당은 적막에 싸여 있었다. 절친한 동료를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이, 거침없이 욕망을 드러냈다는 부끄러움이 차올라 누구 하나 입을 뗄 수 없었다.
“이 모든 게, 마두 강운선의 계략입니다. 그는 여러분을 선동하여 이성을 잃게 하였고 협의를 해쳤습니다. 절대로 우리의 죄업이 아니니, 털고 일어나십시오.”
백형진의 전음은 살아남은 협객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적셨다. 그래 내 탓이 아니다. 모두 강운선, 그 마두의 수작이다. 불합리한 믿음은 점처럼 작았다가 차츰 눈덩이가 되고, 거대한 태양이 되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부끄러움이 증오로 바뀌었다.
“강운선을 찢어 죽이자!”
“신교를 태워 버리자!”
그들의 소름 끼치는 위선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서용은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이것이 그가 믿고 따르던 의협이었나? 정의였나?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강운선이 흩뿌리고 간 경전의 조각은 갈가리 찢겨 거의 소실 되었습니다. 그나마 온전한 것이 있다면 모두의 앞에서 불태우겠습니다.”
형진은 성큼성큼 마당 한가운데에 피운 모닥불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한 권의 책자를 꺼냈다. 모두가 그렇게 찾던 온전한 형태의 ‘해심밀경소’였다.
“이것은 맹주님께서 보관하시던 사본입니다. 과거 강운선이 거짓으로 수기하여 진본과는 거리가 있습니다만, 이 또한 경전 일부이지요. 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태워 강호의 분란을 종식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렇지만.”
“어어.”
여기저기에서 아쉬움의 탄성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형진은 망설이지 않았다. 곧바로 나아가 거침없이 불구덩이 속에 던져넣었다.
“이로써, ‘해심밀경소’는 영원히 강호에서 사라졌습니다. 존경하는 강호 선배님들, 혹시 한 장이라도 온전한 것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 이 불 속에 버리십시오. 서로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십시오. 또한, 마두의 계략에 빠져 안타깝게 숨진 형제의 한을 풀어주십시오.”
“그럽시다.”
“그게 맞지요.”
웅성웅성 떠드는 사람들 사이로 몇몇 고수들이 솔선수범하여 나섰다. 나름 유명한 문파의 원로들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욕심을 내봤자 돌아오는 건 의심밖에 없었다. 고작 몇 장으로는 의미도 없을뿐더러 괜히 시치미 떼다가 강호의 표적이 될지도 몰랐다. 하나둘 경전의 일부를 불 속에 던져넣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당연히 한철과 설이곡도 포함이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의 유지를 이어 강호의 평화를 지켰으니 그것으로 되었습니다. 이제 강운선을 잡아 효수하여 원수를 갚는 것만이 저의 남은 일입니다.”
눈물로 호소하는 형진에게 감읍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존경할 만한 군자였다.
“그러나 그 쥐새끼 같은 놈을 어찌 잡습니까?”
“검귀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이를 어찌합니까?”
감동의 시간이 지나자 다시금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오늘로써 신교를 멸망시킨다고 자신했던 그들이었다. 그런데 엄한 동료들만 잃었으니 기운이 빠질 만도 했다.
우울한 표정의 사람들 속에서 눈치만 보던 한철은, 드디어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설이곡과 눈빛을 주고받더니만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형진의 친절한 배려를 받아 좌중 앞에 나섰다. 수없이 연습해 보았건만 막상 입을 떼려고 하니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절대로 실패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 해결하지 못하면, 평생을 강호인들의 손가락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었다. 뿐인가? 품속에 감춰둔 문파의 미래도 끝이었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못마땅한 얼굴로 앉아 있는 용문파의 용가현을 흘끗거렸다. 그것이 그나마 느끼는 최소한의 죄책감이었다.
“강운선은 이미 마교의 우두머리, 검귀를 도망시키고 우리를 유인하였습니다. 실로 대단한 계책 같지만, 선발대인 우리는 미리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헌데,”
한철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생뚱맞은 거짓말을 하려니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러나 이것은 그와 문파의 명예가 걸린 일이었다. 아주 그럴싸하게 마무리해야 했다.
“우리를 방해한 첩자가 있었습니다.”
“무슨?”
“뭐라고요?”
“그게 누굽니까?”
모두의 관심사가 단번에 새로운 화제에 쏠렸다. 그들에게는 지금 마음에 풀지 못한 죄책감을 덮어써 줄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게 누구든 딱히 상관없었다.
“저기, 저자입니다.”
한철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 끝에 선 이는 회색 도복을 단정히 입은 어린 도사였다. 바로 서용이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우리가 화악산으로 접어들었을 때, 자네가 그러지 않았나? 강가장으로 가봤자다. 두타산에 강운선이 있다.”
“자네가 간자(間者)가 아니라면 아무 근거도 없이 강운선의 위치를 알 리가 없지. 사실은 그를 도와 성곤과 그의 일당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준 게 아닌가?”
설이곡까지 나서자 더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마당 안은 삽시간에 분노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어린 도사를 향한 거침없는 욕설과 비난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누구도 서용의 억울함을 고민하지 않았다. 명망 높은 이의 거짓말은 이름 없는 도사 나부랭이의 진실보다 가치가 있었으므로.
“문주님, 저는 결단코 그를 알지 못합니다. 믿어주십시오.”
이제 서용이 기댈 사람은 용가현밖에 없었다. 적어도 사문의 제자를 내치지는 않으리라. 신뢰가 가지 않더라도 차후에 따져 물을 일이지 이 자리에서만큼은 감싸주리라 믿었다.
“이게 다 무슨 소란인가? 누가 감히 용문파를 깎아내리려 음모를 꾸민단 말인가?”
용가현은 뜬금없이 용문파를 끌어들인 한철에게 짜증이 치솟았다. 고작 작은 문파의 장문에 불과한 자가 감히 오대산검의 제자를 몰아붙이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게 틀림없었다.
“용문주님, 오해 마십시오. 절대로 용문파를 욕보이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아마도 그자는 문주님께서도 알지 못하는 까마득한 항렬의 제자일 테지요. 네, 바로 마교가 은밀히 심어놓은 첩자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보십시오. 선발 조에 속한 형제들의 반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저리 어설프고 미숙한 도사가 어찌 살아남았겠습니까?”
“그런.”
서용은 하도 어이가 없어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거짓말이야말로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라 여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그였다. 하여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거짓 비난을 감당할 도리가 없었다.
“네 입으로 말해 보아라. 그럼 어째서 두타산에 그가 있음을 알았느냐?”
용가현의 얼굴이 분노로 새빨개졌다. 시원하게 밝혀내지 않으면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수백 년 이어 온 용문파의 위명을 이렇게 무너뜨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처음 보는 자에게 끌려갔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강가장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다음 목적지가 두타산이라 들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강가장까지 어찌 끌려간 것입니까?”
한발 물러서 있던 백형진이 끼어들었다. 어쩐지 많은 부분이 생략된 느낌이었다. 애초에 한철이나 설이곡의 말을 믿지도 않았거니와, 서용에 대한 흥미도 생긴 참이었다. 두타산에서도 빨리 강운선을 쫓아야 한다고 재촉한 이가 그였던 것이 생각났다.
“그것은 그 낯선 자를 만난 일부터 거슬러 올라…….”
“또 저 소릴.”
서용이 귀신놀음에 당한 그 일을 꺼내려 하자, 설이곡이 대뜸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전후 사정이 밝혀지기 전에 저 오만방자한 놈의 입을 다물게 해야 했다.
“낯선 자라니요? 내내 저 얘기를 하는데 우리는 전혀 본 적이 없습니다.”
그가 선발 조에 살아남은 십수 명을 돌아보며 일일이 물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고개를 가로 저였다. 이미 매수된 그들 중에는 서용을 도와줄 이가 아무도 없었다.
“보십시오. 누구 하나 본 이가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자기 입으로 강가장에 끌려갔다 했지요? 네, 한나절 넘게 사라진 저 도사가 갑자기 나타나더군요. 그 사이 신교 놈들과 접선한 게 아니겠습니까?”
“이보십시오!”
예의를 목숨처럼 여기는 서용이었으나 더는 참고 들어줄 수가 없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힘껏 고함을 쳤다.
“그리 의심됐다면 뜻대로 하실 일이지 어째서 한낱 도사 나부랭이의 의견을 따랐답니까?”
서용이 되묻자, 한철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저 말이 나오기까지 단단히 밑밥을 깔았으니 이제 낚아 올리기만 하면 되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감히 오대산검의 제자를 대놓고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아아…….”
서용은 얼마나 억울한지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자신이 이미 그물에 단단히 얽혀 버렸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